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2화. 그렇게 만들어 줘야지. (2)
고급스럽기 이를 데 없는 마차 안.
나른한 얼굴로 누워 흔들림을 만끽하던 장일소가 벽에 난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람 머리 하나 겨우 내밀 수 있을 만한 작은 창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도 좁았다. 작은 풍경만 봐서는 지금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어디 즈음에 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갑갑하지 않았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이 어떤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지 머릿속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게다가 그 역시 궁금했다. 그 파문이 종내엔 얼마나 커다란 파랑으로 화하게 될지 말이다.
“쿡쿡쿡.”
그는 즐겁다는 듯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련주님.”
그때 마차 밖에서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장일소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듣고 있다.”
“강북의 상황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장일소의 기다란 속눈썹이 희미하게 움찔했다.
“계속해 보렴.”
“구파일방과 천우맹 양쪽 모두 상황을 파악했는지 부산하게 움직이고는 있지만, 아직 저희를 따라 이동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흐음⋯⋯.”
“그나마 천우맹 쪽은 출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구파일방 쪽은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이대로 눌러앉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장일소가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가명이가 없는 게 이런 데서 티가 나는구나.”
“⋯⋯송구합니다.”
“눌러앉는 게 아니란다. 그저 느릴 뿐이지. 원래 거물입네 하는 것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실수를 겁내서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우물대기 마련.”
특히나 법정이라면 그럴 테다.
법정 그 늙은이에 대한 파악은 이미 남궁세가 사태 때 끝냈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세력이 티끌만 한 손해도 입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책임이 제게 돌아오는 걸 끔찍하게 경계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이가 아직 모든 게 모호한 이런 상황에 섣불리 움직일 리 없다. 조금 피해를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상황이 더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큰 손해를 입을지언정 그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은 줄어들 테니까.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이는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체면과 명분을 논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성이고, 정파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이들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해 온 짓이다.
오히려 장일소가 수를 내놓을 때마다 귀신같이 대처해 오던 화산과 천우맹이 정파답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아, 아닙니다.”
“흐음?”
말끝을 흐리는 소리에 오히려 장일소의 눈에 흥미가 생겨났다. 딱히 더 들려올 새로운 소식이랄 게 없을 텐데?
“할 말이 더 있니?”
“그, 그게, 사소하다면 사소한 소식이라⋯⋯ 련주님께 보고까지 드려야 할지는⋯⋯.”
“편히 말해 보려무나.”
“예! 그⋯⋯ 남부에서 서른 정도 되는 이들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서른?”
“예. 실종된 이들이 겨우 일류에 접어든 수준이라 딱히 중요한 소식은 아닙니다만⋯⋯ 그게, 원인을 찾기가 어려워서⋯⋯.”
장일소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위치는?”
“무주(抚州) 근방입니다. 남쪽이라고.”
“무주?”
“예! 북상하고 있는 천우맹 놈들이 저지른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실종이 벌어진 곳이 인적이 영 없는 곳은 아니고, 저희가 예측하던 놈들의 방향과도 거리가 좀 되는 곳이라 놈들이 굳이 모습을 드러내고 전투를 치를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다른 원인이 있는 게 아닐지요.”
“쿡쿡쿡쿡.”
가만 듣고 있던 장일소가 소리 내어 웃었다. 평소처럼 사람을 소름 돋게 만드는 요사스러운 웃음이 아니라, 너무 웃겨서 참지 못하고 흘리는 그런 웃음이었다.
“하하하핫. 하여간!”
결국 유쾌하다는 듯 웃어젖힌 그가 긴 손가락으로 얼굴을 쓸었다. 법정의 대처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싹 가셨다는 듯 말이다.
“정말이지, 성격 나쁜 아이라니까.”
“조사대를 보내야 할지⋯⋯.”
“내버려 두렴.”
나직이 웃은 장일소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내게 보내는 초대장 같은 거란다.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이해하기 어려운 그 말에, 마차 밖에선 이렇다 할 대답 대신 침묵만이 돌아왔다.
장일소는 구태여 본인이 파악한 것들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굳이 말해 봐야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테니 입만 아플 것이다.
그의 귓가에는 들렸다.
‘나는 여기에 있다. 죽이러 오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말이다.
“하하핫.”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장일소가 다시 한번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남자가 유혹하는 데 넘어가는 취미는 전혀 없는데 말이지.”
어쨌거나 이번에 만인방은 천우맹 놈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물론 그 손해는 강남으로 침투한 놈들을 잡아 내는 것으로 모조리 보상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는 역시 계산이 맞지 않지.”
사패련이 이득을 얻고 천우맹이 큰 손해를 본다 해도, 그래서야 구파일방의 어부지리를 막을 수가 없다. 사패련의 입장에선 손해를 안 본다 해도 맛이 나쁜 걸 어찌할 수 없단 의미다.
그리고 그건 화산검협, 즉 천우맹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구파일방을 끌어들이려 하겠지. 저 화산검협의 입장에서 구파일방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미끼는 장일소, 그리고⋯⋯.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미끼는 자신이라 이건가? 쯧쯧쯧. 자의식이 너무 강하잖니.”
