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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63화 (1,364/1,567)

1363화. 역시 마음이 넓으시다니까. (3)

협의를 행함에 있어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된다. 이는 협객행을 하는 이들의 철칙이다.

보답을 바라는 순간, 협행이 아니라 거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천 역시 스스로 행한 일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설사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수많은 것을 잃어 가며 한 일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사정은 알겠습니다.”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어떻게든 억누르며 말이다.

“하지만, 촌장님. 저희 역시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저희를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패련의 추적을 피하는 입장에서 곡기까지 끊어야 한다면 목숨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평소의 백천이었다면 이토록 구구절절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어려움을 알려 동정을 사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알고 싶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베풀었던 선의가 과연 어떻게 돌아오는지. 그들의 협행이 과연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만들고 있는지 말이다.

“협객님⋯⋯.”

하지만 형 노인에게는 그런 백천의 마음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희 같은 무지렁이가 어찌 협객님들의 사정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하루하루 어떻게든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부디 저희를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형 노인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찌하겠는가?

강자가 힘을 앞세워 내리누른다면 저항이라도 해 볼 것이다. 하지만 약한 자가 사정을 내세우며 이해를 바란다는데 대체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옆에서 숨만 죽이고 있던 조걸이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강탈해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사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몇 배는 쳐준다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야 적당히 큰 마을로 내려가 그 돈으로 곡식을 더 구해 오면 그만이⋯⋯!”

“걸아.”

“사숙, 좀 너무하잖습니까? 뭐 그렇게 대단히 위험한 일도 아닌데!”

“그만해라!”

백천이 조걸을 향해 단호하게 소리쳤다. 조걸은 입을 다물면서도 영 불만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부탁드립니다, 협객님들.”

형 노인이 굽신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협객님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일일지 모르지만,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은 그런 일 하나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산에 사는 범에게는 한낮에 잠을 자는 게 별일 아닐지 모르지만, 토끼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조걸이 다시 반박하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그의 얼굴 앞에 조용히 드리워졌다. 반사적으로 획 걷어내려던 조걸은 멈칫했다. 그의 입을 막은 게 다름 아닌 윤종이었기 때문이다.

윤종이 가만히 노인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촌장님. 촌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 역시 이 마을 사람들을 도울 때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말에 형 노인도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닫았다.

“이 강남에 굳이 발을 들이고 사패련의 악적을 처단한다는 건 생각처럼 간단한 일도, 쉽사리 결정할 만한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협객님⋯⋯.”

윤종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형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저희는 베풀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것만을 내어 달라 간청드리는 겁니다. 그래도 정말 안 되겠습니까?”

“아버님!”

형욱이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치자 형 노인이 형형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형욱에게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낸 노인은 다시 백천과 그 일행을 바라보았다. 형욱을 쏘아보던 눈빛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느슨하게 풀리며 어색함과 민망함이 깃들었다.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무사님들⋯⋯. 무사님들을 도와드렸다가 저희가 혹시 횡액이라도 당한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윤종은 순간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형 노인을 보았다.

항상 양민들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윤종조차도 이 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노인은 쐐기를 박았다.

“부디 저희의 입장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받은 은혜는 하해와 같습니다만⋯⋯ 저희는 부끄럽게도 그 은혜를 갚을 힘이 없는 어리석은 이들일 뿐입니다. 겨우 땅이나 파먹고 살아가고, 사파의 악적들이 주는 곡식으로 연명하는 이들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그 말씀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형 노인의 비굴할 정도로 낮은 자세가 오히려 앞에 앉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들이 힘없는 이들을 핍박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백천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결국, 곡식은 바라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게⋯⋯.”

형 노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딱히 부인하는 말은 나오질 않았다. 백천도 굳이 말을 잇기를 더 요구하지 않았다. 서로의 입장이 이리 확고하니 설득 따위는 무의미했다.

그리고 사실 설득할 수도 없다.

칼 든 이들이 좋은 말로 타이른다 한들 그게 좋은 말로만 들릴 수 있겠는가? 처음 꺼냈던 제안이 거부된 순간, 이미 천우맹과 해남 일행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정파의 길을 걷는다고 자신하는 이들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형 노인은 여전히 송구스러운 듯 눈치를 살피고, 그 옆의 형욱은 입술을 짓깨물고 있었다.

이 둘을 가만 바라보던 백천은 제 뒤에 앉은 이들을 돌아보았다.

