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0화. 놈이 오고 있다는 거로군. (5)
“동쪽?”
“그래.”
백천이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나?”
“구강으로 돌입하는 건 자살행위니까. 장강에 닿지도 못하고 죽을 거야.”
“음⋯⋯.”
백천이 동조하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지금 구강은 말 그대로 용담호혈. 천우맹과 구파일방에 맞서 사패련의 총력이 집중된 사지 중의 사지다.
그런 곳을 이 인원만으로 돌진해 뚫는다?
‘차라리 칼을 물고 엎어지는 게 곱게 죽는 길이지.’
용기와 만용은 다르다. 심지어 그건 만용을 넘어 객기에 가깝다. 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걸고 객기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럼 좌측도 있잖아. 적당한 때 방향을 틀어 악양 쪽을 노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좌측이 오히려 장강의 폭도 좁아서 도강을 노리기에도 좋고.”
“호오?”
청명이 새삼 놀랍다는 눈길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동룡이 주제에 꽤 좋은 생각을 했는데?’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에 백천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내가 사숙이야, 이 새끼야!”
“그래, 그래. 대단하시네, 사숙.”
청명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은 틀리지 않았지만, 한 가지를 더 고려해야지.”
“뭘?”
“그쪽으로 향하면 사패련 놈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알기 쉬워져.”
“동쪽은 다르다는 거냐?”
“그래. 흑귀보가 괴멸되면서 동쪽의 정보망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으니까.”
“아⋯⋯.”
백천은 그제야 청명의 말을 이해한 듯했다.
사파가 사패련의 이름으로 통합되기 전, 강남은 네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강남의 남부를 지배하는 만인방과 동부를 지배하는 흑귀보, 그리고 서부를 지배하는 하오문과 장강 유역을 거머쥔 수로채.
그러니 조금 전 백천이 논했던 구강의 서부는 하오문이 꽉 잡고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움직임을 숨겨야 하는 입장에선 그보다 더 부담스러운 곳이 없다.
“물론 흑귀보도 하오문에 비해 만만하다 할 놈들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놈들은 대가리가 잘렸고, 팔다리도 부러졌지. 예전 같은 장악력을 보이기 어려워.”
“확실히⋯⋯.”
“그리고 그 망할 장일소 새끼는 동부의 상황을 안정시키기보다는 남을 전력을 모조리 끌어모으고 동부를 방치하는 쪽을 택했지. 그러니 지금 강남의 동쪽은 무주공산이라는 거다.”
숨죽여 듣고 있던 윤종이 슬쩍 입을 열었다.
“산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면 모를까, 결국 산을 내려가야 한다면 동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살아날 확률이 높다는 거네.”
“그래.”
청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방법은 없어. 선택할 방향은 동쪽뿐이다. 놈들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은 채 남경으로 간다.”
“남경이라⋯⋯.”
잠시 고민하던 백천이 물었다.
“장문인⋯⋯. 아니, 태상장문께는 이 사실을 전달했느냐?”
“서찰에 써 뒀어.”
“흠⋯⋯.”
백천의 눈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봐야 한다. 장강까지 도달하는 것은 어떻게든 알아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해남을 이끌고 장강을 도하하기 위해서는 천우맹의 도움이 무조건 필요했다.
약속되지 않은 다른 합류 지점을 전달할 방법이 없는 이상, 어떤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남경으로 향해야 한다.
“그럼 결정 났군. 보급을 끝내고 바로 남경으로 간다.”
“예, 사숙!”
“알겠습니다!”
확실한 목표가 정해지자 화산 제자들의 눈빛도 단호해졌다.
여전히 암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구강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에 비한다면 훨씬 수월한 목표다. 천운이 따라 준다면 남경에 도착할 때까지 종적을 들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럼 먼저 갑니다!”
“야, 몸도 다 낫지 않았는데!”
“좀 뛰어야 빨리 낫습니다! 하압!”
조걸이 앞으로 치고 나가자 윤종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따라붙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백천이 유이설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사매, 몸은 좀 괜찮으냐?”
“이제 달리는 건 문제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항상 주의하거라.”
“⋯⋯그러기 싫어도⋯⋯.”
유이설은 고개를 슬쩍 돌려 자신의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당소소를 흘끗 보았다. 당소소는 계속해서 두 눈으로 거의 불을 뿜고 있었다. 유이설의 얼굴이 드물게도 핼쑥해졌다.
“보시다시피⋯⋯.”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빠르게 가자.”
그가 땅을 박차고 나아갔다. 그 뒤를 따르려던 청명의 귓가에 문득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그렇게 수월하게 풀리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청명이 뒤를 돌아보니 부채로 얼굴을 반 남짓 가린 임소병이 묘하게 웃고 있었다. 청명은 퉁명스레 말했다.
“다 죽어 가더니 이제 좀 살 만한가 보지?”
“승패란 병가지상사 아니겠습니까? 얻어맞았다고 쓰러져만 있으면 또 얻어맞는 법이죠. 악착같이 일어나야⋯⋯!”
“⋯⋯좀 뒈져도 될 텐데.”
청명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사파 놈들은 어떨 때는 참 매가리 없다 싶다가도, 어떨 때는 잡초보다 더 끈질기다. 사파이길 거부하는 임소병이 누구보다 사파다운 기질을 보이니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때 임소병이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시겠지만, 도장.”
“⋯⋯.”
“그놈이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쯤이면 아무리 호가명이 악을 써도 놈이 상황을 모조리 파악한 후일 겁니다.”
