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7화. 염치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2)
“사형.”
“음?”
앞선 화산 일행을 따라 달리던 이자양이 제 옆의 곽환소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까 저들이 한 대화를 이해하셨습니까?”
곽환소의 눈썹이 슬쩍 꿈틀했다. 그러자 이자양이 굳이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저는 잘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듣자 하니 저들이 해남으로 오는 동안 사파 놈들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저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모양이더구나.”
“그럼 결국 마을 사람들이 그 큰 은혜를 입고도 곡식 하나 내어 주지 않았다는 의미잖습니까?”
“그렇겠지…….”
이자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앞쪽을 바라보았다. 앞에서 달리고 있는 천우맹도들을 말이다.
“그런데 어찌 저리 태연할 수가 있습니까? 의미 모를 말만 늘어놓고 말입니다.”
이자양의 표정엔 답답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본 곽환소가 슬쩍 물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
“예? 그게 무슨…….”
“만약 네가 화산 사람들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는 말이다.”
이자양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대답했다.
“……저라면 치도곤을 냈을 겁니다.”
상상만 해도 화가 나는지, 목소리가 슬며시 격앙되어 있었다.
“사람은 은혜를 알아야 사람이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고맙다고,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절절매면서 막상 가진 건 한 톨도 내어 놓지 않으려 하는 이들을 두고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도 그렇지.”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은혜를 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받아먹을 때는 고맙고, 정작 도와야 할 때는 그런 적 없다는 듯 외면하다니. 그런 인간들은 도움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곽환소는 딱히 이렇다 할 동의를 던지지 않고 그저 네 의견은 알겠다는 듯 고개만 느리게 끄덕였다.
“사형은 아닙니까?”
이자양이 묻자 곽환소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아마 나도 그랬을 것 같구나. 너도 알다시피, 내 성질에 그런 걸 보고도 참는 건 무리겠지.”
“그렇죠?”
이자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모르겠구나. 저들이라고 해서 우리와 다른 심정이었겠느냐? 우리야 상상만 해 본 것이지만 저들은 그 일을 직접 겪었으니 화가 더 나면 났지, 덜 나진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지요.”
“그리고, 음……. 너도 알겠지만, 저분들의 성질머리가 우리보다 딱히 대단히 온화한 것도 아닌 것 같더구나.”
그 말에 이자양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지금이야 저들이 진정한 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이가 없다지만, 천하비무대회에서 처음 봤을 때의 저들은 그냥 난봉꾼 그 자체였다.
특히나 저 장문대리는 허우대만 멀쩡할 뿐, 이자양이 살면서 본 미친놈 중에서도 첫손에 꼽힐 만큼 미쳐 있었다.
다짜고짜 달려들어 패싸움이 벌어졌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문파가 욕 좀 먹었다고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던 게 저 인간들 아닌가? 심지어 다른 곳도 아닌 소림에서 말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참냐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을 크게 벌이거나 시간을 끌 수 없었으리라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따끔하게 몇 마디 남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때 곽환소가 나직이 말했다.
“도가에 이런 말이 있다더구나.”
“예?”
“도를 도라 하면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니다.”
이자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또 뭔 뜬구름 잡는 말인가?
“그 말대로라면 은혜를 은혜라 부르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는 거겠지. 내가 베풀었으니 너는 갚아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더는 진심으로 베푸는 은혜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는 의미다.”
“허…….”
이자양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협의를 행하는 이들도 사람이다. 어떻게 사람이 아무런 대가 없는 일을 이어 갈 수 있고, 아무런 가치 없는 일에 목숨을 걸 수 있단 말인가?
꿈 많은 어린 무인들이 협객행을 꿈꾸는 것도, 그 협객행을 통해 강호 전체에 제 이름을 알려 영웅이 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 아닌가?
“그럼 은혜를 베풀고도 돌려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천대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까?”
“…….”
“그럼 대체 누가 그걸 하겠습니까?”
“저들은 하는구나.”
순간 이자양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앞에서 묵묵히 달리고 있는 이들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저들도 사람이니 기분이 마냥 좋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저들은 저 곡식 자루 하나로 그 충분한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미친놈들인가…….”
이자양의 지나치게 솔직하고 원색적인 반응에 곽환소가 실소했다.
그의 생각 역시 이자양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저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저들은 당장에 준 만큼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베풂으로 인해 이를 받은 누군가가 역시 대가 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거겠지.”
“그게 말처럼 되겠습니까?”
“당장이야 되겠느냐? 그저 끝없이 해 나갈 뿐이지. 그럼 조금씩 그 뜻을 아는 이들이 생길 테니까.”
이자양은 조금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뜻인지야 알겠으나 너무도 지난한 길이다. 당장 눈앞에 힘센 무인들이 버티고 서 있어도 가진 것을 쉬이 내놓지 않으려 하는 게 사람인데, 그들이 어떻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저는 가당치도 않은 헛꿈이라 생각합니다.”
이자양이 비웃음 섞인 말을 뱉었다.
“거창하게 포장이야 하고 있지만, 결국 결론만 보자면 수십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얼마 되지도 않는 곡식 한 자루 겨우 얻고 쫓겨난 셈 아닙니까?”
“…….”
“저 곡식을 준 사람도 그저 체면치레나 한 거지, 진심으로 고맙다고 여기겠습니까? 사람은 그렇게 쉬이 바뀌지 않습니다. 사형도 아시잖습니까? 사람이 얼마나 지독하고 자기밖에 모르는지.”
곽환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험한 바다를 마주하며 살아온 그들이기에 오히려 잘 아는 것이다. 목숨과 생계가 걸렸을 때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말이다.