장일소가 웃으며 창밖을 지그시 내다보았다.
이럴 때가 재미있다.
화산검협은 그를 끌어내 구파일방을 움직이려 하고, 그는 이미 화산검협의 생각처럼 움직이고 있다. 이 일에 대해 서로 대화 한번 나눈 적 없지만,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뻔한 수를 둬도 제대로 반응조차 못 하는 놈들을 상대하다가 제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어 대려는 놈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이미 그러고 있단다.”
장일소의 입장에서도 저 구파일방이 강 건너 불구경하는 걸 지켜볼 이유가 없다. 불꽃이란 무릇 장작이 많을수록 더 화려하게 타오르는 법이니까.
긴 손가락이 흰 뺨을 톡톡 건드렸다.
“하지만 화산검협⋯⋯.”
피처럼 붉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조심해야지. 그 불꽃이 너를 집어삼킬 수도 있으니까.”
한껏 고개를 젖힌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로채에 전하렴. 움직이라고.”
“예, 련주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이 미적거린다면, 강제로라도 움직이게 해 줘야지.”
장일소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보고드립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가 체통 따윈 내던진 채 목소리를 높였다.
“패군을 위시한 사패련의 군세가 황산에 도달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러자 법정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벌써 황산까지?”
“예! 개방이 그리 전해왔습니다.”
“⋯⋯알겠다.”
“예.”
열렸던 문이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 법정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말없이 얼굴만 굳히고 있던 공동 장문인 종리형이 입을 열었다.
“황산이라면, 북상했을 때 바로 합비에 도달하는 위치가 아닙니까?”
“⋯⋯예, 그렇지요.”
“어, 어찌 이런⋯⋯.”
종리형이 황망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다 물었다.
“그럼 저희 역시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방장?”
법정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어찌⋯⋯.’
종리형은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만 두고 다급함을 느끼지만, 지금 법정의 속을 들끓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남궁이 천우맹에 붙은 게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원래라면 결코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장강의 하류를 넘어섰을 때 저들이 밟아야 할 땅은 안휘다. 원래라면 그 남궁세가가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는 곳.
만일 오대세가의 수장으로 불리던 남궁이 제힘을 보존하고 있었다면, 제아무리 사패련이라 해도 쉽사리 안휘를 침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패련이 강대하다 해도 남궁이 잠시만 그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면 그사이에 무당과 소림이 지원을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견고하던 성벽이 지금은 허물어져 버렸다. 남궁세가의 부재와 무당의 봉문으로 인해서 말이다.
무당이야 그렇다 쳐도, 남궁세가가 천우맹에게 붙은 것이 너무도 치명적이다. 그들이 구강으로 옮겨 가지 않고 안휘를 지켜 주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남궁황의 무리수가 결국 이런 결과를 낳는구나.’
법정은 답답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때, 팽가의 가주 팽엽이 말했다.
“종리 장문인의 말대로, 우선은 대응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놈들이 도하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어질 것입니다.”
법정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패군 장일소.’
세상에 수많은 이가 있다지만, 이토록 사람을 아프게 농락할 수 있는 이가 그 말고 또 있을까?
“천우맹은 어찌하고 있소?”
“패군을 따라 동으로 움직일 생각인 모양입니다만, 아직 출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답지 않게 늑장을 부리는구려.”
법정의 목소리에 언짢은 기색이 묻어났다. 종리형이 그 눈치를 슬쩍 살폈다.
“듣자 하니 지금 천우맹에 화산검협이 없다고 하던데,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법정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깨물었다.
실로 대책 없는 망둥이가 아닌가. 있을 때는 존재하는 걸로 그리 속을 썩이더니, 막상 없어지니 그건 그거 나름대로 골치가 아프다.
화산검협이 주도권을 쥔 천우맹이야 어찌 행동할지를 예측해 볼 수라도 있다. 그런데 화산검협이 부재한 지금은 현종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것이고, 그런 천우맹은 천하의 법정이라 해도 그 행로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법정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다.”
“방장!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저들이 정말로 도하라도 하게 된다면⋯⋯.”
“알고 있소이다.”
양민들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을 테고, 안휘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질 것이다.
“소승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선은 천우맹이 움직이는 걸 보고 움직여도 늦지 않습니다.”
종리형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법정이 말이 틀리지 않을지 모른다. 상대가 장일소가 아니라면 말이다.
장일소의 의도가 확실해지는 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뒤라는 걸 왜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그토록 겪었음에도!
‘신중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차마 법정의 면전에 대고는 할 수 없는 말을 입 안으로 곱씹으며 종리형은 애꿎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바, 방장!”
쾅!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안으로 누군가 뛰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뭔가 벌어졌음을 직감한 법정이 눈을 부릅떴다.
“저, 적들이 강을⋯⋯!”
“뭣이라?”
그가 황급히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황산에 있던 장일소가 강을 넘는다고? 그게 무슨 소리더냐?”
“그, 그게 아니옵고, 수로채! 수로채입니다!”
“뭐⋯⋯ 뭐라?”
소식을 전하기 위해 뛰어든 이의 얼굴에선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수로채의 선단이 지금 이곳을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법정의 주름진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