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5화. 역시 마음이 넓으시다니까. (5)
“그럼 가 보겠습니다.”
“예, 협객님들. 살펴 가십시오!”
형욱이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인사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형욱이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천우맹 일행도 그에게만은 최대한 예를 표했다.
“아, 그⋯⋯.”
인사를 마친 형욱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그⋯⋯ 어디로 가시는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예?”
백천이 살짝 묘한 시선으로 형욱을 살폈다. 형욱이 얼른 손을 황급히 내저으며 말했다.
“아, 그런 게 아닙니다. 무사님들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쇤네가 알아서 뭐 하겠습니까? 다만 산맥을 따라 위쪽으로 가실 거면 조심하라는 말씀을 드리려고요.”
“조심이라면⋯⋯?”
“여기가 아무리 산골벽지라지만 그렇다고 세상 사는 소리를 아주 못 듣는 것은 아닙니다. 듣자 하니 요즘 위쪽이 조금 소란스럽다고 하던데, 만약 강북으로 향하실 거면 다른 쪽을 택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형욱의 조심스러운 말에 백천이 미소를 지었다.
“아, 그 말씀이셨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남경 쪽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아⋯⋯.”
형욱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죄, 죄송합니다. 협객님들께서 다 생각이 있으신데. 저 같은 무식한 것이 괜한⋯⋯.”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음 써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백천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워낙 촉박하여 그만 길을 재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 그럼요!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그럼.”
백천이 빙그레 웃고는 포권 했다.
그가 몸을 돌리니 다른 이들도 형욱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일제히 몸을 돌렸다.
모두의 모습이 멀어지다 끝내 사라질 때까지 형욱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파아아앗!
선두에 선 화산의 제자들이 바람처럼 쏘아졌다.
마을을 나설 때 그토록 무거웠던 발걸음은 이제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백천은 가장 앞서 달렸고, 그런 그의 뒤를 조걸이 쫓았다. 조걸의 시선은 백천이 어깨에 멘 곡식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많은 이들이 나눠 먹으면 한 줌에 지나지 않을 곡식을, 백천은 스스로 메어 나르고 있다. 마치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보물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네요.”
“음?”
조걸이 중얼거리자 백천이 돌아보았다. 조걸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깊어져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 형욱이라는 사람 말입니다.”
“⋯⋯그래.”
“이전에 마을에 들렀을 때는 우리를 가장 불신하던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랬었나?”
“그렇다니까요. 차라리 다른 마을 사람들이 호의적이었고, 그 형욱이라는 분은 우리를 대충 힘이나 과시하러 온 무뢰배 취급했었잖습니까.”
백천은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며 형욱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래. 그랬었던 것 같구나.”
생각해 보니 조걸의 말이 맞았다. 분명 처음 마을에 들렀을 때만 해도 형욱은 그들에 대한 불신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랬던 양반이 지금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이상하더냐?”
“이상하다기보다는⋯⋯.”
조걸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다행히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은 윤종이 조금 더 정제된 언어로 대신 해 주었다.
“아까 청명이가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백천이 이채 띤 눈으로 윤종을 바라보았다. 윤종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물론 저희에게 악의를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악인은 아닐 것이고, 저희에게 선의를 베푼다고 해서 선인은 아닐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다.”
“예. 하지만⋯⋯ 그 사람의 태도를 바꾼 것은 이전에 저희가 보인 선의였겠지요.”
백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려는 있다. 이쪽을 향해 호의를 보이는 것을 두고 옳은 변화라 말하는 것은 오만의 증거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백천도, 윤종도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옳은’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였다.
청명이 말했던 대로, 협의가 단순히 저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무언가를 바꾸고 있을지 모른다.
아직은 작고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자라나 더욱 커질 무언가를 말이다.
어쩌면 지금 그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협의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순간 절망하고 말문이 막혔던 거겠죠.”
“윤종아⋯⋯.”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협의도, 선의도 세상을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조금은 달라지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말에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으로 보았으니까. 한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했으니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사람입니다. 아직은 지난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뀌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이 선의로 가득 차게 될지도 모를 일이죠.”
“어렵구나.”
“그러니 도(道) 아니겠습니까? 쉽다면 굳이 평생에 걸쳐 구할 필요가 없지요.”
백천이 윤종을 힐끔 바라본다. 그의 얼굴이 전에 비할 수 없이 후련하고 산뜻해져 있었다. 백천은 그저 형욱에게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지만, 윤종은 그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됐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도를 좇는 건 조금 나중에 하자꾸나. 지금은 걸음을 재촉해야 할 때다.”
“예, 사숙.”
“일단 생각하던 대로 보급은 되지 않았지만⋯⋯. 그건 상황을 봐 가며 해결하자꾸나.”
“예!”
백천이 속도를 높였다. 바람이 얼굴을 빠르게 스쳤다.
그들을 외면하던 마을 사람들과, 마지막까지 공손하게 압박해 오던 형 노인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까지 미안해하던 형욱의 표정가지 아직 눈앞이 선했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이 어깨에 실린 묵직한 곡식 자루의 무게뿐이다.
‘답을 내려 하지 말자.’
