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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62화 (1,363/1,567)

1362화. 역시 마음이 넓으시다니까. (2)

딸깍. 딸깍.

꿀꺽.

딸깍. 딸깍. 딸깍. 딸깍.

⋯⋯꿀꺽.

덜컥! 덜컥! 덜컥!

“그⋯⋯.”

커다란 솥 앞에 앉아 있던 촌부가 못 견디고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손에 숟가락과 빈 그릇을 든 이들이 하나같이 침을 질질 흘리고 군침을 삼키며 서 있었다.

“뜸이 좀 더 들어야⋯⋯.”

“뜸 안 들어도 먹을 수 있는데⋯⋯.”

“그래도 그, 밥이라는 게 뜸이⋯⋯.”

“생쌀도 먹을 수 있는데.”

촌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크흠.”

그 상황을 지켜보던 금양백이 무안한 얼굴로 헛기침했다.

“그⋯⋯ 지금 먹으면 안 되는 것이오?”

“먹을 수 있기는 합니다만, 오랫동안 곡기를 접하지 못하셨으면, 자칫 설익은 걸 먹었다가 탈이 날 수도⋯⋯.”

“우리 애들은 무인이라 괜찮을 것도 같소만.”

이렇게까지 말하니 촌부도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그러시다면⋯⋯. 그럼 그릇을 이리 주⋯⋯.”

“먹어도 된단다!”

“비켜!”

“내가 앞에 섰잖아요! 뒤로 가십시오!”

“아악, 누구야! 내 얼굴 잡은 놈!”

해남의 제자들이 아귀처럼 솥을 향해 달려들었다. 뚜껑을 열어젖힌 솥에서 새하얀 증기가 어마어마하게 뿜어졌지만, 해남의 제자들은 그 열기에도 물러나기는커녕 더욱 거친 기세로 돌진해 그릇째로 밥을 퍼 댔다.

“아, 아이고, 이게 뭔⋯⋯.”

반쯤 내동댕이쳐진 촌부는 눈을 끔뻑이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남해에서 오신 귀한 손님이라고 하더니, 이건 숫제 개방 놈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아니, 그 개방 놈들도 이 꼴을 봤으면 엉덩이를 슬슬 뺐을 것이다.

“아악! 밀지 말라고 했잖아!”

“비키십시오!”

“아니, 이거 누가 다 퍼 갔어! 죽고 싶냐!”

그 뭐라 말할 수 없는 처참한 광경 앞에 촌부가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지금 솥을 여러 개 걸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그러네! 저거 먹으면 되겠네!”

“예?”

해남의 제자들이 이내 다른 솥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장작불이 솥 아래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이미 지옥불 따위는 따뜻한 벽난로 쯤으로 취급할 수 있게 된 이들에게 그 딴 불은 장애가 되지 못했다.

펄펄 끓는 솥의 뚜껑이 연이어 열리며 새하얀 김이 마을 가득 피어올랐다.

마치 산적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모양새였다.

그 꼴을 지켜보던 형욱이 멍하니 백천을 돌아보았다. 백천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어색한 헛기침을 흘렸다.

“⋯⋯좀 많이 굶어서⋯⋯.”

“⋯⋯.”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원래는 저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

백천이 붉어진 얼굴을 겸연쩍게 쓸었다. 저 해남 놈들이 이리도 빨리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질 줄은 그도 몰랐다.

밥을 퍼 온 이들은 마땅한 자리를 찾을 것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크으.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한동안 간도 안 된 고기밖에 못 먹었더니 정말 뒈지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곡기를 먹고 살아야지!”

“⋯⋯생선구이 하나만 있으면 딱인데.”

“어디서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어? 너는 처먹지 마!”

“아니! 누가 배부른 소리를 했다는 겁니까! 제 밥 돌려주십시오!”

그 꼴을 지켜보던 이자양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래도 바닥에 앉는 건 아니지.’

대 해남파의 제자들이 이런 촌락 바닥에 주저앉아 거의 손으로 밥을 퍼먹어 대는 꼴이라니. 이걸 누가 볼까 겁이⋯⋯.

“자양 사형. 이거 안 드시면 제가 먹어도⋯⋯.”

“내 밥에 손대지 마라! 손모가지 날아가니까!”

“⋯⋯.”

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자양은 사제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헛기침했다.

⋯⋯창피한 건 창피한 거고 배고픈 건 배고픈 거지.

어색하게 밥그릇을 집어 들고 먹으려는데 여전히 밥을 푸지 않은 곽환소가 눈에 들어왔다.

“사형, 식사 좀 하십시오.”

“음. 나는 조금 이따가 먹으마.”

“이따가요? 그때까지 사형 밥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자양이 톡 쏘자 곽환소가 피식 웃었다.

곽환소의 시선은 제일 구석에 놓인 솥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를 알아챈 이자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건 밥을 짓는 게 아니라, 부상자들에게 먹일 미음을 끓이고 있는 솥이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사형부터 일단 먹고 힘을 내야 부상자들도 치료하는 거죠.”

“안다. 꼭 챙겨 먹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자양의 표정이 어쩐지 떨떠름해졌다.

‘나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해남의 모습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곽환소는 그 와중에도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는 부상자들을 챙기고 있었다.

심지어 장문인마저도 신경을 쓰지 못했던 이들을 말이다.

이제는 그와 곽환소 중 누가 더 큰 그릇인지 굳이 따져 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사형! 이것 좀 드셔 보십시오.”

“밥이 좀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마을 분들이 내어 준 것인데, 적당히 요기하기 좋습니다.”

