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4화. 그렇게 만들어 줘야지. (4)
“후읍!”
물 밖으로 솟구치듯 튀어나온 장강교어가 게걸스레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을 손으로 대충 훔친 그는 물에 몸을 띄운 채로 저 멀리서 거세게 번지는 불을 바라보았다.
“잘도 타는군.”
비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저만한 화염이면 아무리 튼튼하게 건조된 선박이라 해도 제 기능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그들이 몰고 갔던 쾌속선들도 모조리 불타 버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수로채에는 아직 배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과연 련주님이라 해야 하나.”
설마 저들이 저리 허술하게 배를 방비할 거란 생각은 장강교어도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련주의 움직임이 저 배를 지키던 이들마저 다른 곳으로 분산시킨 거겠지.
어쨌거나 확실한 사실은, 장일소의 수가 완벽하게 통했다는 것.
“모두 복귀했나?”
“이 할 정도가 아직⋯⋯.”
장강교어가 슬쩍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장강 물고기들이 포식하는 날이로군.”
“⋯⋯.”
“임무는 완수했으니 됐다. 돌아간다.”
“예!”
그는 다시 반대편 강가로 자맥질을 시작했다. 수공을 익힌 이들의 몸은 마치 물에서 나고 자란 물고기처럼 장강을 쭉쭉 가르고 나아갔다.
여전히 불타고 있는 강변을 뒤로하고.
❀ ❀ ❀
타오르는 화염 그림자로 법정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시커먼 연기를 줄기줄기 토해 내며 불타는 배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험악할 만큼 굳어 있었다.
“이, 이⋯⋯ 더러운 놈들이!”
종리형이 노기를 참지 못하고 억눌린 목소리로 욕설을 뱉었다. 이 배를 방비하고 있던 건 다름 아닌 그의 제자들이다. 법정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불타는 배였지만, 종리형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배에서 옮겨지고 있는 제자들의 시신이었다.
“방장!”
종리형이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저 간악한 놈들을 천참만륙 내어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합니다!”
“진정하십시오, 종리 장문인.”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팽엽이 만류해 보았지만 괜히 종리형의 분노만 뒤집어썼다. 늘 무뚝뚝하고 냉정하던 팽엽조차 움찔할 만한 기세였다.
“이⋯⋯.”
으드드득.
종리형의 입에서 이 갈아붙이는 소리가 울렸다.
숯덩이가 되어 버린 제자들의 시신은 이 순간에도 연이어 배 밖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많은 제자를 잃은 것은 아니나, 어쨌든 자식처럼 키워 낸 제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삽시간에 숯덩이가 되었으니 종리형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어찌 이리 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가 분노를 터트리자 듣고 있던 팽엽의 입에서 헛웃음이 짧게 새어 나왔다.
무도하다? 뭐가 무도하단 말인가? 사람을 죽인 것?
애초에 사패련과 구파일방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한쪽에서 본격적으로 선전포고한 것은 아니라지만, 천하의 모든 이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사패련과 구파일방마저도 말이다.
전쟁 중의 기습을 과연 무도한 짓이라 할 수 있는가?
“방장! 저 수로채 놈들을 그냥 두실 겁니까!”
종리형을 다시 한번 악을 쓰자 법정이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하겠다는 것입니까?”
“무슨 답답한 소리를⋯⋯!”
“타고 나갈 배를 모조리 잃었는데, 무슨 수로 저들을 치자고 하시는 겁니까? 자맥질이라도 하실 요량입니까? 수공을 익힌 수로채를 상대로?”
그 말에 종리형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분노에 순간 이성을 잃긴 했으나, 법정의 말을 듣자마자 기민하게 현실 감각을 다시 찾은 것이다.
본디 이곳에 있던 배는 사패련의 도하를 막기 위해서 그들이 필사적으로 끌어모은 것들이었다. 그걸 모조리 잃은 이상 이곳에 모인 이들은 장강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놈들이 장강을 마음대로 이동하는 걸 저지할 만한 최소한의 방편마저 사라졌지요.”
팽엽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명백한 실책입니다.”
가만 듣고 있던 법정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배를 조금 더 단단히 지켰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 능력이 부족했다는 소리입니까?”
팽엽이 지나가듯 흘린 말에, 종리형이 순간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그를 쏘아보았다. 한껏 예민해진 상황에서 흘려듣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럴 만했다.
이번에는 팽엽도 그저 물러나진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그리되지 않았습니까?”
“말조심하십시오! 애초에 이 많은 배를 그 인원으로 지키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였습니까?”
종리형은 숫제 살기까지 뿜으며 팽엽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인원이 평소만큼만 있었어도 저딴 수적 놈들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데 배를 지키던 아이들을 절반 넘게 갑자기 장원으로 소집하지 않았습니까!”
“상대는 고작 수적이었는데 그 인원으로 상대할 수 있었어야지요.”
“말 다 하셨습니까!”
“⋯⋯그만하십시다.”
법정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장일소의 움직임에 놀라 사방에서 제 일을 하던 이들을 모조리 장원으로 끌어모아 대기하게끔 명했던 건 다름 아닌 법정이다.
하지만 대체 어떤 이가 그리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상대가 저 장일소인데.
‘완전히 놀아났구나.’
장일소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법정이 놀라서 병력을 소집할 것임을. 그 덕분에 상대적으로 배의 방비는 허술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천 리 밖에서도 이곳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손바닥 위에 올라간 것은 이곳의 상황이 아니라 법정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서로를 탓해 무엇 하겠습니까? 팽 가주께서도 그만하십시오. 제자를 잃은 분께 할 말이 아닌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팽 가주가 사과를 하고 나니 또다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잃은 채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은 선박을 바라보았다. 각 문파의 제자들이 연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기름까지 끼얹은 터라 쉽질 않은 모양이었다.
