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6화. 염치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1)
천우맹과 해남의 문도들이 떠나고 다시 얼굴을 마주한 이들에게서 처음 나온 말은 변명이었다.
“……도와드리는 게 맞기는 한데.”
“그걸 누가 모르나? 당연히 맞기는 하지. 우리가 짐승도 아닌데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지.”
“그렇지. 그게 맞는데……. 그렇긴 한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 짐승 같은 사파 놈들이 알게 되기라도 하면 어찌 되겠는가? 이 마을에 있는 것들은 개미 새끼 하나도 못 살아남을 텐데.”
“내 말이 바로 그거일세. 그분들은 사파가 어떤 놈들인지 잘 모른다니까. 그분들이야 사실 수틀리면 싸울 수라도 있는 분들 아닌가? 납작 엎드려서 살려 주기만 바라야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 심정을 어찌 알겠는가?”
“그래도…… 섭섭하긴 하셨겠지.”
“그야 그렇지. 나 같아도 많이 섭섭하지.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셨던 분들인데.”
“그쯤 해 둬. 말해서 무엇 하나? 힘이 없는 게 죄고, 이런 데서 발붙이고 흙 파먹는 게 죄지. 사파 놈들만 아니었어도 그깟 곡식 따위를 누가 아까워했겠는가?”
하지만 그것으론 불편한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하지 않았는지, 시간이 흐르자 성토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말이야 바른말로, 애초에 그 양반들이 사파 놈들에게 당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내 말이 틀렸나? 사파들 처리해 준다고 호언장담하고 허세를 떨 때는 언제고, 그놈들한테 혼쭐이 나서 강남에서 쫓겨나지 않았는가?”
“거참, 그래도 함부로 할 말이 아니래도 그러네.”
“애초에 그 정파니, 뭐니 하는 양반들이 헛짓거리만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고통스레 살지는 않았을 걸세. 따지고 보면 그들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왜 우리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냐 이 말이야. 죄책감을 느끼려면 그쪽에서 느껴야지!”
“뭐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데……. 어쨌거나 좋은 마음에 도와주신 분들 아닌가?”
“도와준다는 것도 그렇지! 뻔히 우리 사정을 아는 양반들 아닌가? 우리가 함부로 자기들 도와줬다가 무슨 꼴 당할지 짐작 못 할 사람들인가? 배울 만큼 배웠고, 알 만큼 아는 양반들이 그게 뭐 하는 건가?”
“…….”
“그리고 돕는다는 것도 말뿐이지. 우리를 강북으로 보내 주니, 어쩌니 하더니 그래서 누가 왔는가? 이번에도 쌩 가 버리지 않았나!”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애초에 그 양반들은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죽든 말든 안중에도 없는 거지. 상황이 좋을 때는 선심 쓰듯 두고 갔던 곡식인데, 상황이 조금 나빠지니 그거라도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가?”
“사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 간다고…….”
“돈이라도 받았나? 진짜로 줄지 안 줄지 어떻게 알고! 그리고 그 돈을 받는다고 제대로 쓸 수나 있나? 이런 세상에서는 그깟 쇳덩어리보다야 당장 입에 넣을 수 있는 곡식이 훨씬 더 귀한데!”
사실은 조금 다르다.
난세일수록 돈보다 곡식이 중요하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지만, 돈이 제구실하지 못할 만큼 지금의 강남이 혼란스러운 것도 아니다. 당장 큰 도시만 나가도 여전히 돈만 풍족하면 곡식을 구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어 지적하지는 않았다. 말을 꺼내 봐야 그들만 못나질 뿐이니까.
“촌장님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촌장님 아니었으면 보나 마나 여기에 있는 곡식도 홀랑 뺏겼겠지.”
“거참 말이 과하다니까.”
“우리가 뭐 알겠는가?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생각 깊은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냥 따라갈 수밖에.”
“그도 그렇지.”
선택을 한 건 그들 자신이다. 형 노인은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전했을 뿐이다.
하지만 외면이 직면보다 편했다. 훗날에는 더 큰 화를 부르게 될지 모른다 해도 당장에는 편해질 것이다.
그러니 그저 그들은 형 노인의 강압에 따랐다고 생각해 버리면 된다. 노인은 가장 발언권이 강한 형가촌의 촌장이니까.
