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8화. 염치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3)
“어느 쪽? 다시.”
호가명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형욱은 멀어져 가려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다잡고 있었다.
‘내가 왜 버티고 있었더라?’
왜 저항하는 걸까? 새삼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닐진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 자신이 이 모진 고문을 버텨 내고 있었는지.
대체 뭘 지키고 싶었던 걸까? 저자의 말이 틀렸나?
아니. 틀린 구석일랑 없다. 형욱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의리를 지켜 봐야 떠난 이들은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그들을 팔아넘기고 부귀영화를 누렸는지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형욱은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간, 하찮은 인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사람은 대개 불쌍한 거지에게 동전 한 문 정도를 얼마든지 베풀 수 있지만, 그 거지를 기억하지는 않는다.
동전을 던지고 몸을 돌리는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게 사람 아니던가? 어쩌면 그 화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형욱의 이름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일지 모른다.
그러니 호가명의 말이 옳았다. 조금이라도 현명하다면 이쯤에서 못 이긴 척 그들을 팔아넘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단 한 번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은가? 살아오며 그가 저지른 과오들에 비하면 작은 일에 불과하다.
그는 선인이 아니고, 대단한 기개를 지닌 이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무지렁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횡액을 당할지 모른다.
그게 정말 옳은 일인가? 정말 그가 가야 할 길인가?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너무 명확하다.
움직이지 않는 입을 열어 ‘남경’이라는 두 글자를 읊기만 하면 된다. 그럼 다 편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저 살아가면 된다.
저자가 약속했던 막대한 재화를 받지 못한다 해도 예전처럼 살아갈 수만 있으면 된다. 밭을 일구고, 아이를 키우고, 몸은 고될지언정 마음 기댈 데 있는, 그런 평범한 삶을 이어 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형욱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남경. 그저 남경이다. 그 두 글자만 말하면 된다.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가 비난받을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화산 일행을 저버렸으니 누구도 형욱의 양심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못하리라.
그러니 두 글자를 내뱉고 모두가 평범한 삶을 되찾으면 그만이다. 그게 뭐가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정확하게 말해라. 어서.”
호가명은 입가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어 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형욱이 모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몸서리치지 않아도 되게끔, 작게 속삭이기만 하면 충분하도록.
형욱의 아비는 말했다. 양심을 지키는 것도 힘이 있는 이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 말의 의미를 이제 안다. 그러니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형욱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목에 힘을 주어 남경, 그 두 글자를 입 밖으로 흘렸다.
“……엿……이나…… 처……먹어…….”
하지만, 막상 흘러나온 건 그 두 글자가 아니었다.
호가명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모르겠다.’
이 선택에 대한 이유를 형욱은 설명할 수 없었다. 갈가리 찢겨 죽어 저승에서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그저 고개만 숙일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마음 한편은 되레 후련하고 시원해졌다.
호가명의 손이 번쩍 들리고 이내 푸르게 빛나는 것을 보면서도 형욱은 피식 웃어 버렸다.
‘협객님들.’
그 손이 형욱을 향해 내리쳐졌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보다 염치가 있는 놈이었나 봅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흙먼지가 솟구치며 사방이 먼지구름으로 뒤덮였다.
숨도 쉬지 못하고 형욱과 호가명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고문하던 광경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머리가 터져 나가는 마지막 광경만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먼지구름이 천천히 걷혔을 때, 예상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우득.
호가명이 손안에 가득 파고든 흙만 움켜잡고 있었다. 그러더니 형욱의 머리 옆에 뚫린 구멍에서 손을 쑥 빼냈다.
그의 수하들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홉떴다.
“군사!”
“시간만 낭비했군.”
호가명이 몸을 곧게 세웠다. 그리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형욱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백비가 곧장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군사,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내버려 둬라.”
호가명은 무심한 목소리로 딱 끊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으면 일각도 더 버티지 못할 놈이다. 가는 길 편하게 숨을 끊어 줄 필요는 없겠지.”
“……예, 군사.”
호가명의 눈에는 한 점의 자비도 없었다.
만일 지금 이 자리에서 형욱을 죽인다면, 결국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그가 분을 이기지 못해 무공을 못 쓰는 양민에게 손을 썼다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결국 무지렁이는 무지렁이일 뿐.”
싸늘하게 악의 어린 한마디를 남긴 호가명이 몸을 획 돌렸다.
“군사, 그럼 저들은……?”
백비가 슬쩍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호가명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내버려 둬라.”
“하나…….”
평소 토를 다는 일이라고는 일절 없던 백비가 말끝을 흐렸다. 일이 이리 틀어졌으니 일벌백계라도 해야 체면 상하는 일을 막을 수 있지 않냐는 의미다.
만인방 시절이었다면 호가명 역시 저들을 남김없이 지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호가명의 판단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련주께서 하신 명을 잊었느냐?”
“아…….”
백비가 삽시간에 사색이 되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패군 장일소는 양민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말라는 명을 사패련 전체에 내렸다. 한둘이야 그렇다 쳐도, 마을 전체를 건드리는 건 그 명을 대놓고 어기는 일이나 다름없다.
다른 이들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기분 내키는 대로 저지를 수 있을지 모르나, 호가명은 아니다.