청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패군 장일소다. 강남에 이만한 난리가 났는데, 아직도 상황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패군을 자처할 자격이 없다. 그런 요행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임소병의 말대로 장일소는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상황을 자신이 가장 유리한 쪽으로 이끌고 가려 하겠지.
‘놈이 오고 있다는 거로군.’
그의 뇌리에 광소를 터뜨리는 장일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라도 한번 본다면 평생 잊어버릴 수 없을 그 강렬한 모습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일소?”
“예.”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임소병이 부채 끄트머리로 제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호가명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 예상했지만 처발렸어?”
“그래서 대충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완전히는 알 수 없어도 방향은 알 수 있다는 거죠, 방향은!”
시무룩해진 임소병이 살짝 풀죽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방향은 맞췄는데, 끝까지 읽지 못한 것뿐이지만⋯⋯.”
“여하튼 그래서?”
“하지만 장일소만큼은 저도 도무지 읽어 낼 수가 없습니다. 수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방향 자체를 읽을 수 없다는 거죠.”
답답하다는 듯 말하던 임소병이 청명을 슬쩍 보더니 나직이 웃었다.
“하지만⋯⋯ 참 묘하게도 도장께서는 그 장일소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읽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결이 맞는다고 해야 하나⋯⋯.”
“그 주둥아리가 뭉개져도 계속 말을 할 수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하. 하⋯⋯. 농담입니다, 농담.”
청명이 이를 드러내자 임소병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뻔뻔스러운 미소만큼은 조금도 거두지 않았다.
“어쨌든, 도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 망할 놈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네네. 제가 호가명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방향은 대충 짐작하실 수 있으실 텐데?”
“⋯⋯.”
“중요한 일입니다. 어쩌면 모두의 목숨이 걸려 있을지도 모를 만큼.”
청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데 임소병이 굳이 한마디를 더 얹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지금 도장께서 패군이라면 어떻게 움직일지를 말해 주시면 됩니다.”
“⋯⋯일단 동쪽으로 움직인다.”
“이유는?”
“그래야 구파를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호오?”
“동쪽이면 어디든 좋아. 내가 장일소라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천우맹과 정면으로 격돌하는 걸 테니까.”
“⋯⋯천우맹과의 격돌을 피한다고요?”
“그래. 그렇게 되면 구파일방 놈들이 강 건너 불구경을 하며 어부지리를 취하게 되잖아.”
“하지만 그건 각개격파를 하겠단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각개격파는 움직이지 못하는 놈들을 따로 처리하는 거지, 끼어들지 않는 놈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야.”
“⋯⋯.”
“천우맹과 사패련이 상잔하게 되면 법정 그 늙은이는 반드시 사패련을 노리고 들어온다. 그럼 그때는 상황이 너무 일목요연해지지. 지금껏 방관하던 구파 놈들도 법정 아래로 일치단결해 사패련을 칠 거다. 영광과 실리를 위해서.”
임소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정파의 생리와 같다. 평소에는 온갖 이유로 엉덩이를 빼며 점잔을 떨다가 확실한 승기와 이득이 보인다면 누구보다 게걸스레 달려드는 것.
그에 비하면 차라리 제 욕망을 숨기지 않는 사파가 진솔해 보일 지경이다.
“장일소가 가장 원치 않는 게 그런 상황이겠지. 놈이 노리는 것은 말 그대로 난전이야. 그리고 그런 난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상황을 최대한 혼란스레 뒤흔들어야 해. 그러려면 구파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겠지.”
“사패련이 두 배의 전력을 상대해야 하는데도 말입니까?”
“전쟁은 수나 전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야.”
“⋯⋯.”
“거기에 맥이 있다. 놈은 그렇게 여길 거야. 나라면 반드시 동쪽으로 간다. 그래서 슬쩍 발을 빼고 있던 구파일방의 다리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 버릴 거야.”
“그다음은?”
잠시 침묵하던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도 내가 제정신 아닌 놈이라 생각하지만, 그놈만큼 맛이 가진 않아서.”
“⋯⋯알겠습니다. 그럼 장일소가 우리의 앞을 막아서고 있을 거란 거군요.”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럼⋯⋯ 간단해졌군요.”
임소병이 쿡쿡 웃는다.
“놈들도 우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고 있지는 못할 것이고, 제아무리 장일소라 해도 그 넓은 장강 유역을 모조리 틀어막기는 어렵지요. 결국 우리가 운 좋게 장강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전에 놈들과 조우하는가. 절반의 확률을 둔 도박을 벌여야 한다는 뜻이네요.”
청명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을 본 임소병은 자신의 짐작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여겼다.
‘목숨을 건 도박이라.’
얼핏 듣기에는 무시무시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딱히 새삼스러울 게 없다. 지금까지도 무수히 해 오던 거니까.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보다는 조금 더 수월한 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보조하도록 하지요.”
“그래.”
청명은 뒤를 따르고 있는 해남의 제자들을 흘끗 돌아보았다. 많이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어쨌건 잘 쫓아오고 있다.
상황은 아직 그가 예상하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말이다. 그런데⋯⋯.
전방을 주시하는 청명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은 표정이 스쳤다. 눈빛 역시 들끓기 시작했다.
‘뭐지, 이 불길함은?’
놓친 것은 없다. 분명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그것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치명적인 무언가를⋯⋯.
그는 이내 마음을 내리누르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지금은 아니야.’
설령 무언가를 놓쳤다고 한들, 이제 와 되돌릴 방법 같은 건 없었다. 지금 집중해야 할 부분은 억지로라도 살길을 열어젖히는 것뿐.
‘기필코 장강을 넘는다.’
더 이상 그 누구도 희생하거나 죽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검을 움켜잡은 청명의 손등에 새파란 핏줄이 돋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