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5화. 그렇게 만들어 줘야지. (5)
“매, 맹주님! 저기!”
“저도 보고 있습니다.”
현종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는 강변을 바라보았다.
“구파일방의 배들이 정박되어 있던 곳이군요.”
당군악의 말에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패련이겠지요?”
“그럴 것입니다.”
법정이 갑자기 미쳐서 제 배를 스스로 불태운 게 아닌 이상에야 이런 일을 벌일 이들은 사패련밖에 없지 않은가?
“제대로 허를 찔렸군요.”
당군악이 소매 안에 감춰진 손을 천천히 쥐었다 풀었다.
장일소의 가장 두려운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려 있을 때, 그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가장 취약한 곳을 찔러 댄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미끼로 써 가며 말이다.
“맹주님! 저기 수로채가 움직입니다.”
“⋯⋯.”
모두의 눈에 장강 위를 점거하고 있던 수로채의 선단이 방향을 트는 모습이 똑똑히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움직임은 급격한 게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미 계획한 것이겠지요.”
손끝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때,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맹소가 입을 열었다.
“패군이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저 배들을 불태우기 위해 시선을 끈 것이라 봐야 하겠습니까?”
“흠.”
당군악이 낮은 호흡을 내뱉는다.
장일소가 직접 움직인 덕에 강 너머의 방비가 허술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장일소가 강 건너에서 멀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마음이 적당히 풀리긴 했을 테니까.
심지어 돌이켜 보면 당군악 그 자신마저도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아 버린 면이 있었는데,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장일소라면.”
맹소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스스로를 미끼 삼아 시선을 돌리고, 그 시선이 벗어난 곳을 공격한다라⋯⋯.”
맹소는 사람을 보면 그와 비슷한 짐승을 떠올린다.
하지만 저 패군이라는 자만큼은 도무지 그에 걸맞은 짐승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여우보다 영악한데, 범보다 더 포악하다. 세상 어디에서 그런 짐승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중요한 건.”
그 순간, 침묵하던 현종이 입을 열었다.
“배가 불탔다는 사실이 아니라 장일소가 여전히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
“아이들이 오고 있는 곳으로 말입니다.”
당군악과 맹소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종을 바라본다.
다른 이들은 장일소의 한 수가 이 대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걱정하고 있건만, 현종의 시선은 오직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해 있다.
당군악이 뭔가 말을 꺼내려는데, 현종이 먼저 말을 이었다.
“이제 구파일방도 알았겠지요. 장일소의 움직임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바보가 아니라면 그럴 것입니다.”
당군악의 복잡한 심경이 담긴 시선이 강 너머로 향했다.
‘패군.’
부정하기 어려웠다.
장일소가 강 너머에 사패련의 본단을 만들고 그곳에 칩거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당군악의 뇌리에 마저 한가지 생각이 심어졌다는 것을.
- 어쩌면 장일소는 강남을 비해하는 것만으로 적당히 만족하는 것이 아닐까?
그건 어처구니없지만, 또한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강남이란 땅은 더없이 거대하다. 강호사를 통틀어도 그 거대한 땅을 사파가 완전히 장악한 경우는 절대 흔치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장일소는 이미 강호의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길 업적을 이뤄 냈다는 의미다.
그런데 굳이 더 많은 것을 먹어 치우겠다고 저 강대한 구파일방에 전쟁을 걸 이유가 있을까?
생각을 조금만 바꿔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장일소에게는 어떠한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정은 장일소의 공격에 대항할 때는 구심점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망을 바탕으로 강남을 공격할 힘을 모을 능력은 없는 이고, 장일소에게 가장 적대적인 천우맹은 단독으로 강남을 도모하기에는 그 전력이 부족한 곳이다.
‘다시 말하자면 장일소가 이 구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세상 그 누구도 그의 입지를 흔들 수 없다는 의미지.’
모든 것이 보장되어 있다. 모든 것이.
그 호화로운 본단에 칩거하는 것, 그 손쉬운 선택을 하는 것만으로도 장일소는 강남의 패자라는 지위를 아마 수십 년은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 강남의 황제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용의주도함을 감안하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의심했다.
혹시 이 상황이 저 장일소라는 굶주린 짐승에게 어울리지 않는 ‘안정’이라는 두 글자를 조금이라도 새겨 넣지 않았을까 하고.
그가 아무리 욕망에 미친 짐승이라고 한들, 저 모든 것을 내버리고 목숨까지 건 도박을 시도하는 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닐 테니까.
조금만 타협한다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저 타오르는 화염은 그 모든 생각을 말 그대로 비웃어 대고 있었다.
저 화염이 장일소의 입이 되어 말한다. 그가 강남 따위로 만족하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고.
설사 스스로가 저 화염에 휩쓸려 재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영원히 이 강북을 노릴 것이라고 말이다.
저 화염에 깃든 소름 돋는 악의를 느끼며 당군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보고 드립니다!”
그때, 장원으로 뛰쳐 들어온 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구파일방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강을 이동하는 수로채의 배들을 따라가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군악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 졌다.
이리된 이상 구파일방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
동으로 이동하고 있는 장일소와 저 수로채의 선단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우선은 따라가는 수밖에.
“저희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마음이 가장 급한 이는 누가 뭐라 해도 현종일 것이다.
