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1화. 그렇게 만들어 줘야지. (1)
“끄응.”
“⋯⋯.”
“끄으으응.”
“⋯⋯.”
“끄으으으으응.”
“아, 거참!”
결국 인내가 바닥난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려 임소병에게 소리쳤다.
“할 말 있으면 하시든가!”
“진짜 해도 됩니까?”
“⋯⋯아니, 하지 마십시오.”
“내가 속이 터져서 그러는데!”
“⋯⋯하지 마시라니까.”
백천이 의미 없는 만류를 다시 시도해 봤지만, 임소병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연락이 된다니까요? 마을로 가는 놈들을 그냥 되돌려 보내자니까!”
“아니⋯⋯.”
“장문대리는 속도 없습니까? 그렇게 쫓겨나고도 그 사람들을 강북으로 모셔 가고 싶습니까?”
“⋯⋯.”
“곡식? 곡식? 말이야 바른말로, 저들이 강북에 갈 때 그 곡식을 등에 이고 지고 가겠습니까? 그거 어차피 다 버려두고 가야 하는 건데, 그거 하나 못 내주는 인간들을 뭐가 예쁘다고 굳이 강북까지 고이 모셔 갑니까?”
“⋯⋯.”
“말만 하시라니까 그러네! 지금 형가촌으로 가고 있는 것들 바로 되돌릴 수 있으니까!”
내내 침묵하던 백천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사람의 도리라는 게⋯⋯.”
“도리이이이이?”
결국 속이 뒤집힌 임소병이 눈까지 까뒤집었다. 백천은 문득 녹림왕이 청명이 놈을 참 많이도 닮아 가는구나 생각했다. 닮아도 꼭 저런 것만 닮는다는 생각도 함께.
“도리요? 도리! 말 한번 잘하셨습니다! 그놈의 도리 우리가 어겼습니까?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건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놈들 아닙니까?”
이 말엔 백천도 할 말이 없었다. 여전히 구해야 한단 생각엔 변함이 없으나, 아무래도 논리로는 녹림왕을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도인들이란 논리로 어쩌지 못하는 부분을 커다란 뜻이니, 선의니 하는 말로 대충 덮어 포장하는 족속이 아니던가?
“도장!”
“크흠.”
“도자아아앙!”
재촉을 해도 백천이 요지부동이니 임소병은 아예 두 눈에 불을 켰다.
“아니, 살다 살다 뭔 이런 호구 새끼들⋯⋯.”
퍼억!
“꺄아아악!”
달리던 임소병이 앞으로 쏘아지듯 엎어졌다. 그러자 뒤따라 달리던 남궁도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그를 주워서 챙겼다.
“거, 진짜 더럽게 쫑알대네.”
임소병을 걷어차 버린 청명이 애꿎은 손을 탁탁 털었다.
“끄으으으.”
임소병은 차인 뒤통수를 부여잡고 한참 끙끙거리다 눈을 획 부라렸다.
“왜 때리십니까! 제가 뭐 틀린⋯⋯.”
뽀옥!
“아아아아악!”
“이 사파 새끼가 미쳤나? 어디서 눈을 그렇게 떠? 확 찔러 버릴까!”
“⋯⋯청명아. 그건 찌르기 전에 말해야지.”
“아. 그렇지, 참.”
백천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지가 아니고, 인마⋯⋯.
청명은 눈을 부여잡고 끙끙대는 임소병을 보며 일갈했다.
“하여튼 산적 새끼 아니랄까 봐!”
“이게 내가 산적이라서 하는 말입니까?”
임소병이 생리적인 눈물을 글썽거리며 사방을 획획 둘러보았다. 찔린 눈에 뻘건 핏발이 서 있었다.
“사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도 모르는 것들을 뭐 하러 구해 줍니까? 그랬다가 강북에서 다시 마주치기라도 해 보십시오. 서로 어색하게 허허 웃기밖에 더 하겠냐고? 그 꼴을 꼭 봐야겠냐고요!”
“시끄러워!”
청명이 다시 한번 임소병의 뒤통수를 딱 소리 나게 때렸다.
“그렇게 기분 내키는 대로 저질러 대니까 네가 산적인 거야!”
“⋯⋯.”
“뭐?”
“그게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적어도 도장이 하실 말씀은 아니잖습니까?”
