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0화. 염치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5)
다가오는 무리의 선두에 선 자는 험상궂기가 이를 데 없었다.
물론 오래 살아온 형 노인은 안다. 얼굴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부질없다.
하지만 또한 알고 있다. 한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한 무리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면 그 결과야 빤하다는 것을 말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무리에게서는 위험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평범한 양민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분위기다. 손에 사람 피를 수없이 묻혀 본 이가 아니고서는 풍길 수 없는, 위험한 냄새.
이를 감지한 건 노인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노인의 눈에 실린 건 체념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눈에 들어찬 건 진득한 절망이었다. 저들이 단순하게 지나가다 들렀을 리는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평생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기에 다가오는 걸음걸이만으로도 직감할 수 있었다.
‘결국은⋯⋯ 이리될 일을.’
노인은 헛헛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순응만 한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맞이해야 할 게 이런 결말이었다면 차라리 소리 높여 악이라도 한번 써 볼 것을.
그랬다면 먼저 간 자식 놈 보기에 부끄럽지라도 않았을 텐데.
마을 안으로 들어서 주변을 훑어본 괴인들이 봉분 앞에 모인 이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저기 있군.”
선두에 선 이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범을 마주한 토끼는 달아나 볼 수라도 있지만, 무인을 앞에 둔 평범한 이들은 그조차 불가능했다. 노인은 곧 주어질 운명을 힘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아직 자식을 잃지 않았고, 더 강한 삶의 의지를 지닌 이들은 노인처럼 쉽사리 체념할 수 없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조금 전까지 악을 써 가며 형욱을 팔아넘긴 까닭에 대해 변명하던 사내가 다가오는 괴인들을 보자마자 넙죽 엎드렸다.
“모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더, 더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함구하고 살겠습니다, 무사님들!”
부질없는 짓이란 건 사내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손 놓고 죽어 줄 수는 없었다. 팔아넘길 수 있는 건 모조리 팔아넘기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목숨이 아닌가? 그런 목숨을 어찌 쉽게 놓을 수 있겠는가.
“새, 생각해 보니, 그놈들은 분명 북쪽으로 갔습니다! 저 위!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저기 북쪽이니까, 그, 부, 북쪽을 뒤져 보시면 그 정파 위선자들의 종적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앞까지 당도한 괴인들이 슬쩍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정파가 위선자라?”
사내가 숨을 죽였다. 경황없이 주워섬기다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모골이 송연했다.
“간만에 듣기 좋은 말이로군.”
하지만 다행히 그가 원하던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적으로 용기백배한 사내가 반색하며 더 크게 외쳤다.
“예! 예! 그⋯⋯ 제 잇속만 빼먹는 정파 놈들 말입니다! 어디 그런 놈들이 사파의 호걸님들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살려만 주신다면 저희도 돕겠습니다. 저, 저희가 그놈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무사님!”
“그놈들의 얼굴이라⋯⋯.”
괴인이 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물었다.
“너희를 데려가면 그 얼굴들을 알아보고 고해바칠 수 있다는 소린가?”
“예! 예! 그게 아니라면 용모파기라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 중에 그림을 잘 그리는 이도 있으니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 전에 하나 묻지. 여기가 형가촌이 맞나?”
“그, 그렇습니다만⋯⋯.”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사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당장 어제 이곳에 들렀던 이들이 왜 이런 질문을 한단 말인가?
그때 마을 이곳저곳을 살피던 이가 외쳤다.
“조장! 여기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있습니다.”
“다수입니다. 적어도 몇백은 되어 보입니다.”
그 말을 들은 괴인이 눈썹을 꿈틀했다.
그는 제 앞에 엎드린 이와 무덤, 그리고 만인방도들이 남긴 흔적을 모조리 살펴보더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조소했다.
“정파 놈들이 위선자인 건 사실이지.”
“예, 예! 그럼요!”
“하지만⋯⋯ 그 정파 무리에 우리 두목도 있단 말이야.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너희가 우리 두목을 사패련 놈들에게 팔아넘긴 모양인데.”
“⋯⋯예?”
괴인의 낯빛이 서늘했다.
“이런 쓰레기들을 구하겠다고 목숨 걸고 장강을 넘어왔다 생각하니 속이 뒤집히는군.”
사내는 괴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얼굴을 보기만 했다.
곧 괴인이 씹어뱉듯 말했다.
“우리는 녹림왕의 명을 받고 너희를 강북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 그런데⋯⋯ 그새를 못 참고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말을 하던 괴인뿐만 아니라 그 무리 전체에서 시퍼런 살기가 솟구쳤다.
이들은 녹림왕 직속 녹채. 녹림왕에 대한 충성심만은 세상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눈앞에서 녹림왕을 팔아넘기겠다는 말을 들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괴인들이 뿜어낸 살기에 사내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뒤로 벌렁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 저는⋯⋯.”
어째서 이들이 이곳에 있는가?
마을 사람들은 도움을 바라던 천우맹의 청을 거절했다. 애초에 불가능할 거라 믿었던 약속도, 그 거절로 인해 완전히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혜를 입고도 매몰차게 저버린 이들에게 누가 호의를 베풀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마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온 이들이 이 순간 도착해 버렸고, 사내는 이들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주절주절 지껄여 댄 것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안 사내는 절망뿐인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진 사람처럼 망연히 입을 벌렸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선두에 있는 녹림왕의 심복이자, 녹림십영(綠林十影) 중 하나인 흑야호 곽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녹림왕께서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녹림왕께서 그럴 리가! 보나 마나 그 화산 양반들이 우겼겠지.”