그 마음을 짐작해 한 말이지만, 의외로 현종은 그 말에 딱히 대답하지 않은 채 굳은 눈으로 강 위의 배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맹주님?”
당군악이 재차 묻자 현종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
“예. 맹주님.”
“패군이 무엇을 노리는 것 같습니까?”
“⋯⋯예?”
무엇을 노리다니?
패군이 노리는 것은 이미 확실해지지 않았는가? 구파일방의 선단을 불태워 장강의 지배권을 완전하게 손에 넣은 다음⋯⋯.
“강북으로 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패군이 과연 그 하나만을 위해 이런 일을 벌였겠습니까?”
“⋯⋯,”
그 말에 당군악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확실히 이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금껏 장일소는 언제나 그들이 생각하던 것 이상을 노려 왔으니까.
“하지만⋯⋯. 이 일로 장일소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해 봐야⋯⋯.”
구파일방. 천우맹. 사패련.
그 네 세력의 정예가 한곳에 모이게 된다.
‘아, 아니.’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들의 예상이 맞다면 강남에서 북상하고 있는 청명 일행들 역시 그곳에서 조우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하자면 당금 천하의 운명을 주도하는 모든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는 의미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당군악의 등골이 절로 서늘해졌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패군이라면 반드시 그 상황으로 얻으려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하지만 도대체⋯⋯.
“서둘러야겠습니다.”
“⋯⋯예. 맹주님.”
구파일방이 그들의 이동을 보여 준 것은 그들에게도 동쪽으로 갈 길을 열어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과도 같다.
그렇다면 우선은 동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어떤 일이 벌어지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대응할 수 없을 테니까.
“일각 내에 출진하겠습니다. 준비를.”
“예!”
당군악이 서둘러 뛰어가자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청명아.’
그의 뇌리에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청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항상 웃음으로 그 속내를 감추던 청명의 얼굴이 말이다.
‘너는 혹시 이 상황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게냐?’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 것이라 믿는다.
이 강호라는 거대한 반상을 두고, 패군의 반대편에 앉을 수 있는 이는 오직 청명뿐일 테니까.
현종은 그러기를⋯⋯ 반드시 그러기를 빌었다.
❀ ❀ ❀
파아아앗.
바닥을 박찬 백천이 굳은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바짝 선 기감이 사방을 훑었지만, 딱히 적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얼마 전 그들은 서른에 가까운 사파를 공격해 그 목숨을 끊었다. 피해갈 수 있었음에도 굳이 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경계가 강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서른에 가까운 이들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 있나?’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사패련에 썩어나는 것이 무인이라지만, 어떤 곳에서도 서른은 적은 수가 아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적이 내부를 헤집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럼 상식적으로 이런 일은 벌어질 수가 없는데⋯⋯.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그 순간 백천과 청명의 눈이 서로 마주친다.
백천이 격하게 고개를 돌려 그런 청명의 눈을 외면하려 했지만⋯⋯.
“허어어어어.”
“⋯⋯.”
“거참 이상하네에에에? 서른이나 때려잡았는데, 왜 저놈들이 발작을 안 하지? 분명 그래야 하는데에에에?”
“⋯⋯.”
“애들이 눈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아닐 텐데에에? 안 그래 녹림왕?”
“하하. 왜 그러십니까?”
임소병이 히죽거리며 그 말을 받았다.
“도장께서 그리 말해 버리시면, 괜한 놈들 건드렸다가 우리 다 뒈진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발악하던 사람이 굉장히, 예? 괴애애앵장히 뻘쭘해지지 않습니까? 군자란 모름지기 타인의 곤란함을 물고 늘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대범하게 넘어가 줄 줄도 알아야지요.”
“역시나 그렇겠지?”
“아암. 그럼요. 어디 장문대리께서 악의가 있으셔서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셨겠습니까? 다 좋은 마음에 그리한 것이지요. 성현께서도 악의는 탓하더라도 우둔함은 탓하지 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현명한 도장께서 이해하셔야지요.”
“크으. 그렇게까지 말하면 뭐.”
“그럼요. 그럼요.”
검을 잡은 백천의 손이 푸들푸들 떨렸다.
귀신은 뭐 하나? 저 새끼들 안 잡아가고.
한 놈만 있어도 속이 터졌는데, 비슷한 놈 둘을 모아 놓으니 배 쏙에서 매화가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쯧쯧. 그러니 그렇게나 말을 했는데. 도사가 사람 말을 이리 못 믿어서야.”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진 탓이지 누굴 탓하겠습니까?”
“그런데 청명아.”
백천이 발작하기 직전까지 간 순간, 윤종이 자연스레 입을 열어 화제를 돌렸다.
“그럼 정말 구파일방이 움직인 거냐?”
“그래.”
“어째서?”
“그건 나도 모르지.”
“⋯⋯.”
윤종이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라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오고 있는 건 아는데 이유는 모른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 눈빛을 본 청명이 피식 웃는다.
“내가 아는 건 대왕 대머리가 움직이게 될 이유가 아니야.”
“그럼?”
“장일소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파일방을 끌어들일 거라는 사실이지.”
“⋯⋯.”
청명이 입가를 뒤틀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상황. 이게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패는 모두 쥐었다. 남은 건 싸우는 것뿐.’
청명의 두 눈에 새파란 살기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