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9화. 놈이 오고 있다는 거로군. (4)
“혹시?”
“예!”
홍대광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왕거지들은⋯⋯. 아, 아니, 개방 상부에서는 이번 장일소의 움직임이 단순히 화산검협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진을 위한 움직임일 수도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당군악이 얼굴을 자못 심각하게 굳혔다.
“동쪽이라면⋯⋯.”
그럴 수 있다.
이곳에서 장강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면 절강이 나온다. 그리고 원래 절강에서 도강을 시도하는 사패련을 저지해야 할 이들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다. 남궁세가야말로 안휘를 본거지로 삼는 절강의 패자이니까.
하지만 지금 남궁세가는 전력의 태반을 상실했고, 남은 전력도 이곳 구강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니 다시 말해 지금 장강의 동쪽은 완벽한 무주공산이라는 이야기다. 장일소가 마음을 먹고 절강으로 진입을 시도한다면 막아설 세력이 없다.
“구파일방의 반응은 어떤가?”
“당연히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 그⋯⋯ 소림 방장 쪽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장일소의 이동을 추적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당군악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장일소가 방비가 부족한 곳에 벌써 도착한 것도 아니고, 아직 대단한 무언가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히 동쪽으로 가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천우맹은 물론이고 구파일방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이들이 있다고 해도,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만으로 천하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이는 오직 장일소 하나뿐일 것이다.
“방장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겠지.”
당군악의 말에 한이명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어떤 의미십니까?”
“지금 방장은 강남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구파일방과는 큰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을 거요. 물론 해남이 얽히긴 했지만, 이미 방장은 해남을 사석(死石)으로 써 버린 뒤니까.”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일소가 동쪽으로 움직이게 되면 상황이 반대로 되어 버리오.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강남에 있고, 그 주력이 이곳에 있다면 북진하는 사패련을 막아야 하는 건 바로 구파일방이오.”
“확실히⋯⋯.”
만일 그곳에 여전히 남궁이 머무르고 있었다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오히려 천우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이 이곳에 머물고 있으니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법정은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이 안휘를 밟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일 사패련이 안휘를 넘게 된다면, 그 직후에 펼쳐지는 곳은 바로 무당과 소림이 자리한 하남이니까.
이는 즉, 장일소가 현재 마음만 먹는다면 단숨에 구파일방의 심장에 비수를 내리꽂을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하고 있단 뜻이다.
“잠깐! 그럼⋯⋯!”
그 순간 현상이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들은요?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더 위험해지거나 하는 건 아닙니까?”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 쪽으로건 더 위험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일소가 정말 북진을 노리는 거라면 오히려 아이들은 훨씬 더 안전해질 것이고, 만약 그게 아니라 해도 포위가 느슨해질 테니까요.”
“아아.”
현상은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군악이 슬쩍 홍대광의 눈치를 살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구파일방 입장에서야 대처가 복잡하게 되긴 했지만, 따져 보면 저희에겐 딱히 손해 볼 게 없는 움직임입니다. 설사 이게 혼란을 유도하는 장일소의 전술이라 할지라도 저희가 잃을 건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복잡한 계단이야 당장 접어 두고라도, 매번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유만 부리던 구파일방 놈들이 발등에 불똥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란 것만으로도 속이 어느 정도 풀렸다.
이대로 장일소가 구파일방과 한판 벌이느라 특사로 간 아이들에게 주던 관심을 끊어 버리면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설령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해도 이제 더는 구파일방이 강 건너 불구경은 하지 못하게 될 테다.
“확실히 장일소답다고 해야 할지⋯⋯.”
사람을 불편한 상황에 몰아넣고, 그 허를 찔러 식은땀 흘리게 하는 데 있어선 천하에 비길 사람이 없다.
“남궁 장로.”
“예, 당가주님.”
남궁명이 당군악의 부름에 즉시 반응했다.
“혹시 모르니 남궁세가에 남아 있는 가솔들을 뒤로 물리는 것이 좋겠소.”
“알겠습니다. 하북 쪽에 연고가 있으니 즉시 짐을 싸서 하북으로 이동하라 하겠습니다.”
“괜찮겠소이까?”
“만일 소가주께서 계셨다 해도 전혀 망설이지 않으셨을 겁니다. 안휘에 남은 기반이 무너지는 건 걱정이지만, 그래도 우선은 사람이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도 같았다.
“맹주님. 그럼 저희는 그 틈을 찔러 강남으로⋯⋯.”
이어질 일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현종을 돌아본 당군악은 순간 멈칫하며 입을 닫았다.
현종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맹주님?”
당군악이 재차 불렀음에도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에야 현종의 고개가 홍대광 쪽으로 서서히 돌아갔다.
“동쪽이라 하셨소?”
홍대광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동쪽 어디?”
“⋯⋯예?”
“그들이 동쪽 어디로 향하고 있다고 하오? 동쪽이라 해서 다 같은 동쪽은 아닐진대.”
“아⋯⋯. 그게⋯⋯ 처음에는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는가 했는데, 지금은 북동으로 방향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파일방이 더 난리가 난 것이지요. 파양호의 하단에서 북동으로 방향을 잡으면 절강이 나오니까요.”
현종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맹⋯⋯주님?”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단 걸 직감한 당군악이 심각한 목소리로 현종을 불렀다.
잠시 후, 현종의 입이 힘없이 열렸다.
