1377화. 준비는 이제 다 마쳤단다. (2)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물가로 나온 장강의 어부들이 웅성거렸다.
저 멀리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지금이야 좀 꺼져 가는 기미가 보인다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 전체로 번질 것처럼 불길이 거세게 치솟았었다.
강변이 불길에 휩싸이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기사(奇事)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불길뿐만이 아니었다.
“배, 배들이⋯⋯!”
거대한 선박들이 장강의 중앙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일반적인 상선과는 전혀 다른 형태다. 다른 배들을 따라잡고 들이받는 데 특화된 수로채의 전투선들이었다.
동으로 끊임없이 항진하는 배의 행렬을 보며 모두가 절로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전 장강을 들었다 놓을 만한 거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 전쟁이라도 나는 건가?”
“이 사람아, 말조심하게! 전쟁이라니, 불길하게!”
말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여기저기서 진저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마저 불안감이 잔뜩 실려 있었다. 영 헛소리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아, 아니면 수로채 배들이 저리 움직일 일이 있겠는가? 몇 달을 꿈쩍 않고 자리를 지키던 배들인데.”
“제 소굴로 돌아가는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모두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누렸던 짧은 평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난리가 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이 근처에는 사람이 몇 남지도 않았는데.”
“그러게나 말일세.”
“자, 자.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래서 그⋯⋯ 구파 분들이 장강에 와 계시는 것 아닌가? 저 악적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분들이 있는데 뭘 어찌 할 수 있겠는가?”
희망에 찬 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만일 항간에 떠도는 말처럼 구파일방이 그토록 대단한 곳이었다면, 아무리 강 너머의 일이라 해도 저런 악적들이 마구잡이로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기!”
“응?”
누군가의 목소리에 시선을 획 돌린 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파아아앗!
그들이 있는 강변 쪽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저 멀리서 오는 걸 발견했건만 몇 번 눈을 끔뻑이는 와중에 그들의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소, 소림?”
황색 승복 차림. 게다가 선두의 몇몇은 그 황색 옷 위에 붉은색 가사(袈裟)를 걸치고 있다. 천하에 수많은 절이 있지만, 저 황색 승복을 입는 곳은 오직 소림 한 곳뿐이다.
소림의 무승들은 굳은 얼굴로 순식간에 그들을 지나쳐 갔다. 그 뒤로는 커다란 도를 패용한 무리와 인상이 서늘한 검수들도 연이어 달려갔다.
질린 눈으로 달려가는 무인들을 보던 이 하나가 홀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무슨 큰일이 터지려나?”
장강 전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방장! 장일소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장일소가?”
“예! 이동 내내 마차 안에 칩거하던 놈이 마차 밖으로 나와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그 지시를 받은 소수가 본대를 떠났지만, 정확한 목적까지는 파악하기 어렵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법정이 손에 든 염주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패군.’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마차 안에서도 지시는 얼마든지 내릴 수 있단 점이다.
장일소가 굳이 마차 밖으로 직접 행차한 건, 법정에게 보내는 조소(嘲笑)임이 분명했다.
법정의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
지금 소림은 명백히 선공을 당했음에도 반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그저 먼저 길을 나선 장일소의 뒤로 악착같이 따라붙는 게 전부다.
그런 소림을 향해 지금 장일소가 묻고 있는 것이다.
장일소가 있는 곳. 그 강 너머까지 도달한다면 그때부터는 어쩔 거냐고.
명백히 이곳에 있는 자신을 노리고 강을 넘을 용기가 있느냐고. 불법 가득 실린 계도(戒刀)를 장일소의 목에 쑤셔 박아 그 죄를 단죄할 용기가 있느냐고 말이다.
‘무도하기 짝이 없는⋯⋯.’
법정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렀다.
다른 이들은 그저 사소하게 넘겨 버릴 일일지 모르지만, 법정에게는 장일소의 비웃음이 똑똑히 느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강 너머의 세 문파를 이끌고 있는 소림의 방장에게 보내는 비웃음이 말이다.
그가 대체 언제 이런 조롱과 비웃음을 받아 보았겠는가?
이 와중에 법정을 더욱 노하게 하는 건, 그럼에도 화답해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방장, 어찌하시겠습니까?”
법계가 넌지시 법정을 불렀다. 법정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짓거리에 일일이 대응할 것 없다.”
“예, 방장.”
“우선은 적의 움직임에 대처할 수 있도록 따라붙는 것이 우선이다. 대응은 할 수 있을 때 생각하면 된다. 아무리 좋은 대처법이 있다고 해도 늦어 버린다면 무의미해지지 않으냐.”
“예!”
“속도를 더 높여라!”
명을 내린 법정은 더욱 세게 땅을 박찼다.
법계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뒷모습이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방장⋯⋯.’
확실히 법정이 한 이야기는 정론이다. 그리고 장일소를 상대할 때는 그 정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장일소는 사람을 농락하는 귀계를 숨 쉬듯 쓰는 자. 그런 이의 사소한 행위에 일일이 반응하다가는 더 큰 것을 놓치게 될 위험이 크다.
하지만 법계의 뇌리에선 한 가지 의혹이 가시지 않았다.
‘지금 방장께서 정말 침착한 것인가?’
