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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64화 (1,365/1,567)

1364화. 역시 마음이 넓으시다니까. (4)

백천의 시선이 저 먼 곳으로 향했다. 모두가 이미 보이지 않도록 집 뒤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보답 같은 걸 바랐던 건 아니다.

가진 곡식을 무상으로 내어 달라고 한 게 아니잖은가?

그저 정당한 대가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곡식을 살 기회를 원했을 뿐이다.

그게 정말로 그리 과한 것이었을까?

백천은 저도 모르게 윤종을 돌아보았다. 도사로서 가야 할 길을 잃을 때마다 그 기준이 되어 주는 사람이 바로 윤종이다. 하지만 윤종의 표정 역시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백천이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도 단순히 그의 속이 좁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죄송합니다⋯⋯.”

형욱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창피함과 죄스러움에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이런 이를 탓해 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백천은 결국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그렇게도 어려운 부탁인 줄은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협객님.”

형욱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려운 부탁일 리 없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물론 형 노인의 말대로, 이들을 돕고 나면 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마을 사람들을 돕고 나서지 않았던가.

강하다 해서 돕는 게 당연한 것도 아니고, 약하다 해서 외면하는 게 당연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치를 슬슬 살피던 이들도 결국에는 돕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해 버렸으니까.

이미 베풀어진 은혜보다는 형 노인이 말한 앞으로의 위험이 훨씬 더 크게 와닿은 것이다.

“뭐라⋯⋯ 뭐라 드릴 말씀이⋯⋯.”

형욱이 어물어물 말하고 있는데, 집 안에 있던 형 노인이 다시 조심스레 나왔다. 백천의 눈치를 살핀 그는 고개를 조아렸다. 승리감도, 우쭐함도 전혀 없었다. 그저 백천의 심사가 뒤틀리지 않았기만을 비는 표정이었다.

“무사님들⋯⋯.”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 떨림의 의미를 이해한 백천이 헛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비록 목소리에 어린 냉기만은 거두지 못했지만, 백천은 최대한 정중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저희는 수틀린다고 내키는 대로 살육을 저지르는 사파가 아닙니다. 저희가 험악하게 굴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사님들!”

황급히 감사의 인사를 전한 형 노인은 다시금 슬쩍 백천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무슨 의미요?”

“무사님들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을 거란 사실을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백천이 말없이 형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지친 얼굴에 처연함이 깃들었다.

“무사님들이 말씀하시는 협의라는 것도 힘이 있는 사람이나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당장 먹고살 길부터 막막한 이들이 무슨 수로 남의 사정을 신경 쓰고, 남의 살길을 열어 주겠습니까? 당장 나부터가 급한데.”

백천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이 말만은 참기가 어려워서였다.

천우맹 일행이라 해서 여유가 남아돌아 이들을 도운 게 아니다. 협의라는 건⋯⋯.

“저희 같은 무지렁이는 그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나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보아 온 것이 그런 것이고, 살아온 세상이 그렇습니다.”

참지 못한 백천이 결국 한마디 하려 할 때였다.

“가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청명이 뒷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나도 급했던 모양이야. 생각이 없었네. 여기도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미리 고려했어야 했는데. 쯧. 나도 다됐네. 늙으면 죽어야지.”

“청명아⋯⋯.”

“가자. 눈에 띄지 말고 빨리 가 달라고 했으니 얼른 가야지. 그게 서로 속이 편할 거다.”

백천은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평소라면 이럴 때 가장 길길이 날뛰었을 청명이 놈이 저리 말해 버리니 그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보아하니 대충 밥도 다 먹은 것 같고⋯⋯.”

청명이 슬쩍 해남 사람들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배 채웠으면 출발해야지. 사실 우리가 시간이 많은 건 아니잖아.”

“⋯⋯그렇지.”

“얼른 준비하라고 해. 우리가 가고 나면 이 사람들도 할 게 많을 테니까.”

백천은 여전히 할 말이 많았지만,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속이 쓰라렸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드신 곡식 값은 굳이 치르지⋯⋯.”

“아닙니다.”

백천이 형 노인을 단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값은 정확히 쳐드리겠습니다. 그래야 할 테니까요.”

감정 없는 그 목소리가 어쩐지 조금 안타깝게 들렸다.

백천을 필두로 한 이들이 마을을 나섰다.

예전에 이 마을을 나서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는 사정을 잘 모르는 해남의 제자들도 이 분위기까지 모를 수 없으니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나옵니까?”

그런 상황에서 당차게도 입을 연 사람이 있었으니, 임소병이었다.

“그럼요?”

“어차피 결과만 같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곡식이 남아도는데, 적당히 빼앗고 돈을 던져 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순순히 거래한 것과 결과는 똑같으니 말입니다.”

“⋯⋯.”

“그리고 그러면 저들 역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한테 곡식을 강탈당한 것뿐이니 죄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누가 봐도 그게 합리적인데, 지금이라도 돌아가십시다!”

백천이 피식 웃고 말았다. 확실히 그게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피해받지 않는 길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들은 그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결과만 같으면 뭐든 괜찮다고 해 버린다면 그들 스스로 지금 싸우고 있는 사패련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말이 돼 버리니까.

“아오!”

그때 조걸이 버럭 고함을 지른다.

