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6화. 준비는 이제 다 마쳤단다. (1)
“대주. 수로채가 구강을 공격해 배를 모조리 불태운 뒤 물러났다고 합니다.”
본단에서 동쪽으로 이동 중인 호화로운 사두마차를 은밀하게 뒤쫓던 거지 중 하나가 그 보고에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배를?”
“그, 그렇답니다.”
“저놈들이⋯⋯. 정말 제대로 한번 해보려는 모양이군.”
예상은 하고 있었다.
개방은 현장에서 전해져 오는 정보를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아무리 대단한 두뇌를 가진 이가 정보를 분석한다고 해도, 현장에서만 느껴지는 분위기까지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현장의 감’에 익숙한 무취개(無臭丐)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저놈들의 움직임이 절대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고 말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흉흉한 기세가 이 먼 곳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해?”
“여, 여긴 강남이잖습니까? 정말 전쟁이라도 나면 우리 같은 건 순식간에 목이 잘려 나갈 텐데, 지금이라도 빨리 탈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하는 정말로 초조한 듯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취개의 얼굴 근육이 실룩였다.
“빌어먹을, 언제부터 거지새끼들이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치는 게 당연하게 되었느냐?”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러고도 네놈이 개방 흑오대(黑汚臺)의 일원이냐?”
신경질과 분노 섞인 질책이 쏟아지자 호들갑을 떨던 거지가 면목이 없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쯧.”
짧게 혀를 차며 못마땅하게 고개를 획 돌린 무취개는 태연히 이동하고 있는 사패련 본대 무리를 바라보았다.
‘달아난다고?’
달아나긴 어디로 달아난단 말인가? 이들의 종적을 놓치는 순간 강북도 더는 안전한 땅이 되지 못할 텐데.
단순히 강을 건넌다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 저 장일소가 움직인 이상, 천하 어느 곳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그러니 절대 저들의 종적을 놓쳐서는 안 된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저들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이 바로 ‘흑오대’의 임무이고, 동시에 흑오대의 대주인 그의 사명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무취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게다가 저들이 정말 우리가 추적하고 있는 걸 모를까?’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 모두를 손에 쥐고 농락하는 그 장일소가 추적이 붙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아마 무취개를 비롯한 수하들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장일소가 자신의 움직임을 숨길 생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여기서 달아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대주님! 놈들이 멈춰 섭니다!”
“몸을 낮춰!”
무취개가 살짝 들어 올린 손을 아래로 내리자 수하들이 땅에 납작 엎드리며 몸을 숨겼다. 솟아오른 갈대 사이로 잔뜩 긴장한 그들의 눈빛만 드러났다.
‘뭐지?’
몸을 낮춘 무취개가 두 눈에 내력을 밀어 넣었다.
놈들이 지금 멈출 이유가 없다. 딱히 무언가가 나타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무취개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무리의 중앙에 있는 마차로 향했다. 백마 네 마리가 끄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마차로 말이다.
지금껏 굳게 닫혀 있던 마차 문이 마침내 열리기 시작했다.
펄럭이는 붉은 장포가 보인 순간, 무취개는 저도 모르게 숨 쉬는 걸 잊었다.
‘장일소!’
사람이 개미처럼 보이는 거리임에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천하에 사람이 모래알처럼 많다고는 하나, 감히 저런 복장으로 다닐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일 테니까.
패군 장일소. 만인방의 방주이자, 사패련의 련주인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장일소가 밖으로 나오자 마차와 함께 이동하던 모두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무취개의 등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이는 정파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지 않은가.
천하 불문의 정점에 올라 있다는 소림의 방장도, 천하 도가의 북두라 칭해지는 무당의 장문도 누군가에게 저런 예를 받지는 못한다. 받아서도 안 된다.
저런 예를 받을 수 있는 이는 천하에 두 명, 천하의 주인인 황제와 강남의 제왕인 장일소뿐이다.
무취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리 강호인들이 속세와는 몇 발짝 떨어진 삶을 산다고는 하나, 어쨌든 평민에 불과한 이들이 감히 저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저건 황제에 대한 불충이자, 힘에 대한 맹목이었다. 정파를 자칭하는 이들에겐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취개는 저 광경에 가슴이 떨렸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죽어도 입 밖에 낼 수는 없겠지만, 장일소가 지금 보여 주는 모습은 그가 꿈속에서마저 바라고 또 바라던 모습이지 않은가?
“저놈이⋯⋯.”
“쉿!”
무취개는 무어라 말하려는 수하의 입을 막았다.
물론 장일소가 아니라 장일소의 할아비라 해도, 전문적으로 은신술을 익힌 그들의 존재를 이 거리에서 확실히 발견하진 못하겠지만 매사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뭘 하려는 거지?’
무취개는 긴장한 눈빛으로 사패련의 동태를 살폈다.
그때, 장일소가 손짓으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의 나긋한 손짓이 끝나기 무섭게 무릎 꿇고 있던 이들 중 일부가 쾌속하게 몸을 날려 어딘가로 달려갔다.
‘뭣⋯⋯?’
무취개가 눈을 부릅떴다.
만일 이동 중에 일부가 움직였다면, 무취개 역시 수하들을 나눠 움직이는 이들의 뒤를 밟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도 함부로 대응할 수가 없다.