과연 저 불이 모두 꺼졌을 때, 쓸 수 있는 배가 몇 척이나 남을 것인가?
“이제⋯⋯.”
종리형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노기가 한차례 휘몰아치고 나니 탈력감이 온 모양이었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그 말에는 팽엽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저들이 배를 불태운 기세를 몰고 이곳까지 공격해 들어왔다면 상황이 더 간명했을 것이다. 맞서 싸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저들은 배만 불태우고 그대로 물러갔다.
얻어맞기는 제대로 얻어맞았는데 싸워 주질 않으니 그저 멍하니 맞은 뺨을 쥐고 강 건너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팽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뭘 어쩌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배를 다시 구해야지요.”
“장강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배는 다 끌어모았잖습니까?”
“작은 고깃배라도 끌고 와서 임시방편을 세우고, 새 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쉽지, 그게 어디 하루 이틀 만에 될 일입니까?”
“⋯⋯그럼 손 놓고 구경만 하자는 것입니까?”
잠잠해졌던 게 언제냐는 듯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날 선 말이 오갔다. 법정의 입에선 그저 깊은 탄식이 쏟아졌다.
어찌해야 하냐고?
아무리 법정이라 해도 이런 상황 앞에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팽엽의 말이 옳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지금이라도 빨리 다시 배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저 수로채 배들이 장강을 제 마음대로 누비지 못할⋯⋯.
“바, 방장!”
생각을 채 다 잇기도 전에 종리형이 외쳤다. 법정은 살짝 밀려드는 화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예, 우선은 팽 가주님의 말대로⋯⋯.”
“그, 그게 아닙니다! 방장, 저기를 보십시오! 저기!”
그 말에 법정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저기?’
종리형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불타는 선박들뿐이었다. 이미 다 확인한 꼴인데 뭘 또 보라는 말인가.
“몇 척 살려 봐야⋯⋯.”
“그게 아닙니다! 불 말고 저 뒤를 보시란 말입니다!”
“뒤?”
그제야 법정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날름거리는 불길 사이로 얼핏얼핏 그 뒤의 광경이 보였고, 순간 법정의 눈이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휘둥그레졌다.
“수, 수로채! 놈들이 움직입니다, 놈들이!”
법정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한기가 흘러내렸다.
매화도를 중심으로 장강의 중앙을 오래도록 점거하고 있던 수로채의 거대한 선단들이 일제히 선수를 돌리고 있었다.
그 방향은⋯⋯.
‘동쪽.’
그렇다. 장일소가 향한 곳이다.
“저, 저놈들이 갑자기 왜⋯⋯?”
종리형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팽엽이 서늘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제 움직일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건 무슨 말입니까?”
“수로채가 우리 턱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 역시 놈들의 턱 끝에 비수를 겨누고 있었던 겁니다. 저 수로채의 선단들이 물러나면 우리가 강을 넘어 사패련의 본단으로 진격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예?”
“하지만 이제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도하할 배가 필요하겠지요. 하남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로 저들을 옮겨 줄 배가.”
종리형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아, 아니. 우리가 배를 잃었지, 손발이 잘린 건 아니잖습니까? 수로채가 없으면 이런 강을 헤엄쳐 건너는 게 그리 힘든 것도 아니고⋯⋯.”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사패련의 본단⋯⋯.”
종리형이 말을 하다 말고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도 이제 팽엽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강 건너에는 사패련의 본단이 있다. 하지만 그 사패련의 본단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본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껏해야 얼마 전에 지어 올린 건물 몇 채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사패련의 본단은 그 장일소가 거하고 있기에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악적들이 모조리 빠져나가고 양민들만 남은 강남으로 향해서 본단을 불태워 본들 대체 뭘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패련은 다르다. 그들은 하남을 헤집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것들을 얻어 낼 수 있다.
만일 여기서 이들이 헤엄쳐 강을 건너고 사패련의 본단을 불태우면, 오히려 장일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북으로 넘어와 하남으로 진격할 것이다.
“이, 이런⋯⋯.”
종리형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럴 거면 애초에 저 배와 같이 갔으면 될 일을⋯⋯.”
“그럼 우리 배를 불태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 말은⋯⋯ 장일소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 준 게 다 이 모든 걸 내다보았기 때문이란 말입니까?”
팽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답이 긍정을 의미한다는 건 삼척동자라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와중에도 수로채의 배들은 꾸준하게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 방장. 어찌⋯⋯.”
“배를⋯⋯.”
법정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이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불을 끄고 있는 이들을 불러들이십시오.”
“예?”
법정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스쳤다.
“어차피 이리될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모으십시오. 놈들을 따라 안휘로 가야겠습니다.”
“⋯⋯.”
“이 소식이 천우맹에도 전해지도록 말을 흘리십시오.”
“바, 방장?”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종리형이 흠칫했다.
“결국은 악적을 제거하지 않고서 평화는 요원한 법.”
“⋯⋯.”
“우리가 적들에게 당했습니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장일소 역시 하나는 알아야 할 겁니다.”
온화하고 현명한 노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법정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싸늘하기만 했다.
“제아무리 계략을 부려 봐야 힘이 부족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 저 강을 넘는 순간이 장일소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제가 그리 만들어 줄 테니.”
그의 염주가 손아귀에서 산산조각 나 파스스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