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357화 (1,358/1,567)

1357화. 놈이 오고 있다는 거로군. (2)

“보급이요?”

입안의 고기를 꿀꺽 삼킨 윤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보급이랄 게 필요하겠습니까? 고기가 필요하면 알아서 척척 사냥해 오는 편리한 놈도 있는 마당에. 그냥 지금처럼 중간중간 사냥을 해서 충당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윤종이 저 옆에서 사슴 고기를 뜯어 대고 있는 청명을 슬쩍 바라보았다.

청명은 그가 아는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다. 저놈만 있으면 기껏해야 일백 정도 되는 이들이 배를 주릴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백천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상일이 그리 편하게만 돌아간다면 골머리를 썩일 일도 없겠지.”

백천이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리 빠르게 잡아 온다고 해도 사냥은 사냥이다. 어찌 되었건 짐승을 찾고 잡아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지.”

“그야⋯⋯.”

그 말에는 반박이 어려운지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아무리 빨리 사냥을 해 온다 한들, 시간은 걸린다.

게다가 다음에도 지금처럼 빠르게 사냥을 해 올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지금이야 몰라도 적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온다면 결국 쉴 틈도 없이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도 사냥을 할 셈이냐?”

“맞는 말씀이십니다.”

적이 뒤에만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처럼 적과 거리를 벌리고 휴식할 기회가 몇 번이나 올지 알 수 없었다.

“해남의 제자들은 이미 많이 지쳐 있다. 거기에 부상자들까지 들쳐 메고 뛰느라 부담이 배로 가중되어 있지 않느냐?”

“예. 사숙.”

“거기에 제대로 된 음식까지 먹지 못한다면 그 결말이야 뻔한 것이지.”

윤종의 눈빛이 조금 심각해졌다.

“달리면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하겠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미리 육포를 만들어 두는 게 낫지 않습니까?”

“무리다, 육포를 말리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게다가 의식도 없는 환자들에게 육포를 먹일 셈이냐?”

윤종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해남의 부상자 중에는 의식이 거의 없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런 이들이 딱딱한 육포를 씹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장 청명이 구워 준 고기조차 부상자들의 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니던가?

“결국은 곡식이 있어야겠군요.”

“내 생각도 그렇다.”

곡식이라면 달리는 와중에도 대충 씹어 삼킬 수 있고, 가루를 내어 물에 타면 급한 대로 미음 대용으로 쓸 수도 있으니 부상자들에게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산중 어디에서 곡식을⋯⋯.”

우선 떠오른 방법은 가까운 민가를 찾아보는 것이었지만, 윤종의 고개는 이내 내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깊은 산중에 사는 이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런 이들은 보통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이들일 터.

그들이 필요한 만큼의 곡식을 보유하고 있을 리가 없다.

설사 보유하고 있다고 한들, 그건 돈으로도 팔 수 없는 귀한 곡식일 가능성이 컸다.

약탈이라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생각할 여지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 어떻게?’

이 산중 어디에서 곡식을 구한다는 말인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선택해야지. 위험을 감수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 마을에서 곡식을 구해 보던가⋯⋯.”

“이 모든 이들이 장강까지 먹을 만한 양을 구하려면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패련 놈들이 득달같이 달려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감수해야지.”

“⋯⋯.”

윤종의 입에서 한숨이 푹하고 새어 나왔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문제고, 그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강자와 전쟁을 벌인다는 건, 구멍이 숭숭 뚫린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옮기는 것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라도 곡식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하는 것도 생각해 볼법하지만, 제 생각에는 저희에게 곡식을 팔 이들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냐?”

“이곳은 강남이 아닙니까? 사파가 지배하는 곳이니 모든 일에 조심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들에게 선뜻 곡식을 넘기려 하지 않겠지요. 나중에 뭔 일이 벌어질 줄 알고요.”

백천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본 윤종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부족함 없이 자라 힘 있는 이들을 두려워해 본 적 없는 백천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일 것이다.