“그게 대체 뭔 소리야! 제대로 식사하셔야지!”

“아, 아니. 사형이 안 드신다고 하니까요⋯⋯. 식사는 또 하시면 되니까⋯⋯.”

다른 해남의 제자들도 대사형이 밥을 먹고 있지 않다는 말에 들고 있던 밥그릇을 내려놓고 왁자지껄 곽환소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 식사부터 마저 하거라.”

“대사형이 안 드시는데 저희가 어떻게⋯⋯.”

“나는 걱정하지 마라. 아직 여력이 있다.”

“그래도⋯⋯.”

단순히 그의 직위가 대사형이기 때문이 아니다. 불경스러운 생각이지만, 이 상황에서 해남 장문인 금양백이 같은 일을 했다 해도 지금 같은 반응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난을 헤치며 이곳까지 왔고, 이제는 다들 아는 것이다. 곽환소가 얼마나 그들을 생각하는지, 그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히 곽환소를 걱정하고 위하는 것이다.

곽환소는 몰려든 이들을 보며 웃었다.

“거, 눈치 없기는. 지금 밥을 먹으면 거친 잡곡이나 먹어야 하지 않느냐?”

“예?”

“환자 놈들이 먹을 걸 같이 먹으면 고운 흰 쌀을 먹을 수 있으니 이득이지.”

“아니, 그런 생각이었습니까?”

“와⋯⋯. 이게 대사형이구나.”

곽환소의 농에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그러니까 다들 먹던 거나 마저 먹거라. 천우맹 분들도 좀 챙겨 드리고.”

“예. 그러겠습니다, 사형.”

❀ ❀ ❀

마당 상황을 살피고 촌장의 집으로 들어온 백천은 제 앞에 앉은 형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은 백천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우선⋯⋯ 쇤네, 의식이 없이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저 같은 무지렁이를 구해 주시고, 치료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괘념치 마십시오.”

백천이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 일은 그 일로 끝냈어야 했는데, 이리 염치없이 다시 얼굴을 들이밀게 되어 민망할 따름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크나큰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 합지요.”

형 노인이 백천을 향해 연신 굽신댔다.

형욱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친은 이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느낌이었다. 물론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은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내심에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형 노인이 백천을 대하는 태도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이라도 보는 듯했다. 과도한 굽신거림이 내심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때 이마를 땅에 짓찧기라도 할 듯 굽실거리던 형 노인이 슬그머니 백천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뗐다.

“저, 그런데⋯⋯ 곡식이⋯⋯ 필요하다 하셨습니까?”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과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 드리는 게 마땅한 도리이겠으나, 안타깝게도 지금 저희는 이곳에 길게 머무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그러니 가진 곡식을 베풀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백천이 깊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형 노인의 곁에 있던 형욱이 깜짝 놀라 만류했다.

“혀, 협객님, 왜 이러십니까! 곡식이야 당연히 드려야지요! 생명의 은인께 곡식을 나눠 드리는 데 무슨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부디 이러지 마십⋯⋯.”

“너는 가만히 있거라.”

하지만 형 노인이 슬쩍 형욱을 만류했다. 당황한 형욱이 말했다.

“아니, 아버님. 이건 당연히⋯⋯.”

“가만히 있으래도!”

형욱은 적잖이 당황하여 멍하니 형 노인을 응시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이 평소보다 단호하고 차가워 일단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 이 마을의 촌장은 아버지가 아닌가.

“크흠.”

형 노인은 순간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 작게 헛기침했다.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그⋯⋯.”

노인이 백천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바는 잘 알겠습니다. 저희도 사람인데 당연히 그리해 드려야겠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협객님도 아시다시피, 올해는 극심한 가뭄 때문에 농사짓던 것들이 다 말라 버려서 저희도 먹고살 길이 막막합니다. 곡식을 가져가 버리시면 저희가 겨울을 날 방법이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대가를 드리려는 겁니다. 저희가 곡식에 대한 값을 후하게 쳐드릴 테니, 가까운 형양에서 곡식을 사 오시면 될 겁니다.”

형 노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어 감사하다는 듯 말이다.

“은혜를 갚는 일인데 값까지 쳐주신다니 정말 감읍할 따름입니다.”

백천의 표정이 한층 어색해졌다.

사실 그는 이렇게 과한 예의가 익숙하지 않았다. 너무 과한 예는 되레 받는 이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게 어떤 말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때, 형 노인이 묘한 표정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다만, 협객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지금⋯⋯ 혹시 저 패악무도한 놈들에게 쫓기고 계시는 것인지요?”

백천은 살짝 고민하다 대답했다. 숨기려 해서 숨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형 노인이 절규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백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혹여나 저희가 곡식을 드렸다는 걸 그 무도한 놈들이 알게 된다면, 저희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아⋯⋯.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곳에 든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습니다. 그리고 돈이야 이름이 새겨진 것도 아니니⋯⋯.”

백천이 최대한 침착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형 노인은 그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재차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쿵!

“부탁드립니다!”

백천의 얼굴이 충격으로 슬쩍 일그러졌다. 노인의 읍소가 이어졌다.

“이 구차한 것들을 한번 살려 준다 생각하시고, 곡식은 다른 곳에서 가져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가까운 다른 마을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발⋯⋯.”

“⋯⋯.”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저희가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진다면, 저희는 모조리 죽습니다. 흔적이야 지울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이 입을 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백천이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형 노인이 한 발 더 빨랐다.

“부탁드립니다.”

주름진 눈가를 눈물로 적신 채 노인은 백천을 애절하게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백천은 몸에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노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지금 드신 곡식 값은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모두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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