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358화 (1,359/1,567)

1358화. 놈이 오고 있다는 거로군. (3)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독경 외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눈을 반개한 채 반야심경을 독경하던 법정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법정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일체의 고통을 견뎌⋯⋯.”

반야심경. 당나라 현장이 육백여 권에 달하는 반야경의 핵심을 간추려 담은 이백육십여 자의 진언(眞言).

공(空)의 요체가 담겨 있다 칭해지기에 수없이 읊어지지만, 거꾸로 너무도 중하기에 또한 흔하게 여겨지는 경전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법정은 이 반야심경에 담긴 진의를 또다시 깨닫고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궁한 만큼 열리리라.”

까라락.

법정의 손에 잡힌 염주 알이 청량한 소리를 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고, 불자란 그 일체의 고통을 견뎌 내는 자다. 그러니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을 각오가 없는 이는 자신을 불자를 칭해서는 안 된다.

피안(彼岸)은 돌린 고개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 버텨 낸 이에게만 다가오는 법.

지금 그가 건너고 있는 고통의 강은 불자로서 당연히 견뎌야 하는 고행에 불과하다. 그러니 버티고 또 버텨야 한다. 그러면 결국에는⋯⋯.

하지만 그의 참오는 안타깝게도 더 이어지지 못했다.

“방장.”

들려온 목소리에, 법정은 감은 눈을 뜨고 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사제인 법계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대로 두실 것입니까?”

법정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미 끝난 이야기를 자꾸만 부여잡고 있는 사제가 답답해서였다.

“말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방장.”

법계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저 역시 화산검협의 방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지극히 독단적이고 패악합니다.”

법계는 그 머릿속에 화산검협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들이 보기에 화산검협은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이였다.

“하지만 그가 천하만민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의 능력을 보건대 지금 그를 잃는 것은 큰 손실이지 않겠습니까?”

법정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법계가 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화산검협이라 한들, 상대는 저 장일소입니다. 천우맹의 힘만으로는 그를 구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힘을 보탠다면⋯⋯.”

“끝난 이야기다.”

“방장.”

법계가 살짝 입술을 짓깨물었다.

“방장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이토록 저어하십니까?”

법정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저어한다 했느냐?”

“예, 방장. 저 역시 화산검협이 무작정 옹호할 이가 아닌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장께서 유독 화산검협을 대하는 방법이 다른 이를 대할 때와 다르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

“상대가 설령 악인이라 해도 한 줌의 자비와 감화의 의지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신 분이 방장 아니십니까?”

“⋯⋯.”

“하지만 화산검협은 악인조차 아닙니다. 그 방식은 다를지언정, 그 역시 정도를 걷고 있는 건 사실 아닙니까? 사패련과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천우맹의 구심점인 그를 잃어서는⋯⋯.”

“법계.”

순간 법계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움찔했다. 법정의 목소리가 더없이 냉정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이가 있으면 어찌하겠느냐?”

“그야⋯⋯.”

“나는 그를 구하려 할 것이다.”

“⋯⋯.”

“하지만 사람들에게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는 이를 구할 수는 없다. 그 하나를 구하는 게 더 많은 이들을 고통에 밀어 넣는 길이기 때문이다.”

“방장⋯⋯.”

“부처께서는 세상 모든 것에 자비를 품으셨지만, 사람을 현혹하는 마라에게만은 온정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가 마라란 말입니까?”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는 않다. 마라는 사람을 해할 의지로 가득한 존재이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이 선(善)이라 믿고 있는 자겠지. 그렇기에 그리 한 점 망설임 없이 불을 향해 뛰어들 수 있는 것이겠지.”

“⋯⋯.”

“하지만 그 의도가 어떻건, 그 행위가 마라와 다를 바 없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에게 베푸는 자비조차 어리석음이 될 뿐이다.”

법계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어찌 이리되고 말았는가⋯⋯.’

그 역시 화산검협에 대한 반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화산검협이 한 번만 굽혀 주었다면 천하가 훨씬 더 평화로울 수 있었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하지만 화산검협에게 굽히기를 바랐다면, 소림 역시 같은 것을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화산이 아닌 소림이 그들의 뜻을 먼저 존중하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는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이다.’

하지만 그건 소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법정의 얼굴에는 여전히 변화랄 게 없었다. 때로는 강직하고, 때로는 온화하며, 깊은 혜안을 담은 과거의 얼굴 그대로다.

그런데도 법계는 법정이 조금 변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무엇이 변했는가를 콕 집어 설명하기야 난해하지만, 결코 과거 자신이 알던 법정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세.”

“방장⋯⋯.”

법계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앞에서 무슨 말을 하건, 법정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꾸 미련이 남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되돌려 옳은 길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방장, 하면⋯⋯.”

차마 마지막 미련을 떨치지 못한 법계가 다시 입을 연 순간이었다.

“방장! 방장, 안에 계십니까?”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법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재빨리 소리쳤다.

“무슨 일이더냐!”

“장일소의 종적이 다시 잡혔습니다!”

“당장 들어오너라!”

눈을 부릅뜬 법계는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문밖에 있던 혜종(慧從)이 급히 들어왔다.

“방장을 뵙습니다.”

“예는 되었다. 종적이 발견되었다고?”

“예! 개방에서 들어온 전갈입니다!”

“말해 보거라.”