굶주린 늑대들과 같은 곳을 살아가야 하는 양들이 어떤 심정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지 말이다.

“여하튼 한 번에 곡식을 사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럼 사람을 나눠 조금씩 사 모아야 하는데⋯⋯.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됩니다.”

“음⋯⋯.”

백천의 얼굴에 수심이 내려앉았다.

적지에 있다는 것은 이런 사소한 문제마저도 심각한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어째서 수많은 문파가 자문의 영향력이 닿는 땅을 넓히려 애쓰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백천이 절로 눈을 찌푸리던 그때였다.

“뭘 그렇게 고민해?”

“응?”

휘적휘적 걸어온 청명이 그들의 앞에 그새 반들반들해진 사슴 뼈를 툭 하고 던졌다.

“곡식을 안 팔아서 문제면 팔 사람들에게 가면 되잖아?”

윤종이 눈을 찌푸린다.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지금 강남 땅에는 낯선 이들에게 많은 곡식을 팔 만한 이들이 없다니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려 할 거다.”

“아니, 그러니까. 낯설지 않은 사람들에게 팔아 달라고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이 강남 땅에 우리가 낯설지 않은 이들이 어디에 있느냐?”

말을 하던 윤종이 멈칫하며 청명을 바라본다.

“서, 설마 만인방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

그 말을 들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윤종에게로 향한다. 그 집중된 시선에 윤종이 움찔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사형, 돌았어?”

“⋯⋯그, 그게 아니라 인마! 이럴 때마다 네가 항상 미친 소리를 해 대서 그러는 거 아냐!”

“미친 소리도 정도가 있지. 만인방에 가서 곡식을 산다는 게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 할 소리야? 혹시 오는 중에 어디 머리에 칼이라도 박혔어?”

“⋯⋯.”

자신을 바라보는 청명의 힐난 어린 시선은 참아 낼 수 있었다.

윤종이 참기 힘든 것은 청명이 아닌 다른 이들의 ‘저 인간도 맛이 갔구만.’이라는 뜻이 듬뿍 담긴 시선이었다.

힘없이 고개를 떨군 윤종의 어깨를 조걸이 가만히 두드려 준다.

“저는 이해합니다. 사형.”

“⋯⋯저리 꺼져.”

우울해하는 윤종에게서 시선을 뗀 백천이 청명에게 묻는다.

“그럼 어딜 말하는 것이냐? 이 강남에 우리와 친분이 있는 이들이 어디에 있다고?”

“친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지금 곡식의 여분이 있고, 그걸 팔아 줄 만한 이들은 알지.”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사숙도 오다 봤잖아.”

“응? 오다가?”

백천이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눈을 크게 뜬다.

“아! 그분들!”

“그래.”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해남으로 가는 길에 들렸던 마을에 곡식이 있었지. 그 사패련 놈들이 준 곡식이 말이야.”

“확실히⋯⋯.”

그들이 그 곡식으로 밥까지 지어 줬었다. 시일이 많이 지난 건 아니니 그 많은 곡식이 다 동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야 우리가 낯설겠지만, 그 사람들이라면 딱히 낯설 것도 없잖아. 대충 구면이지.”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고?”

“그래.”

“흐음.”

백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청명이 놈이야 대충 구면이라는 말로 퉁쳐 버리고 있지만, 그 마을과 천우맹 사람들이 맺은 관계는 그리 표현할 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구명지은을 베푼 사이가 아니던가?

공짜로 곡식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곡식을 사는 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 아니. 잠깐만.”

“응?”

조걸이 걱정이 담긴 얼굴로 말한다.

“그런데 그 마을이라고 딱히 곡식이 남아도는 건 아니었잖아. 우리가 그 곡식을 사 버리면 그 마을은 어떻게 하고?”

“사형, 병신이야?”

“응?”

“마을 사람들이야 도시로 내려가서 곡식을 사면 되지. 우리한테야 안 팔겠지만, 그 사람들한테 안 팔 이유는 없잖아.”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아, 아니지. 그 사람들이 곡식을 대량으로 사들이면 이상한 눈초리를 받게 될 게 뻔한데⋯⋯.”