“대, 대주⋯⋯.”
아무리 그들이 추적에 도가 텄다 해도, 저만한 무인들을 상대로 뒤늦게 따라붙는 건 불가능하다. 몸을 숨겨 가며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일소가 손짓할 때마다 한 무리씩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무취개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빌어먹을⋯⋯.”
그때, 지시를 마친 장일소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맥이 풀려 버린 무취개가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내려는 순간, 장일소가 문득 태연하게 그들이 있는 쪽을 바라봐 왔다.
쿵!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취개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더 깊게 처박았다. 땅에 파고들어서라도 그 눈을 피해야 한다는 듯이.
‘누, 눈치챘나?’
추적이 붙었다는 짐작 정도야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확실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고?
그럴 리 없다. 천하의 누구도 이 거리에서 그들의 종적을 잡아낼 수는 없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식은땀이 쏟아졌다. 그는 후욱후욱 거친 숨을 뱉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몸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마치 늑대의 시선을 피하려는 토끼처럼 한없이 땅에 파고들 뿐이었다.
짙은 흙내와 풀냄새, 축축하고 쾨쾨한 땀 냄새가 코로 연신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주, 놈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등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무취개는 퍼뜩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이 무슨 추태를 보이고 있었는지를 자각한 그는 손에 꽉 움켜쥐고 있던 풀을 놓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문이 굳게 닫힌 마차와 호위하는 무리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동하고 있었다.
무취개는 순간 말을 잃었다. 철저하게 농락당한 기분이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화조차 나지 않았다. 본디 화도 대등한 이한테나 낼 수 있는 거니까.
그는 개방 흑오대의 대주다.
강호의 어디에서도 무시당하지 않을 만한 위상을 지녔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뿐이었다.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식는 느낌에 전율하며 말이다.
“대주, 어떻게 합니까? 추적합니까?”
“⋯⋯추적?”
순간 바람이라도 빠지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버려 둬라. 본단에 보고만 한 뒤 본대를 뒤쫓는다.”
“하지만⋯⋯.”
“따라가면 뭘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무취개의 입에 자조가 어렸다.
“객기 부리지 말고, 저들이나 확실하게 뒤쫓아라.”
“예.”
무취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시선은 마차에 난 작고 네모난 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서 안을 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울, 그 작은 창에.
지금 장일소는 저 작은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 넓은 세상을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그는 그런 장일소의 시야를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눈으로는 보지 못해도, 걸음만은 따라갈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차를 쏘아보는 무취개의 눈빛에 얼핏 살기가 어렸다.
눈이 부시도록 흰 마차와, 사방으로 날아오르는 홍색 전서구들.
이 순간, 세상의 중심은 분명 저 작디작은 마차였다.
❀ ❀ ❀
탁.
마차 문이 단단히 닫혔다.
“가명이가 없으면 영 불편하다니까. 이런 사소한 지시마저도 내가 직접 내려야 하다니⋯⋯. 쯧쯧.”
태평하게 한탄한 장일소가 푹신한 침구에 비스듬히 누웠다. 나른한 몸짓에 귀찮은 기색이 가득했다.
다탁 위에 놓인 술병과 잔을 느리게 잡은 그는 잔을 채웠다.
마차가 적잖이 흔들림에도 투명한 액체는 안정적으로 길게 늘어지며 작은 잔에 차올랐다. 좁은 마차 안에 독한 주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탁.
병을 내려놓은 장일소는 비스듬하게 누운 채 술이 찰랑대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마차가 움직일 때마다 일렁이던 술은 이내 한 점 미동 없이 고요해졌다.
잔을 지켜보는 밝은색 눈동자에 음울한 기운이 어렸다. 그는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입 안에서부터 배 속까지 번져 나가는 주향을 음미한다. 그러고 나서야 장일소의 시선이 마차의 작고 네모난 창 쪽으로 향했다.
그는 술에 젖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어렵지 않지. 그래, 어렵지 않은 일이야.”
그가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이 작은 것쯤이야 상관없다.
주시하고 있던 이들을 이 작은 세상 안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으면, 작은 창으로도 세상 전체를 보는 셈이 아닌가!
하나, 또 하나.
그가 예의주시하던 모두가 이 작은 창 안으로 모여들고 있다.
권력을 탐하는 이도, 정을 끊지 못하는 이도, 맹목적으로 명을 따르는 이도, 그리고⋯⋯ 이상에 뒤덮여 신음하는 가여운 이도 말이다.
“흐음.”
귓가에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의 이목을 끌 만큼 화려한 북소리. 이건 거대한 무대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다.
“준비는⋯⋯ 이제 다 마쳤단다.”
마치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 듯 중얼거린 장일소가 천천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이 나지 않은 마차의 벽면 쪽이었다.
공허하리만치 투명한 눈빛은 그 벽 너머에 있을 남쪽 어딘가로 향했다. 증오하는 듯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바라고 또 바라다 못해 갈망하는 듯하기도 했다.
“그러니 어서 오렴, 화산검협. 주인공이 없으면 무대는 시작되지 않는 법이니까.”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의 미소는 붉게 물든 그믐의 달처럼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