장일소는 미곡까지 풀어 가며 강남 백성들의 호의를 얻으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호가명이 하찮은 체면을 내세우며 그 뜻에 거스르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미 형욱 하나로 충분하다 못해 과했다.
“련을 거역한 이가 어떤 꼴로 죽어 가는지 지켜보고 그 사실을 뼈에 새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보다…….”
호가명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족적이 분명 남아 있을 것이다. 샅샅이 뒤져라.”
“예!”
호가명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호가명의 눈빛이 어두웠다.
‘멍청한 짓을…….’
시간을 낭비했다.
평소였다면 놈이 예상보다 잘 버틴다는 생각이 든 순간 곧장 다음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호가명도 알고 있었다. 그게 반쯤 오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본디 호가명의 강점은 냉철함에서 비롯된다. 불처럼 들끓는 장일소와 달리 한없이 침착하고 냉정한 것. 하지만 이번 일에 있어서 만큼은 냉정을 잃고 말았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호가명이 눈을 감고 긴 숨을 뱉었다.
‘화산…….’
만일 저자가 의리를 지키겠다며 감싼 게 화산이 아닌 다른 문파였다면, 호가명은 멍청한 양민 놈들이 제 밥그릇도 챙길 줄 모른다며 비웃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화산이라는 두 글자가 끼어든 순간, 문득 저 의지가 꺾이는 걸 두 눈으로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치밀었다.
실로 멍청한 치기였다. 하찮은 놈 하나의 의지가 꺾이고 말고가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련주가 화산이라는 문파에 과하게 집착하는 점을 우려하던 호가명이 어느새 그 련주 이상으로 화산에 집착하고 있었던 셈이다.
“군사! 이쪽에 흔적이 있습니다.”
“추격조를 붙여라. 곧바로 따라붙는다.”
“예!”
호가명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형욱은 핏덩이 같은 모양새로 쓰러져 있었다. 벌레 같은……. 아니, 어쩌면 벌레보다 못한 꼴이었다.
“그럼 나는 벌레에게 진 꼴인가?”
호가명은 자조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멀어지자 숨죽인 채 대기하던 만인방도들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마을을 꽉 채우고 있던 만인방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러자 그들이 마을에 버티고 서 있던 악몽 같은 시간이 흡사 거짓말인 것만 같았다.
덩그러니 남은 형욱의 처참한 몸뚱이와 그 주변을 적신 검붉은 피만이 그 시간이 실제였음을 증명했다.
“사, 산 건가…….”
꼼짝없이 모조리 죽었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만인방도들이 사라진 방향을 그렇게 멍하니 보던 이들은 뒤늦게야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형욱에게 시선을 주었다.
“혀, 형욱이!”
“이 사람아!”
일단 황급히 근처에 달려가긴 했으나 누구 하나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손을 댈 수 있는 곳이 없어서였다.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라고는 없으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도와야 할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야, 이놈아! 이, 이 미련한 놈아아아아아!”
하지만 형 노인은 거침없이 그런 형욱을 움켜잡고 제 품에 끌어안았다. 이미 제 자식의 운명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내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느냐,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라고! 은혜니, 뭐니……! 우리 같은 놈들은 화만 당할 뿐이라고 그만큼 말하지 않았느냐! 이 미련한 놈아! 이! 이……!”
노인의 처절한 통곡이 마을 안에 울려 퍼졌다.
형욱의 안사람은 차마 형욱의 몸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넋이 나간 듯 울었고, 어린 자식들은 겁을 먹어 다가오지도 못했다. 그들 모두가 형욱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다.
“우리 같은 놈들에게는…… 우리 같은 것들에게는 그것조차 과욕이라고 그리 말했는데…… 그 한마디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이 멍청한…… 이 멍청한 것아! 이 미련한 놈아! 크흐흐흑…….”
늙어 버린 얼굴을 짓무르게 하며 잔뜩 흐른 눈물은 고스란히 형욱의 얼굴로 쏟아졌다.
그 눈물 때문인지 잠깐 의식을 차린 형욱이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 아버…….”
“그, 그래! 이놈아! 그래, 나다! 아비다!”
형욱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노인은 덜덜 떨리는 그 손을 얼른 부여잡았다.
“이놈아, 정신 좀 차리거라! 이리 죽어서는 안 된다! 이리 갈 일이 아니야! 이 다 늙은 아비도 아직 살아 있는데, 왜 네가 가느냐! 왜!”
형욱은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겨운 듯 노인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죄…….”
잔뜩 쉬어 알아듣기도 힘든 목소리는 언제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죄송……합…….”
그 말을 끝으로, 형욱의 고개가 툭 떨궈졌다.
부여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자 형 노인은 아들을 더 세게 끌어안고 목이 터지게 통곡했다.
“형욱아! 야, 이놈아! 형욱아아아아아아!”
마을 사람들은 차마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한 채 하나둘 따라서 통곡했다. 마을 입구에는 이제 구슬픈 곡소리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만인방도들이 모두 떠나 버린 그곳에 홀로 아직 떠나지 못한 이가 있었다.
유공은 통곡하는 마을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에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고여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