“저분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저 곡식 자루 하나로 뭐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건 그냥 위안을 찾기 위한 외면일 뿐입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그래.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사형은 아니라 보십니까?”
“사실은 나도 네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곽환소가 쓰게 웃었다.
저들이 가려 하는 길을 그르다고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다. 더욱이 양민들은 그리 순박하지 않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기에 더욱 이기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곽환소가 앞서 달려가는 청명의 등을 바라보았다. 걸레짝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엉망이 된 청명의 의복에는 그가 흘렸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당신들이 하려는 건, 어쩌면 세상 전체를 화산의 발아래 두기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헛될 것이다. 보답조차 받지 못할 고행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저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구나.”
“……예?”
“그냥 그러고 싶은 것이다.”
곽환소가 작게 중얼거리고는 땅을 박찼다.
* * *
“지독한…….”
백비(白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호가명의 호위이자 수족과도 같은 백비는 지금껏 수많은 이들을 고문하고 그들의 입에서 정보를 빼내 왔다.
만인방도들이 방주인 장일소보다 오히려 군사인 호가명을 더 두려워하곤 하는 데는 지금껏 그가 물밑에서 해 온 일의 영향도 크다.
그의 손에 걸리면 제아무리 강단 있는 놈이라 해도 입을 여는 데 일각이면 충분했다. 단 일각만 마음대로 인간을 주무르게 놔둔다면, 그는 처음 걸음마를 떼던 순간은 물론이고 젖먹이 시절까지도 기억해 내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런 백비에게, 힘도 없는 양민 놈 하나 입을 열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니, 일각이 아니라 숨 몇 번 내쉴 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야 했다, 분명.
하지만 지금 앞에 쓰러진 이를 바라보는 백비의 눈빛엔 질린 기색이 가득했다. 눈앞에서 쏟아지는 피와 고름, 오물 등을 보고도 늘 한결같이 냉정하던 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실 앞에 쓰러진 건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르기도 힘들었다. 핏덩어리에 가깝게 망가진 채 쓰러진 그것은 기력이 거의 다한 모양으로 몸부림치거나 꿈틀거리지도 못했다.
아직 분명히 살아는 있다. 시뻘겋게 물든 가슴팍이 희미하게 오르내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건 분명해 보였다.
백비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실토하지 않는 저놈의 몸뚱이를 산 채로 갈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이상 고문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제는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숨이 끊길 지경이니까.
저놈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데 실패했다. 여지없이 말이다.
“흐…….”
그때, 놈의 입에서 탄식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백비는 이를 악문 채 호가명에게로 가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호가명은 잠시 말없이 그런 그를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군.”
“…….”
“사정을 봐준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모자람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대단하다는 말이겠군. 쟁쟁한 무인들을 아이처럼 울부짖게 만들던 너조차도 저놈의 입을 못 열었으니 말이야.”
순간 백비의 얼굴에 분한 기색이 스쳤다.
한 지역을 호령하던 패자도, 잔악무도한 마두도, 수없이 사람을 죽였던 살인귀도 그의 고문 앞에서는 침묵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산골 벽지의 무지렁이 하나가 그의 고문을 끝끝내 이겨 낸 것이다. 대체 이 상황을 뭐라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저벅.
호가명이 걸음을 내딛자 백비가 옆으로 비켜나 고개를 떨궜다.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걸어간 호가명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형욱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이렇게까지 버티는 이유가 뭐지?”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호가명은 몸을 낮추어, 원래라면 귀가 있어야 했을 뻥 뚫린 구멍에 속삭였다.
“편해지고 싶지 않나? 네가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다 한들, 그들은 이미 떠났다. 다시는 마주할 일조차 없겠지.”
“…….”
“잠시만 눈을 돌리면 된다. 그럼 네 모든 상처를 치료해 줄 것이고, 막대한 재화도 함께 내려 주마. 내가 누군가에게 정보를 얻는 대가로 이런 것을 약속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
“그만큼 나는 너를 인정한다는 의미야. 너는 할 만큼 했다. 이제 와 입을 연다고 해도 세상 누구도 너를 감히 비난하지는 못할 것이다.”
놀랍게도 호가명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눈앞의 이자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네가 이곳에서 이리 죽는다고 해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다. 누구 하나 너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모든 건 결국 살아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자, 마지막이다. 대답해라.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만 말해 주면 즉시 너를 치료해 주고, 누구도 감히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지위와 재화를 약속하지. 그리고 마을 놈들도 모두 살려 주겠다. 사패련의 군사 독심나찰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을 약속하지.”
호가명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형욱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거부한다면 너는 물론이고 이곳의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이렇게 목숨을 걸고 지킨 이들조차도 네가 이곳에서 이리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모를 터. 설마 그렇게 가치도 없이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
“그러니…….”
호가명의 두 눈이 차게 빛났다.
“대답해라. 그들은 어디로 갔지?”
그 순간 형욱의 입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인인 호가명조차 정확하게 듣기 어려울 만큼 작은 소리가.
“좀 더 정확하게 말해라.”
호가명이 그의 입가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형욱의 입술이 벌어지며 진득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벌어진 입에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소리가 위태롭게 새어 나왔다.
“……어.”
“어느 쪽? 다시.”
“…….”
“정확하게 말해라. 어서.”
호가명의 얼굴에 얼핏 득의의 빛이 스쳤다.
그의 얼굴에 감정이 떠오르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걸 생각해 보면, 마음속에 어떤 희열이 스쳤을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마침내 바짝 가져다 댄 호가명의 귓가에 형욱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엿……이나…… 처……먹어…….”
순간 정적이 흘렀다.
호가명의 얼굴이 악귀처럼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
공력을 잔뜩 실은 호가명의 주먹이 형욱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