그 역시 임소병의 말대로 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터지는 울화를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

“우리는 뭐 힘이 남아돌아서 도왔습니까? 은혜는 갚지 않더라도 최소한 사정 정도는 봐줄 수 있는 거잖습니까?”

“됐다.”

“전에는 순진한 눈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니! 이제는 가는 순간까지 코빼기도 안 내밉니다! 아마 저런 양반들이 무인이 되면 사파가⋯⋯.”

“그만하래도.”

백천이 힘없이 짧게 일갈하자 조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억울해서 그럽니다, 억울해서.”

“⋯⋯.”

“보답 같은 건 바라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런 게 있잖습니까. 그래도⋯⋯.”

백천이 뭔가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사실 그의 속내도 조걸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이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길게 말해 봐야 속내만 드러날 뿐이다.

백천이 제대로 대답하질 않으니 이번엔 조걸의 시선이 윤종에게로 향했다.

“안 그렇냐고요, 사형!”

그 말에 백천도 윤종을 바라보았다.

윤종이라면 다른 말을 해 줄지도 모른다.

“사형은 화 안 나십니까?”

“화⋯⋯.”

조걸의 물음에 윤종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나는 게 아니다.”

“⋯⋯뭔 생불도 아니고.”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나는 그저 혼란스럽구나.”

“예?”

조걸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윤종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도인으로서, 그리고 정파인으로서 양민을 돕고 지켜야 하는 것은 그들 안에 선함이 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힘 있는 이들에게 핍박받고 사는 선량한 이들이니 우리가 작은 힘이나마 내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

“⋯⋯.”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비단 꼭 저 마을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서든 말이다.”

“예.”

“우리가 지키려 할 이들이 선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째서 목숨까지 걸어 가며 저들을 지키려 애써야 하는 것일까? 그저 우리가 더 강하기 때문에?”

“⋯⋯.”

“협행에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 어쩌면 그 보답을 받을 길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그래, 그런 생각이 든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내용은 더없이 무거웠다. 윤종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더욱. 모두가 저마다 생각에 잠긴 그때였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가장 앞에서 미련 하나 없다는 듯 걸어가고 있는 놈에게로 말이다.

“양민들은 생각만큼 선하지도 않고, 생각만큼 대단하지도 않다. 그들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미력하고, 그들이 논하는 도리는 대체로 하잘것없다.”

“⋯⋯거의 욕 아니야?”

“하지만 그게 바로 양민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가만 듣고 있던 화산 제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리도 하잘것없는 이들이라면 어째서 지켜야 한단 말인가.

“그들 역시 선인이 될 수 있었던 이들이니까.”

“⋯⋯.”

“그 노인의 말이 틀린 게 아니야.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선을 지킬 여유조차 얻지 못하지. 그렇게 된 건 힘이 있는 이들이 그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야.”

윤종은 걸어가며 말하는 청명의 뒷모습을 굳은 얼굴로 물끄러미 보았다.

“선한 이들은 도움을 받지 않아도 선하다. 하지만 선하지 않은 이들에게 베푼 작은 선행이 어쩌면 그들을 선으로 이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인이란 그 작은 가능성을 놓지 않은 이들이고, 협행이란 스스로 가진 것을 베풀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중얼거리던 청명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멀리 있는 무언가를 좇듯이.

“솔직히 나도 아직은 그 말을 다 이해한 건 아니야. 그냥 아는 건 하나야. 선대들은 몰라서 베푼 게 아니라, 알고도 지키려 했다는 것.”

청명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더 이상 무어라 잇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고도, 그게 옳은 길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들은 말을 전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모두는 각자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 말이다.

그때였다.

“자, 잠시만요! 협객님들!”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욱이 어깨에 무언가를 짊어지고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전력으로 달려와 그들 앞에 선 형욱은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백천이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였다.

“아니, 왜⋯⋯?”

“이, 이거요!”

형욱이 제 어깨에 짊어진 커다란 자루를 내려놓았다. 쿵 소리가 났다.

“곡식입니다. 가져가십시오.”

“예?”

형욱의 얼굴엔 여전히 죄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이야 그러지 않기로 했지만, 이건 제 몫입니다. 제가 제 몫을 내어 준다는데 뭘 어쩌겠습니까?”

“아, 아니⋯⋯.”

백천은 당황하여 곡식 자루와 형욱을 번갈아 보았다.

“이건 저희가 받을 수⋯⋯.”

“받아 주십시오!”

형욱은 더 듣지도 않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아버지와 비슷한 듯도 했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제가 미력해서 이것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이거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

“마을 사람들도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들 그저⋯⋯. 그저 겁이 많을 뿐입니다. 너무 나쁘게만 보지는 말아 주십시오.”

“형장(兄丈)⋯⋯.”

“하잘것없지만, 이거라도 가져가십시오.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백천은 복잡한 기분으로 곡식 자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값싼 곡식이고, 아마 이 많은 이들에겐 겨우 한 줌씩 돌아갈 양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하찮지 않다.

말없이 곡식 자루를 보던 백천이 이내 양손을 모아 포권 했다. 그리고 더없이 정중하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포권 하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가야 할 길은 멀고, 시간은 촉박하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모두는 한동안 백천과 형욱 사이에 놓인 자루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낡고 해진 자루 안에 든, 하찮지만 가장 귀한 곡식 몇 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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