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1화. 역시 마음이 넓으시다니까. (1)
“이쪽입니다.”
유공이 살짝 쉰 목소리로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저도 모르게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쪽입니다.’라고 말만 했을 뿐, 몸짓으로조차 방향을 가리키지 않았다. 하지만 호가명은 자연스레 옳은 방향을 향해 몸을 틀고 있었다.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표식을 완벽히 해석했다는 듯이 말이다.
유공은 이 상황이 말할 수 없이 껄끄러웠다.
오직 해남만이 알 수 있는 표식을 호가명이 이해한다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다.
아무리 해남의 검술을 매개로 한다고 해도, 그건 해석의 문제일 뿐이다. 반복해서 보다 보면 특정한 검흔과 그 검흔이 나타내는 방향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유공이 껄끄러움을 느끼는 까닭은, 그의 가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호가명이 해남의 표식을 완전히 해석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아무런 쓸모도 없을 테니.
그럼 그때의 호가명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호가명의 말에, 유공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쉽지 않았다.
“용도 폐기라도 될까 봐 걱정인가?”
호가명의 말이 유공의 폐부를 훅 찔렀다.
“그런 생각 할 필요 없다. 사람을 이용하다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 것은 오히려 사파가 아니라 정파 쪽이니까.”
유공이 움찔하며 다시 호가명의 눈치를 살폈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한 적이 없음에도 호가명은 그의 속을 완벽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파는 사람을 버리지 않지.”
“⋯⋯당신들이 말입니까?”
“당연한 이치다. 너희에게는 쓸모가 있는 인간과 쓸모없는 인간의 구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파에는 그런 구분이 없다. 어차피 절반 이상은 쓰레기니까.”
유공은 침묵했다. 대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러니 쓰레기라고 해도 나름의 노력만 보인다면 폐기할 이유가 없다. 그게 설령 정파의 배신자라고 할지라도 말이야.”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겁니까?”
유공이 묻자 호가명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이상한 반응이군.”
“⋯⋯.”
“배신을 선택한 건 다름 아닌 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
유공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그저 그 하나를 얻을 방법만 생각하면 되지 않나. 다른 거추장스러운 것들까지 일일이 고려하다가는 모든 걸 잃게 되는 법이지.”
호가명이 앞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네 할 일에나 집중하도록. 네 쓸모를 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알겠습니다.”
유공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박차를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예?”
파아아앗!
호가명이 날린 장공이 유공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장력은 그의 뺨에 길게 찢어진 상처를 남겼다.
후두둑.
붉은 피가 뺨을 타고 흘러 턱 끝에서 떨어졌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알아낸 게 있다면 숨기지 말고 보고해라. 예를 들면 저들의 방향이 미묘하게 뒤틀린 것을 보아 새로운 목적지를 정한 것 같다든가. 표식을 남기는 간격이 전보다 가까워진 것을 보니 이동하는 속도가 조금 느려진 것 같다든가.”
“⋯⋯.”
“너는 그저 알아낸 걸 보고하면 된다. 해석은 내 몫이지.”
유공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속도를 높여라.”
유공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를 본 호가명의 얼굴에 묘한 멸시와 비웃음이 스쳤다.
‘웃기지도 않는군.’
유공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배신자다.
처음에야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나선 것일지 모르지만, 이제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착실히 동료를 팔아넘기고 있다. 그런데도 마지막 양심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굴고 있다.
애초에 사문을 배반하고 동료를 팔아넘긴 순간, 양심의 존재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함에도 말이다.
유공의 등을 물끄러미 보던 호가명은 이내 그에 관한 관심을 지웠다. 어쨌거나 사냥개에 불과하다. 굳이 그 심리까지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중요한 건 놈들이지.’
적들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변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예상 범위 안이다. 그 말인즉, 그들이 해남의 표식을 해석하며 따라붙고 있다는 걸 아직은 눈치채지 못했다는 의미다.
‘아니, 설사 안다 해도 상관없다.’
이미 장일소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저들이 맞이해야 할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까. 호가명이 할 일은 그저 장일소의 손을 조금 더는 것뿐.
속도를 더 높이라고 전원에게 지시를 내린 호가명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 ❀ ❀
형가촌(邢家村)의 촌장인 형 노인이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그 광경을 같이 바라보던 형욱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 말에 형 노인은 물끄러미 형욱을 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형욱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슬슬 짐을 다시 풀자꾸나.”
“아버님. 아직⋯⋯.”
“아직도 미련을 가지는 게냐?”
형욱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따르겠다고 말하는 듯한 몸짓과 달리,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엔 여전히 미련이 묻어 있었다.
“아직 며칠 지나지 않았습니다. 강북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열흘이 아니라 한 달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거야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 이야기지. 한달음에 강을 넘고, 마음만 먹으면 산도 뛰어넘는다는 강호인들이 여기까지 오는 데 열흘 넘게 걸릴 리가 있겠느냐?”
“⋯⋯듣자 하니 저 강을 사패련 놈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강을 넘는 데도⋯⋯.”
“쯧쯧.”
형 노인이 다 듣기도 전에 작게 혀를 찼다. 이를 들은 형욱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왜 이리 미련스레 구느냐?”
“⋯⋯.”
“물론 나도 감사한 마음이야 있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나도 지금 산목숨이 아닐 테고, 이 마을 사람들도 횡액을 면할 수 없었겠지. 그 감사한 마음이야 어디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
형욱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구명지은이야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법 아닌가.