“남경(南京).”
“⋯⋯예?”
“그곳에서 북동으로 이동하면 도착하는 곳은 남경이겠구려.”
“그, 그렇습니다. 남경 주변이 되겠지요. 도강을 하면 바로 합비가 나오니까요. 합비는 남궁세가가 위치한 곳이자, 하남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무한보다 거리상으로는 더욱 하남에서 가깝지요.”
홍대광이 침을 튀기며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만일 장일소가 북진을 노린다면 이보다 치명적인 곳은 없습니다. 아마도 목적지는 남경이 아닐지⋯⋯.”
“어찌⋯⋯.”
현종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당군악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맹주님. 대체 왜 그러시는지 말씀을 해 보십시오.”
“남경이요.”
“⋯⋯예?”
“청명이가 보내온 서찰에 적혀 있던⋯⋯ 그 아이들이 향하는 곳이 말이오.”
당군악은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 의미가 이해되며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이들이 남경으로 향하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
“아, 아니. 어째서?”
사실 어째서라도 물어도 크게 의미는 없다.
아이들의 행선지는 장일소가 움직이기 전에 정해진 일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 말 외에 당군악이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만일 장일소가 강북을 노리는 것이라면⋯⋯ 차라리 문제가 없겠지만⋯⋯.”
중얼거리는 현종의 낯은 흡사 대낮에 귀신이라도 마주친 사람처럼 창백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 그 아이들의 움직임을 꿰고 있어서 그 앞을 막아서려는 것이라면⋯⋯.”
그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남에 있는 아이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군악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싹 가셨다.
“장일소와 맞닥뜨리기 전에 아이들에게 먼저 연락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그 영물이⋯⋯!”
침묵을 지키던 백상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리입니다. 아무리 백아라고 한들, 저 넓은 강남 땅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당군악은 순간 망연해졌다. 이제야 상황이 완벽하게 실감되었다.
장일소는 그저 동쪽으로 움직이는 한 수를 두었다. 그 한 수로 천우맹과 구파일방 모두의 목에 벗을 수 없는 올가미를 씌워 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저 강남에 있을 아이들의 목에도⋯⋯.
“패군⋯⋯.”
그 두 글자가 주는 끔찍한 중압감이 당군악의 전신을 천근처럼 짓눌렀다.
❀ ❀ ❀
“북동이지?”
“예. 분명합니다.”
빽빽한 수풀 틈으로 모습을 감춘 거지들이 멀리서 이동하고 있는 이들을 샅샅이 살폈다.
중앙에 있는 거대한 사두마차를 호위하듯 둘러싼 건 다시 봐도 사패련이었다. 심지어 그중에서도 ‘본단’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 말이다.
거지들의 등골이 금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만일 저들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죽어도 고이 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겁이 난다고 해서 발을 뺄 수도 없다. 어쩌면 저들의 움직임에 천하의 운명이 달려 있을지도 모르니까.
“너는 바로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해라.”
“조장께서는?”
“나는 조금 더 추적하겠다. 상대는 장일소다.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예, 알겠습니다.”
수하가 숨까지 참으며 발소리를 죽여 빠져나갔다. 이를 슬쩍 돌아본 거지는 다시 사패련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시선을 잡아끌 만큼 화려한 사두마차에 눈길이 닿았다. 저 화려함만으로도 위압감이 대단했다.
‘천하와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저 안에는 마귀가 타고 있다.
세상을 제멋대로 주물러 농락하는 마귀가.
❀ ❀ ❀
“흐음.”
화려하고 안락해 보이는 비단금침에 파묻혀 비스듬히 누운 장일소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느른하게 바라보았다.
네모난 창으로 보는 광경은 더없이 작았다. 하지만 장일소는 갑갑함일랑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눈에 다 보이지 않아도 이 밖에 펼쳐진 광경이 모두 그의 머리 안에 훤했다. 완벽하게 그려져 눈앞에 펼쳐졌다.
보이지 않는 광경을 못 보고, 움직이지 않으면 못 움직이는 이들에겐 천하를 거머쥘 자격이 없다.
“련주님. 거지들이 움직입니다.”
“흐음⋯⋯. 더러운 건 질색인데⋯⋯”
슬쩍 미간을 찌푸렸던 장일소가 이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고약한 냄새를 참아 주는 대가로 많은 것을 남겨 줄 테니 말이야.”
저 거지 놈들이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강 너머에 전해질 것이다. 장일소가 방조해 주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자아⋯⋯. 이제 어떻게 움직일 거지? 응?”
장일소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다 손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 위에 거대한 천하가 놓여 있다. 고요했던 세상이 천천히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구파일방, 천우맹, 사패련, 그리고 화산검협이라⋯⋯.”
장작은 충분히 모였다. 세상 모두를 불태우는 거대한 겁화를 일으키고도 남을 장작이. 그리고 그 장작에 불을 댕기는 것은 장일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북으로 난 작은 창에서 눈을 뗀 장일소는 반대쪽 창을 보았다. 남쪽을 비추는 창이었다.
순간 그의 두 눈에서 시린 광기가 넘실거렸다.
“조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늦으면 이미 모든 게 타 버린 후일 테니까. 쿡쿡쿡쿡.”
붉은 장일소의 입술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천하의 모두를 기다리는 잔혹한 운명처럼, 잔뜩 뒤틀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