“뭐, 인마?”
주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사람들만 가득했다.
“맞지.”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지.”
“도사보다 산적이 더 옳은 소리를 할 때도 있구나.”
“근데 이 새끼들이?”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다들 찔끔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그거 며칠 쉬었다고 살아나서 저러나⋯⋯.’
‘부상 입었을 때가 안쓰러워도 편하긴 했는데.’
‘쟤는 잘 때가 제일 착해.’
임소병은 퀭한 눈가를 부채 끄트머리로 꾹꾹 누르며 물었다.
“아니, 그럼 도장은 속이 터지지 않는다는 겁니까?”
“속?”
“예!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진짜 내 속을 말해 줘?”
“⋯⋯예? 아, 예.”
“성질 같아서는 양민이고 나발이고 이것들 껍데기를 콱⋯⋯.”
“에헤이이이! 청명아!”
“입, 입! 어허! 그 입!”
“저 새끼 입 막아!”
차마 도사가 해선 안 될 소리가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자 백천과 윤종이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가까이에 서 있는 바람에 막힌 소리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던 혜연은 순간 낯빛이 새파래져선 연신 불호를 외었다. 머리 안으로 마구니가 기어들어 왔으니 어떻게든 몰아내야 했다.
“더 말해 줘? 한참 더 말할 수 있는데.”
“⋯⋯도사 양반, 참 화끈하시네⋯⋯.”
산적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임소병이 질린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청명이 콧김을 킁 내뿜더니 말했다.
“그래도 뭘 어쩌겠어? 어쨌든 그중에서 우릴 돕던 사람도 있잖아.”
“그 사람만 구하는 방법도 있었잖습니까?”
“이 산적 새끼, 이거⋯⋯ 산이 아니라 지옥에서 기어 올라왔나? 같이 살던 마을 사람들 놔두고 혼자 강북으로 가라고 하면 그 양반이 넙죽 가겠냐?”
임소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청명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아서였다.
천우맹에게 곡식 자루를 내민 이는 최소한의 성의를 표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구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을 위해 다른 이들까지 구해야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다른 놈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을 지껄이면 안 되지! 그렇게 따지면 나는 산적 놈인 네놈 모가지를 제일 먼저 따 버렸을 테니까.”
모골이 송연해진 임소병이 어색하게 웃으며 저도 모르게 제 창백한 목을 주물렀다.
“헤, 헤헤⋯⋯. 저는 개과천선하지 않았습니까?”
청명이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말이.”
“예?”
“사람 죽이고 다니던 산적 놈도 두들겨 패면 개과천선해서 멀쩡한 인간이 되는데, 그 사람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뒈지든 말든 내버려 둘까.”
“⋯⋯아니, 잘못은⋯⋯.”
“잘못은 누구나 해.”
청명의 시선이 잠깐 먼 하늘로 향했다.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잘못은 누구나 하지. 때로는 용서받기조차 어려운, 그런 잘못을.”
임소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말을 꺼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이해해 주는 이가 있어서 사람은 바뀔 수 있는 거야.”
몇 사람이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이려는 그때였다.
“그렇지, 동룡아?”
“내 그 말 할 줄 알았다, 이 새끼야!”
발끈한 백천이 주먹을 휘둘렀다. 청명은 능청스럽게 피해 내고는 낄낄 웃었다.
“뭐 그게 어디 사숙만 두고 하는 말인가? 남궁도 마찬가지지, 뭐.”
“⋯⋯옛일은 좀 묻어 주십쇼. 사실 과거에 대해 논해서 떳떳할 사람이 여기 몇이나 있습니까?”
“크흠.”
“에헤헤헴!”
몇몇 사람이 찔린다는 듯 헛기침을 해 댔다.
화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당패는 청명의 배를 칼로 쑤신 적 있는 사람이고, 남궁도위는 그의 앞에서 허세를 떨다가 고간을 얻어맞아 게거품을 물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혜연이 비무대회 결승에서 청명에게 내뱉었던 말들은 아직도 종종 회자될 정도가 아니던가?
그러니 남궁도위의 저 말에 헛기침하며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별로 안 믿어. 물론 나야 처음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지만!”
“⋯⋯지랄을 합니다.”