새삼스레 법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장강참변부터 지금까지, 소림은 수도 없이 사패련과 얽혀 왔다. 그리고 그만큼 그들의 수작에 치를 떨어 왔다. 저 장일소가 얼마나 위험한 자인지는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소림이 아닌 법정이 장일소와 직접적으로 수를 나눈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강참변이 벌어질 때 소림을 이끌었던 것은 법정이 아니라 법계였다. 매화도 사태가 터졌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상황에 소림이 뒤늦게 도착한 것뿐이었다.
이 말인즉, 지금껏 법정은 단 한 번도 장일소의 계략을 직접 맞상대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장일소의 악의 앞에 직접적 표적이 된 적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러하다면⋯⋯.
“서두르라 하지 않았느냐?”
“예, 예! 방장!”
법정의 재촉하는 목소리에 법계는 화들짝 놀라 생각을 끊었다. 뒤따르는 이들에게 손짓으로 지시하자 뒤에서 달리던 소림의 제자들이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다.
전체적인 속도가 높아진 것을 확인한 법정이 시린 눈으로 강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법계의 눈에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안함이 깃들고 있었다.
❀ ❀ ❀
“맹주님! 앞서간 이들과 거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으음.”
현종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법정.’
지금 가장 마음이 급한 건 분명 현종일 것이다. 하지만 소림을 위시하여 먼저 동쪽으로 향한 세 문파는 그런 현종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당군악이 나직이 말했다.
“⋯⋯과연 구파의 저력은 만만치 않군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요.”
현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 그대로다. 지금 구파가 예전의 위세를 잃은 건 결코 그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제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법정이 정말로 이번 기회를 통해 사패련과 제대로 전쟁을 벌일 결심을 했다면, 천우맹의 입장에서도 든든한 우군을 얻은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비록 모든 뜻을 함께할 수는 없는 한시적 우군이겠지만 말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속도를 높이시겠습니까?”
당군악이 물었지만 현종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눈빛이 침중했다.
구파일방의 정예들로만 이루어진 앞선 집단에 비해, 천우맹은 그 안에 너무도 많은 문파가 모여 있다. 마음은 한뜻일지 모르나, 이 이상 속도를 높인다면 저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는 어려울 수 있다.
결국 현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지금의 속도를 유지하십시다.”
“하지만, 맹주님. 그렇게 된다면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먼저 간 장일소보다 뒤처질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당군악은 의혹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 가장 마음이 급할 이는 맹주이자 화산의 전 장문인인 현종이다. 그건 천하의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늦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다니⋯⋯.
그때 현종이 차분히 말했다.
“가주님.”
“예?”
“해가 언제 지겠습니까?”
당군악의 얼굴이 잠깐 멍해졌다. 갑자기 저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물음인가.
현종이 말했다.
“수로채는 지금 가용한 선박들을 모조리 이끌고 동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예,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 건너에서는 사패련의 정예들이 동으로 향하고 있지요. 그러니 아마 사패련의 군사들은 본단을 지키는 이들과 장일소를 따르는 이들, 둘로 나뉘었을 것입니다.”
“그야 당연한⋯⋯.”
당군악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현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알아챈 것이다.
“서, 설마⋯⋯?”
“예. 속도를 적당히 유지하며 배들을 먼저 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지면⋯⋯.”
현종이 담담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맹을 이끌고 강을 넘을 것입니다.”
“매, 맹주님!”
당군악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우리가 강을 넘었다는 사실을 적들이 알게 된다면 방향을 돌려 우리부터 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장일소와 강 위의 수로채에게 합공을 당하게 됩니다.”
“그게 지금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당군악이 입을 다물었다.
“위험하니 함께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화산은 강을 넘을 겁니다.”
당군악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바짝 붙어 달리고 있던 화산 제자들의 두 눈에는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당군악의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현종이 말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붙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강 건너에서 장일소가 아이들을 해하는 걸 그저 구경이나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맹주님⋯⋯.”
“저는 이제야 이해합니다. 그 아이들이 옳다고 여기면서도 어째서 이 마음 안에 미혹이 가시지 않았는지. 왜 이 모든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졌었는지.”
“⋯⋯.”
“문파란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지요.”
현종을 바라보는 당군악의 표정은 흡사 어딘가에 홀린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게, 현종의 얼굴은 ‘도인’ 그 두 글자를 형상화하여 빚어 놓은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아이들과 운명을 함께하러 갈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던 것을 이제야 되돌리려는 것입니다.”
당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장강을 주시했다.
서산 너머로 붉게 걸린 노을이 장강을 붉디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름다웠을 광경이 지금은 폭풍전야처럼 불길했다.
“⋯⋯그러시다면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
“친구 역시 운명을 함께하는 이를 일컫는 말 아니겠습니까?”
현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청명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 아이가 만들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건 그저 내 착각인 것이냐?’
드러나지 않던 모든 것이 청명이 부재한 순간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없어도 화산을 단단히 지켜 줄 방벽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녀석아.’
현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네가 화산을 지키는 게 아니라, 화산이 너를 지키는 것이다.”
너무도 작아 들리지 않을 말을 중얼거린 현종이 단호하게 땅을 박차고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