“이제 됐네. 그래도 밥 한 끼 잘 먹여 보내지 않았는가? 그쯤 했으면 은혜는 갚을 만큼 갚은 거지.”
“……그만하게.”
“틀린 말이 아니라니까? 저 사람들에게 그 밥 한 끼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마는, 우리는 그 곡식을 내준 덕에 보름은 넘게 굶어야 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만치 했으면 보여 줄 성의는 다 보여 준 것일…….”
“그, 그만하라니까.”
한 사내가 열변을 토하던 이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던 이는 그 만류를 뿌리치고 벌컥 성질을 부렸다.
“아, 왜? 내가 내 입 두고 할 말도 못 하나?”
“그게 아니라! 뒤, 응? 뒤에!”
“응?”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형욱이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순간 낯이 뜨거워진 사내는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크, 크흠. 자네 왔는가?”
“그만하면 다 갚았다고 했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형님이 예전에 제게 했던 말이 있었지요.”
“으응?”
형욱이 씹어뱉듯 말했다.
“못 배우고 가난하다 해서 염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염치는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사람이면 그냥 아는 것이다.”
사내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럼 염치를 모르는 사람은 뭐라 불러야 합니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형욱은 굳이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의 거친 걸음걸이를 보던 이들이 저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위기가 이리되고 나니 사람들은 금세 서로의 눈치를 보다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
마을은 이내 깊은 고요함으로 물들었다.
마음속 깊이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도, 느닷없이 찾아와 무리한 요구를 한 화산 일행들이 과했다고 여기는 이들도, 마음이야 어쨌건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고 여기는 이들조차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고, 드물게도 고요했던 새벽을 지나 산 너머로 먼동이 터 왔다.
“쯧.”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형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간밤에 형욱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평생을 산에서 살던 녀석이 뜬금없이 변을 당했을 리는 없으니, 그저 아비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 밖에서 밤을 지새운 게 분명했다.
“나이도 적지 않은 놈이 이리 치기 가득해서야.”
세상이란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다. 이제는 그걸 알 때도 되었을 텐데…….
노인이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며칠쯤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는 안다. 당장은 쓰려 죽을 것 같은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딱지로 덮인다. 그걸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이내 같은 상처를 입어도 고통은 덜해지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 쓰리고 아프더라도 몇 번쯤 같은 일을 겪으면 이내 무뎌지게 된다. 죄책감이라 해서 다르겠는가.
노인은 그저 이 일을 통해 아들이 조금 더 현실을 직시하게 되길 바랄 뿐이었다.
저벅. 저벅.
그때 노인의 귓가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어귀로 시선을 돌린 노인은 이내 사색이 되어 눈을 부릅떴다.
“아…….”
눈빛만으로도 그 패악함이 느껴지는 한 무리가 마을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서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따악.
무리의 선두에 선, 뒤쪽의 험상궂은 이들과 달리 청수해 보이는 이가 손가락을 튀겼다. 그리고 말했다.
“한 사람도 남김없이 끌고 와라.”
“예!”
형 노인의 얼굴이 시커먼 절망으로 뒤덮였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나으리!”
끌려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중앙에 꿇어 앉혀졌다. 바싹 말라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다리를 가진 형 노인도 다를 바 없었다.
아침부터 별안간에 끌려 나와 무릎을 꿇게 되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항의하거나 따져 묻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무인이란 평범한 양민들에게 저승사자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하나만 나타나도 마을이 뒤집힐 판인데, 수백에 달하는 이들이 그들을 에워쌌으니 대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두려움을 넘어서 금방이라도 정신이 끊길 것만 같았다.
“아악!”
“혀, 형욱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형 노인이 화들짝 놀라 번쩍 시선을 틀었다.
간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아들이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차라리 멀리 떠나 있어서 요행히라도 살아남길 바랐건만, 저 마음 약한 놈은 화가 난 와중에도 마을 주변을 알짱거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아니야.’
노인이 비쩍 마른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다잡았다. 아마 눈치를 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스스로 뺨도 세게 후려쳤을 것이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봐 은인을 외면했던 게 아닌가? 마을 사람들은 한 점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니…….