어쩌면 답을 내기에는 그도, 사형제들도 아직 미숙할지 모른다. 아무리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고 해도 그들은 아직 어린 도인에 불과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도를 지키기 위해 어찌 살아가야 하는지는 평생을 두고 고민할 일이다. 그러니 섣불리 평가하지 말고 그저 기억하면 된다. 언젠가는 이 기억도, 이곳에서 본 것도 모두 그들 안에 녹아들 테니까.
다만⋯⋯.
‘누구일까?’
청명이 때때로 논하는, ‘아는 사람’. 백천은 새삼 그쪽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예전에는 청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내세우며 제 뜻을 전한다 여겼지만, 최근 들어 알게 되었다. 청명이 ‘누군가’를 칭할 때 나오는 말에는 현기가 가득하다는 것을. 심지어는 청명에게서 찾기 어려울 만큼 심유한 기운이 말이다.
“존경이라⋯⋯.”
그가 중얼거리니 말없이 달리던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니, 아니다.”
“싱겁기는.”
청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관심을 끊자 백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언젠가는⋯⋯.’
그리고 힘껏 땅을 박찼다. 그의 안에 생겨난 수많은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꽉 움켜쥐며 말이다.
❀ ❀ ❀
“없군.”
나직한 말에 유공이 움찔했다. 당황하여 다급히 주변을 살피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삐걱대며 뒤를 돌아보니 무덤덤한 호가명의 얼굴이 보였다. 허공에서 눈길이 마주치자 호가명이 물었다.
“그렇지?”
유공의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호가명의 말이 맞았다. 문파의 표식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데도 흔적조차 없었다.
혹시 지나온 표식을 잘못 해석해 방향을 잘못 잡았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호가명은 이미 해남의 표식을 완전히 파악했다. 유공과 호가명이 동시에 틀린 답을 내놨을 리는 없다.
“표식이 끊겼다는 건, 후미가 완전히 합류했다는 거로군.”
“아,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주면?”
호가명이 담담히 되물었다.
“찾아낼 수 있다는 건가?”
유공은 차마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호가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동시에 유공 역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의 호가명에게 유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운 건 해남과 천우맹 무리가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인 까닭에 대한 고민이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는 거로군.’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갑자기 합류할 이유가 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떻게 저들이 추적을 알아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유공이야 최선을 다해 아등바등 추적하고 있다지만, 호가명의 입장에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편에 가까웠으니까.
별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벌써 알아챘을 리가 없는데.
“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호가명이 슬쩍 시선을 돌려 유공을 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지?”
“⋯⋯예?”
“저들이 왜 더는 표식을 남기지 않게 된 것 같나?”
“그걸 제가 어떻게⋯⋯.”
호가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새삼 궁금해졌거든.”
“⋯⋯무슨?”
그의 입꼬리는 명백한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스스로 발톱을 뽑고 개가 되지 않았나. 그런데도 다른 늑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
“하지만 헛수고였던 것 같군. 그래. 개는 개일 뿐이지.”
유공은 모멸감과 초조함에 입술을 짓깨물었다. 호가명은 그 모습을 보며 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해졌군. 네 역할은 끝났다.”
사실 호가명은 특별한 의미를 싣지 않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저 상황을 정리하는 말이었을 뿐.
하지만 유공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개와 사냥, 그리고 끝이라는 세 단어가 조합된 순간 머리에 떠오른 것은 ‘토사구팽’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러니 뒤로 빠⋯⋯.”
“무, 무언가! 무언가!”
뒤로 빠지라고 말하려던 호가명이 입을 다물고 유공을 바라보았다. 유공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혹시 말이 끊기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는 듯 말을 우르르 쏟아 내었다.
“무, 무언가 숨기고 싶은 것이 있을 겁니다!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훗날 누군가라도 그 흔적을 발견해서는 안 되는 그런 것 말입니다!”
“⋯⋯.”
“인위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싶은 겁니다. 그게 뭐든! 뭔가 숨겨야 하고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게 있으니까, 자신들을 감추고 싶은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그러니까 그게⋯⋯.”
두서없는 중언부언이었지만 호가명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감추고 싶은 것이라.”
의미심장한 빛이 그의 눈에 떠올랐다.
“일리가 있군.”
따악!
호가명이 손가락을 튀기자 부관들이 잽싸게 좌우로 다가왔다.
“근처를 뒤져 봐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무엇이든 눈에 띄는 게 있으면 보고하도록. 시간은 일각. 그 이상은 낭비하지 않는다.”
“예, 군사!”
호가명의 명령이 떨어지자 부관들이 만인방도들을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또옥.
유공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턱 끝에 고여 방울방울 떨어졌다. 초조함이 온몸을 갉아먹는 듯했다.
그 땀이 채 식기 전에 흩어졌던 이들 중 몇몇이 되돌아왔다.
“북서로 십 리쯤에 작은 촌락이 하나 있습니다.”
“촌락?”
“예!”
호가명은 잠깐 턱을 매만지며 되뇌었다.
“촌락이라⋯⋯.”
그 촌락이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던 곳이라고?
그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만일 쫓고 있는 게 다른 존재였다면 당연히 무시했을 정보다. 하지만⋯⋯.
유공을 빤히 바라보던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한다.”
가 보면 알 것이다. 과연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