대부분은 망연함과 억울함을 숨기지 못했다. 특히 당패와 남궁도위, 설소백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반면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냉소하는 임소병과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만 유지하는 청명.

백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

“자, 잠시만요!”

그 순간 형욱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형 노인이 다시 예의 그 눈빛으로 만류하고 압박하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형욱도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또 무슨⋯⋯.”

“이분들께 은혜를 입었던 건 다름 아닌 마을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선 그래 봐야 의식을 잃고 있었을 뿐이 아닙니까? 이분들이 얼마나 마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지는 보지 못하셨습니다.”

노인이 희끗한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건 우리끼리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물어봐야지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그들의 선택에 맡겨야 합니다. 아무리 아버님이 형가촌의 촌장이라 하지만, 모든 걸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되겠느냐?”

“예! 그럼 저도 승복하겠습니다.”

형욱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백천과 그 일행을 향해 말했다.

“협객님들! 제가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의견을 묻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백천이 뒤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들도 딱히 이견이 없는지 멀뚱히 백천만 바라보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다.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예! 그럼 잠시만⋯⋯!”

형욱이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갔다. 벌컥 열린 문을 빤히 바라보던 백천의 귓가에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사님들.”

“⋯⋯예?”

“그 전에 한 가지⋯⋯.”

형 노인이었다. 얼굴에 다시 송구한 표정이 한껏 어려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백천이 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선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래야 공정하다는 형 노인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여러분들께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저희는 여러분께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화산 장문대리인 저와⋯⋯.”

백천이 고개를 돌리자 금양백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도 모르고 이렇게 경극을 하듯 모두의 앞에서 황당한 말을 꺼내면서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해남의 장문인인 저 금양백의 이름으로 보증하겠소.”

금양백까지 엄숙하게 선언하고 나니 마을 사람들이 격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에! 예에! 여러분들 덕분에 저희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까? 목숨을 구해 주신 분들께 어찌 그런 무도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예에! 그럽지요. 그건 은혜도 모르는 짐승이나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사패련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직접 봤던 마을 사람들은 촌장에 비해 확실히 호의적이었다.

“이제 됐지요?”

형욱이 슬쩍 형 노인을 보며 묻자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논의는 저 뒤쪽에서 하거라.”

“예. 그럼 이쪽으로.”

형욱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집 뒤쪽으로 향했다. 혹시나 목소리가 들릴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생각보다 꽤 먼 곳까지 옮겨 가는 모습이었다.

형 노인마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상황을 지켜보던 조걸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겠지요?”

“아마도.”

“그렇죠. 저 영감님은 우리가 저 사람들을 구할 때 의식이 없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다르겠죠.”

백천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확신이 있는 대답이라기보단 순수한 바람이었고, 백천이 저들에게 건 마지막 기대였다.

하지만 그때, 조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우리 도사님들께서는 산에 너무 오래 사셨나 봅니다.”

임소병이었다. 그는 옅은 비웃음을 흘리며 백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를 품으면 결국 남는 건 실망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압니다만⋯⋯.”

“아니요. 도사님들은 모릅니다.”

“⋯⋯예?”

임소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화산이 수많은 사람에게 화제가 되었는지. 그리고 여전히 구파에는 비견할 수 없는 전력임에도 어째서 수많은 문파의 눈을 잡아끌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그야⋯⋯.”

“아마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때 마침 임소병의 말에 부연이라도 하듯, 예상보다 빠르게 형욱이 돌아왔다.

논의가 길어지지 않고 이렇게 빨리 돌아온다는 건, 마을 사람 대부분의 의견이 같았다는 뜻이리라.

‘그럼?’

어쩌면 좋은 소식일지 모른다고 기대를 품은 찰나, 백천은 보고 말았다.

다가오는 형욱의 표정에 어린 착잡함을. 그리고 발걸음에 어린 무거움을.

백천과 시선이 마주친 형욱이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웃음기 어린 임소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곤경에 처한 자에게는 선의를 베푼다. 은혜를 입으면 갚는다.”

“⋯⋯.”

“그 당연한 것들을 지키는 이들이 없으니 화산이라는 이름이 특별해진 겁니다.”

그 말에 대해 백천이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형욱이 다가와 섰다. 그리고 긴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협객님.”

백천의 어깨가 절로 툭 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협객님들께서 곡식을 두고 떠나시길⋯⋯. 예, 그러시길 원한다고⋯⋯.”

우득.

백천이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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