“이들이 전부입니다!”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앞에 선 차가운 인상의 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숨김없이 대답만 한다면 피해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단도직입적인 말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질문이 떨어졌다.
“이 마을에 정파 놈들이 들었었나?”
마을 사람들은 순간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양심에 걸려서가 아니다. 혹시 정파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는 걸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해코지를 당하게 될까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문사, 호가명은 그런 사정을 봐줄 이가 아니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본보기 삼아 두엇 정도 죽여라.”
“드, 들었습니다! 들었었습니다, 나으리!”
그 순간 형 노인이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쿵! 쿵!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조아렸다.
“분명 그놈들이 왔었습니다!”
“그래?”
“예! 고, 곡식이 필요하다 했습니다. 값을 치를테니 곡식을 내어놓으라고…….”
“곡식?”
“예, 그렇습니다!”
호가명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어주었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비록 무지렁이지만, 지금 어느 분이 저희를 보살펴 주시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형 노인은 그 뒤에 따라 나올 어떤 말에도 대답할 준비를 마쳤다. 질책이라면 질책대로, 칭찬이라면 칭찬대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노인의 예상에서 한참 벗어났다. 애초에 호가명은 그들이 내어주었을지도 모를 곡식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군. 좋다. 그럼 그들은 어디로 갔지?”
“……예?”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디로 갔냐니? 마을 사람들이 그걸 대체 어떻게 알겠는가?
“모르는가?”
“그, 그것까지는…….”
형 노인이 반사적으로 슬쩍 시선을 들고 눈치를 살폈다. 호가명의 얼굴, 정확히는 그의 눈이 보였다.
그 눈에 담긴 빛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섬뜩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돌이나 나무를 바라보는 것 같은 무덤덤한 눈빛. 이것만 보아도 형 노인은 이자가 마을 사람들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예?”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믿는 것은 그저 양심보다는 목숨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뿐.”
호가명이 가볍게 턱짓하자 좌우에 있던 이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말하는 자는 살려 줘라. 나머지는 모두 죽이고.”
“예!”
노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 저자입니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저자가 마지막에 그들을 따라갔었습니다! 저자가 알 것입니다!”
“소, 소길이!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형 노인이 눈을 부라리며 발작하듯 소리쳤다. 사내가 가리킨 게 다름 아닌 형욱이었기 때문이다.
“왜, 왜요! 사실이지 않습니까!”
“같은 마을 사람끼리 이게 뭔……!”
“양심이고 나발이고 일단은 살고 봐야 한다고 하신 분이 그게 뭔 소립니까! 우리 같은 것들은 무슨 짓을 저질러서라도 일단은 살고 봐야 한다고 어제 말씀하셨잖습니까!”
노인의 눈이 덜덜 떨렸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그 정파 사람들을 내보내기 위한…….
“저자입니다! 형욱입니다!”
“저자가 따라갔었습니다!”
“쇤네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 작자가 알 것입니다!”
자신들의 살길이 무엇인지를 알아 버린 마을 사람들이 발악하듯 앞다투어 소리쳤다.
“그만.”
호가명의 지시에 위협적으로 다가가던 무인들이 물러났다.
호가명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필사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형욱에게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형욱이라는 자는 낯빛이 창백했지만 의외로 표정이 꽤 담담했다.
“네가 알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형욱이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이 양반들 다그쳐 봐야 소용없습니다. 저만 아니까요.”
“그럼 대답해라. 그들은 어디로 갔지?”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쪽은 사패련의 높은 분이십니까?”
호가명의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해 두지.”
“그럼 많이 배운 분일 테니, 하나 여쭙겠습니다. 혹시 말입니다.”
잠깐 말을 멈춘 형욱이 피식 웃었다.
“염치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순간 모두의 눈이 떨렸다. 마을 사람들도, 호가명의 뒤를 지키던 만인방도들도. 감히 호가명을 향해 던져진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호가명과 그 말을 내뱉은 형욱만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호가명의 입이 열렸다.
“백비(白匕).”
“예, 군사.”
“알아내라.”
“예!”
백비라 불린 이가 형욱에게 다가가며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시퍼렇게 날이 벼려진 비도였다.
형욱은 그 비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알게 되겠네. 내가 염치가 있는 사람인지.”
두 눈을 감은 그는 숨을 깊게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