“개방에서 전하기를, 강남으로 급히 투입한 거지들이 대규모로 이동하는 무인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위험해서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했지만, 백마 네 마리가 끄는 화려한 사두마차와 그를 호위하듯 백홍포(白虹袍)를 입은 이들, 그리고 짙은 홍의를 입은 무인들이⋯⋯.”

“패군이로군.”

법정이 단언했다.

물론 화려한 사두마차를 타는 이가 천하에 장일소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만인방의 정예와 홍견의 호위를 받는 사두마차를 탈 수 있는 이는 천하에 오직 한 사람뿐이다.

“예! 개방 역시 그리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그 뒤를 수많은 사패련의 무사들이 뒤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법정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 수는?”

“그게, 물경 이천에 달한다고⋯⋯.”

“허허⋯⋯.”

법정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천이라니⋯⋯.

“패군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구나.”

그 정도면 화산검협이 아니라 웬만한 문파 몇 개쯤은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수 있는 전력이다. 지금 강남에 있는 이들은 장일소 한 사람도 감당하기 버거울 텐데, 그 뒤를 이천의 정예가 호위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법정이 법계를 향해 물었다.

“어떠하더냐?”

“⋯⋯.”

“네가 생각하는 화산검협에겐 저 이천의 사패련 정예와 전쟁을 벌여서까지 살려 낼 가치가 있더냐? 그 하나의 목숨이 전쟁에 희생되어야 할 천이 넘는 이의 목숨보다 귀하더냐?”

“방장, 저는⋯⋯.”

“피해 없이 살려 낼 수 있다면 나 역시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법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이고 말았다. 설마 장일소가 저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만한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고는 그도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이천이라면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이들의 수는 몇이나 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 아닌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살려 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강남을 가로지른다는 선택이 꼭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나 역시 예상하지 못했으니 저 패군조차 허를 찔렸을 수 있지.”

“⋯⋯.”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패군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어째서⋯⋯?”

“패군에게 패배는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법정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서늘했다.

“패군이 강북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사패련 전체의 절대적인 충성이 필요하다. 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사파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아니다.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패군의 절대적인 위상,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신화다.”

법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았다.

장일소는 항상 정파에게 억눌려 살았던 사파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존재다. 심지어 그 정파를 농락하며 점차 짓눌러 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욕망에 가득 찬 사파들이 군말 없이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더 크고 더 대단한 승리, 더 많은 이득을 안겨다 줄 이니까.

“하지만 절대적인 위상이란 결국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것. 단 한 번의 패배와 실착으로도 무너져 버리는 법이지. 강북을 치기 위해 사패련을 단속하고, 사파 전체를 규합해야 하는 이때, 천우맹의 화산검협이 해남을 이끌고 강남을 관통해 버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아⋯⋯.”

반드시 승리한다는 장일소의 신화가 그 순간 붕괴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어지는 정파와의 전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가 급속도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뜨겁게 차오른 열기가 식으면 평소보다 더한 한기가 들기 마련이니까.

“이해하겠느냐? 달아났다면 잡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로 보내 주어 우리 사이의 분란을 획책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제 안방을 흙발로 짓밟고 지나가게 둘 수는 없다⋯⋯.”

“그래. 그런 것이다.”

법정이 담담히 말했다.

“어째서 화산검협이 이토록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절대 살아서 강북 땅을 밟지 못할 것이다. 설령 우리가 나선다 해도 말이다.”

법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부터 의미가 없는 생각이었구나.’

저 패군이 저리 단단히 마음을 먹어버린 이상, 이미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침울해지는 법계의 표정을 보며 법정이 짧게 혀를 찼다. 묘한 안타까움이 그의 가슴에도 스몄다.

‘화산검협⋯⋯.’

어찌하여 그리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가? 그 오만함이 자네의 목을 조일 것이라 예견이야 했지만, 이런 결말까지는 그리지 않았건만.

‘조금 과하긴 하군.’

반드시 죽여야 할 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무려 이천이라니⋯⋯. 패군이 그리 간담이 작은 이는 아니었을 텐데.

“그래서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마지막으로 종적이 발견된 곳은 진현(进贤)의 동쪽입니다.”

“진현?”

“파양호 최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렇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법정이 순간 멈칫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예?”

“동쪽이라 했느냐?”

“그, 그렇⋯⋯습니다.”

법정의 눈이 순간 크게 뒤흔들렸다.

파양호의 남부. 거기까진 이상할 게 없다. 저 화산검협을 포위하려면 당연히 남쪽으로 움직여야 할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 발견된 곳이 진현의 남쪽이 아니라 진현의 동쪽인가? 그들이 동쪽으로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을 텐데?

“개방이 보내온 정보에는 그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다고 하더냐?”

“그,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이동하는 방향은 분명⋯⋯.”

혜종이 기억을 짜내는 듯 잠깐 침묵하더니 외마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동남! 동쪽이었습니다!”

법정은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다시 확인해 보거라.”

“예?”

“당장 개방으로 가서 그들의 이동 방향을 알아내라 해라! 어서!”

“하, 하지만, 방장. 개방도 이 이상은⋯⋯.”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고 전해라! 아니, 그냥 내가 직접 가겠다!”

법정은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장!”

“방장, 무슨 일입니까! 방장!”

등 뒤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법정은 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달렸다.

‘패군!’

법정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이 간악하기 짝이 없는 놈!’

그의 뇌리에 장일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려한 장포를 입은 그가 새빨간 입술을 한껏 벌린 채 요사스러운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지독한 웃음소리였다.

그 환청은 달리는 내내 법정의 귀를 무참히 찔러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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