“하지만, 아들아.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
“⋯⋯.”
“그분들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들은 다시없을 선인이시지.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그렇단다.”
“그분들은 달랐습니다.”
노인은 형욱의 말에 다시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사람도 뱀굴에 토끼가 빠진 것을 보면 우선은 도와주겠지.”
“⋯⋯.”
“하지만 굳이 그 토끼를 쫓아다니며 다친 곳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먹고살 길을 열어 주지는 않는단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더냐?”
“그렇지만⋯⋯.”
“그런 분들에게 있어서 우리 같은 것들은 딱 그 토끼와도 같다. 눈앞에 보이면 선심을 써서 도울 수는 있지만, 굳이 시간을 들여 지키거나 도울 필요는 없는 무지렁이들이지.”
“아버님, 그분들은⋯⋯.”
“왜 자꾸 이해를 못 하느냐? 그분들이 나쁜 것이 아니래도. 그저 세상이 그런 법이지.”
“⋯⋯.”
“그러니 이제 그만하자꾸나. 마을 사람들도 쓸데없는 기대 때문에 제 할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곧 떠날지도 모르는 곳에서 정을 붙이며 살아간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다. 네 그 기대가 마을에는 독이 될 수도 있다.”
형욱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음으로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비는 형가촌의 촌장으로 수십 년을 지내왔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도, 어려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를 때에도,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러니 세상을 보는 눈도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깊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라면 응당 고개를 숙이고 승복했을 형욱도 이 일만은 쉽사리 양보할 수가 없었다.
“아버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압니다. 그리고 그게 이치에 맞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아버님. 그분들은 정말 뭔가 달랐습니다. 저는⋯⋯.”
형욱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강북으로 옮겨 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던 그분들의 말을 아직도 믿고만 싶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반드시 뭔가 있을 겁니다.”
“음.”
형 노인이 제 아들을 향해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누구나 저런 기대를 할 때가 있다. 어려운 이들을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들으며 선망을 품는 때가.
그 역시 형욱이 어릴 때는 전설로나 전해지는 협객들의 이야기를 해 주며 너 역시 그렇게 훌륭하게 자라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도 크지 않은가.
‘결국은 독인 것을⋯⋯.’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 이들이 정말로 흔했다면⋯⋯. 아니, 최소 몇이라도 있었다면 세상이 이리 험난했을 리 없다.
하지만 형 노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기대를 버리고 나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남는 건 지독한 사패련의 치세 아래 숨죽인 채 살아갈 나날들뿐이다.
현실이 괴로워 꿈이라도 좇아 보는 사람들에게 그 꿈은 하잘것없다고 말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결국 체념하고 현실을 인정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리 무한정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이제 슬슬⋯⋯.”
바로 그때였다.
“초, 촌장님! 이보게, 형욱이!”
별안간 집 문이 벌컥 열리며 장정 하나가 다급하게 들어섰다.
“뭐, 뭔 일인가?”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는가?”
“그, 그분들이 오셨네! 그분들이!”
“그분들이라니?”
“아니, 그⋯⋯.”
안으로 들어온 이는 너무 놀라서 말이 잘 이어지지 않는 듯 더듬대다가 답답했는지 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아, 그 있지 않은가! 자네가 기다리던!”
“기다려? 나는 강북에서 올 분들을⋯⋯.”
“그래! 그분들을 부른 분들!”
어째 말이 멋대로 꼬여 나왔지만 형욱은 이 말의 의미를 즉각 이해했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협객 분들이 다시 오셨다고 말하는 건가?”
“그렇지! 그렇지!”
“그분들이 왜?”
“지금 앞에 와 계시네!”
“응?”
형욱이 영문을 모르고 눈만 껌뻑이자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분들이 다시 오셨다니까! 앞에서 자네를 찾고 계시네! 뭐 하고 섰는가? 빨리 나가 보지 않고!”
갑갑함을 못 이긴 사내가 형욱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그분들이 오셨다고?”
“그렇다니까!”
“비키게!”
퍼뜩 정신을 차린 형욱이 사내를 밀치고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마을 입구까지 달려가니 과연 몇몇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
순간 바로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처음 봤을 때와는 그 행색이 너무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는 영웅적인 기상이 느껴지는 정갈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악전고투를 치른 듯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처음 보았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여어.”
훤칠한 사내 옆에 서 있던 조금 작은 사내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여, 영웅님들!”
형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버지가 한 말이 틀렸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리 다시 찾아온 것이 아닌가?
“죄송한데, 혹시 밥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뜬금없는 그 말에 형욱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히 드려야지요! 안으로 드십시오. 지금 당장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정말요?”
“물론이지요. 누가 구해 주신 목숨인데 곡식 따위를 아끼겠습니까?”
“그게⋯⋯ 입이 좀 많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당연합니다!”
“진짜 좀 많은데.”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형욱이 재차 대답하자 조금 작은 사내, 청명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답니다! 다들 나와 봐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쪽 숲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쭈뼛쭈뼛 다가오는 장정들은 얼핏 보이는 사람만 대충 헤아려도 물경 백이 넘어 보였다. 형욱의 입이 저도 모르게 헤 벌어졌다.
“⋯⋯괜찮죠?”
“⋯⋯.”
“크으. 역시 마음이 넓으시다니까. 잘 먹을게요.”
형욱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청명의 얼굴이 참⋯⋯ 더럽게도 얄밉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