“거, 진짜 이 인간은 머리를 사천에 두고 입문했나! 한 번에 안 사면 그만이지. 우리야 갈 길이 바쁘니까 많이 사야 하지만, 그 양반들이야 여러 곳에서 조금씩 사 모으면 될 거 아니야.”

“그, 그렇네?”

청명이 쯧쯧 혀를 찼다.

“시장에 곡식이 없어서 문제라고 했지만, 장일소 그 새끼가 곡식을 사방에 뿌려 댔으니 꼭꼭 숨겨 두었던 곡식들이 장에 나왔을 거야. 값이야 좀 비싸겠지만, 그거야 우리가 돈을 많이 주면 될 일이고.”

“⋯⋯.”

“우리는 부족한 곡식을 챙겨서 좋고, 그 양반들은 곡식을 다시 사고도 남아돌 만큼 돈을 버니 좋고! 이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지!”

백천이 감탄한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저 인간은 정말 잔대가리 하나는 타고났다.

설마 이 강남에 있는 유일한 친분을⋯⋯. 아니, 친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관계를 저런 식으로 써먹어 댈 줄이야.

어쨌거나 그들이 마을에 다녀간 흔적만 남기지 않는다면 서로가 이득을 볼 수 있는 계획이었다.

“저, 그런데 청명아.”

“응? 또 왜?”

“이런 말 하기 좀 민망하긴 한데, 그 계획에는 근본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

“무슨 문제?”

백천이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네 말대로 하려면 우리가 돈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내가 지금 가진 돈이 그리 많지가 않다.”

“⋯⋯.”

청명이 ‘이 새끼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라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돈 안 챙겼어?”

“출발할 땐 챙겼지⋯⋯. 근데 그 돈은 그때 마을 사람들한테 주기도 했고⋯⋯.”

돌아올 때는 돈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해남 사람들에게 적당히 쥐어 줬다는 말은 안 하는 게 낫겠지. 저 돈 귀신이 눈이 돌아갈 게 분명하니까.

“돈이 없다고?”

“아,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백천이 어떻게든 변명을 짜내려 할 때였다.

“나는 또 뭔 소리를 한다고. 별걸 다 신경 쓰네. 괜찮아. 괜찮아.”

“으응?”백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저 돈에 미친 놈이 돈이 없다는 말을 듣고도 저렇게 태연할 리가 없는데⋯⋯.

“어차피 우리가 돈 낼 것도 아닌데 뭐.”

“응?”

그 말에 백천의 고개가 자연스레 남궁도위에게로 돌아간다.

그러자 남궁도위가 자신도 챙겨 온 돈이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고, 당패도 어깨를 으쓱했다.

심지어 임소병은 제 소매를 뒤집어 까 보이며 이를 드러낸다.

“이제 하다못해 산적까지 등쳐 먹으시려고?”

“⋯⋯이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더 문제라고는 생각 안 하십니까? 예?”

여하튼 모두 낼 만한 돈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는데?”

“하여튼 약에 쓸 데라고는 개똥도 없는 것들.”

“그거 말이 좀 꼬인 것 같은데⋯⋯.”

“누가 댁들보고 돈 내래?”

“그, 그럼?”

“밥 먹을 놈들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가 돈을 내? 저기 있잖아. 집 떠나오면서 온갖 비싸고 귀한 건 다 챙겨 온 양반들.”

“응?”

“저기.”

모두의 고개가 청명의 턱짓을 향해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청명의 말 그대로 집을 떠나오면서 혹여 몰라 중요한 귀중품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온 부자를.

“있네.”

“있겠네.”

“다행스럽게도.”

이제야 그들이 있는 곳에 합류한 해남의 장문인 금양백이 뭔가 오싹한 느낌에 몸을 떤다.

“무, 무슨?”

천우맹도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뒤쪽에 서 있는 청명이 놈과 꼭 닮은 미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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