“그냥 전부 처리해 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런 놈들을 뭐 하러 강북까지 데려갑니까?”
“그래도 녹림왕께서 명하신 일인데.”
“사패련 놈들이 와서 죽여 버린 뒤였다고 하면 누가 알겠습니까?”
솔직히 녹림도들에게 배신이란 그리 낯선 일도 아니다. 은혜를 저버리는 일 역시 그리 드물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런 이들에 대한 단죄는 더욱 엄격했다. 어설프게 자비를 베풀면 문파의 근간이 뒤흔들린다는 걸, 경험으로 인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수하들의 말을 들으며 흑야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생각 역시 수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녹림왕의 명은 지엄하다. 하지만 최근 녹림왕은 화산 사람들에게 너무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 이들을 구하라는 명 역시 과거의 녹림왕이었다면 내릴 리 없었을 게 아닌가?
“⋯⋯대답해라.”
“예?”
“사패련 놈들은 어디로 갔나?”
“저, 저희는 그것까지는⋯⋯.”
흑야호가 피식 웃었다.
“은인은 잘도 팔아먹어 놓고, 사패련은 팔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 그런 게 아니라⋯⋯.”
사내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이제 흑야호에게선 노골적인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퉷.”
“더 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스르르릉.
녹림도들이 허리에 찬 커다란 칼을 뽑았다. 더 이상 친절함을 가장할 필요도 없으니 녹림 특유의 거친 기운이 숨김없이 흘러나왔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사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 있던 녹림도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그런데 그 봉분은 뭐지?”
“⋯⋯예?”
“누가 죽은 거지?”
누가 보아도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묻은 모양새. 마을 사람들은 흘끗 봉분을 돌아보았다.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이 어째 복잡했다.
흑야호는 침음성을 흘리며 굳은 얼굴로 봉분을 바라보았다.
“확인해 봤나?”
그가 묻자 다가온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히 마을 중앙에 고문 흔적이 있었습니다. 피 냄새가 아직도 씻기지 않은 걸로 보아, 무척 모진 고문을 당한 모양입니다.”
“⋯⋯.”
“당한 이가 한 사람이라면 몸에 있는 피를 모조리 뽑아낼 정도가 아니었을지⋯⋯.”
흑야호도 사파인이다. 만인방이 행하는 고문이 상상도 못 할 만큼 지독하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특히나 이곳에 직접 행차했던 것이 호가명이라면 그 고문의 강도는 일반적인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을 터.
‘그걸 버텼다는 건가⋯⋯.’
무인도 아닌 평범한 양민이 그 고문을 버텨 내고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는 건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곳에 남은 흔적과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그 일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굳이 봉분을 파내어 시신을 확인해 보지 않더라도 말이다.
“허⋯⋯.”
조금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은 흑야호가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던 흑야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무기를 넣어라.”
“⋯⋯예.”
수하들도 군말 없이 무기를 집어넣었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악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나, 이제 이들에게 손을 쓸 수 없다. 설사 그런 명령을 받는다고 해도 한번 생겨난 찝찝함은 가시지 않을 것이다.
녹림도는 본디 배신을 밥 먹듯 하고 인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파지만, 기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세상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니까.
“노인장.”
“예⋯⋯?”
“준비하시오. 강북으로 모시겠소.”
“저, 저희를 말입니까?”
“그렇소.”
형 노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하, 하지만 저희는⋯⋯.”
일단 덮어놓고 고개부터 끄덕여야 마땅하겠지만, 묘한 찝찝함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이 하루 사이에 겪은 일이 아니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그런 찝찝함이 말이다.
그러나 흑야호는 그저 고개를 내저으며 강경하게 말했다.
“우리는 명을 받았으니 따를 뿐이오. 선택하시오. 이곳에 남든지, 아니면 우리를 따라 강북으로 가든지. 후자를 선택한다면 반드시 살아서 강북 땅을 밟게 해 드리지.”
형 노인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런 노인을 향해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지만, 정작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아들이 묻힌 봉분이었다.
그 자리를 한참 말없이 바라보던 노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이놈아⋯⋯.’
결국 이 마을을 구한 것은 형욱이다.
형욱마저 그들을 팔아넘겼다면, 잠깐 모두가 목숨을 건졌겠으나 결국 이들의 손에 참변을 당했을지 모른다. 운이 좋아 거기까지 안 간다 해도 결국 마을 사람들을 돕지 않고 떠나는 건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아들이 마지막까지 천우맹에 대한 신의를 지켰기에 이 마을 사람들에게도 살길이 열린 것이다.
“선택은 빠를수록 좋소. 만인방 놈들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
“⋯⋯가겠습니다.”
노인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야지요⋯⋯. 어떻게든 살아야지요.”
“그럼 준비하시오. 짐은 가벼울수록 좋소. 쓸데없는 곡식 같은 건 챙길 필요 없소. 강북에는 널려 있는 게 양곡이니까.”
그 말이 형 노인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찔렀다. 이 말을 듣게 될 것을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그리⋯⋯ 그리하겠습니다.”
흑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만 살피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황급히 제집으로 달려갔다.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가만 보던 흑야호는 쓰게 웃었다.
‘세상이란⋯⋯.’
끝까지 의리를 지킨 이는 차디찬 땅에 묻혔고, 배신을 저지른 이들은 그 목숨을 대가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게 아마 세상에 선의가 퍼지기 힘든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풀이 돋지 않은 붉은 봉분을 보며 흑야호가 중얼거렸다.
“⋯⋯적어도 당신은 후회 없을 것 같군.”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가 그를 향해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