“너는 싹이 노란 정도가 아니라 검게 죽어 있었으니까⋯⋯.”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원망하게 된다 해도 일단 구해 놓고 원망하면 돼.”
“⋯⋯.”
“태상 장문이 여기 계셨다면 분명 그리 말씀하셨을 거야.”
그 말에 화산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종이라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마음에 미혹이 있을 때는 현종이 어찌했을까를 생각하면 된다. 그 길은 화산의 제자들에게 결코 틀릴 리 없는 길이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임소병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니⋯⋯. 말은 좋지만, 그것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 건 우리 애들인데요?”
“산적 새끼 몇몇 뒈지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어차피 너무 많아서 감당 안 되는 거 아니야?”
“⋯⋯사람인가, 진짜?”
“여하튼 지나간 일은 여기서 그만.”
청명이 계속 구시렁거리려는 임소병의 말허리를 딱 끊었다.
“이제 그런 데 신경 쓰고 있을 시간 없어. 놈들이 곧 추적해 올 테니까.”
백천이 호응하여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남경까지는 생각보다 금방이다. 이제 하산하면 속도가 붙을 것이고, 그럼 길어야 하루에서 이틀이다.”
일순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산을 내려간다는 것도, 이틀이면 남경에 도착한다는 것도 어느 하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이제 더 큰 산을 뛰어넘어야 하고, 그만큼 더 큰 위험을 맞닥뜨리게 될 거란 의미니까.
“일단은 남경이 가장 덜 위험할 거라 생각하여 그쪽으로 진로를 잡기는 했지만, 사실⋯⋯.”
“미지수죠.”
“예.”
임소병의 말에 백천이 담담히 긍정했다. 미지수란 말이 적확하다. 지금 강남은 그들의 움직임 덕분에 통째로 뒤흔들리고 있다. 그러니 곧 도착하게 될 남경이 그들이 알던 남경이리라는 보장이 없다.
“각오를 굳혀라. 우리는 반드시 장강을 넘는다.”
“예!”
백천의 말에 모두가 소리 높여 대답했다. 그건 대답인 동시에 스스로 하는 다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달렸을까. 앞쪽에서 달려 나가는 이들과 살짝 거리를 벌린 청명의 곁으로 임소병이 속도를 맞추며 다가왔다. 조금 전 불만을 늘어놓을 때와는 달리 웃음기가 싹 빠진 진지한 표정이었다.
“도장.”
“말해.”
“⋯⋯추격이 생각보다 늦습니다. 그리고⋯⋯ 앞을 막아서는 이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도장은 알고 계시겠죠?”
청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에 자잘한 공격이 들어오지 않는 건, 하나의 상황만을 의미한다. 적이 이쪽을 완전히 무너뜨릴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지금쯤이면⋯⋯. 예, 놈이라면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챘을 겁니다.”
“어차피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잖아.”
“예, 그렇긴 하죠. 하지만⋯⋯”
천우맹과 해남 일행이 남경으로 향하는 건 적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간과 거리, 그리고 각 세력의 위치까지. 그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남경이 그들에게 가장 승산 높은 전장이기 때문이다.
“놈이 움직일까요?”
“놈이 움직이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어.”
“⋯⋯예?”
“중요한 건 놈이 직접 움직이지 않더라도 남경으로 누군가는 움직일 거라는 거지. 그거면 충분해.”
청명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럼 법정은 반드시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법정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감수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다. 그건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모습만으로도 넘칠 정도로 확인했다.
그렇다면 법정은 남경으로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상황을 제 이목하에 두고 싶을 테니까. 청명과 장일소가 빚을지도 모르는 변수를 어떻게든 차단하고 싶을 테니까.
그게 되레 청명의 노림수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누가 그러더라고.”
“예?”
“세상은 결국 순리대로 돌아간다고 말이야.”
“⋯⋯.”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라.”
청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쩐지 서늘한 웃음이었다.
원래는 구파일방이 해남을 구해야 했다. 그러니 사실 지금 일행이 겪고 있는 고생도 원래는 구파일방의 몫이어야 했다.
“순리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그렇게 만들어 줘야지. 누구도 억울하지 않게 말이야.”
스산한 눈빛이 먼 북으로 향했다.
천하의 모든 세력이 모여들고 있는 혼란의 땅, 남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