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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56화 (1,357/1,567)

1356화. 놈이 오고 있다는 거로군. (1)

어느새 토굴을 빠져나와 꼬박 하루를 달렸다.

달리던 임소병이 아무 징조 없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뒤를 따라 전력으로 달리던 이들이 기겁하며 몸을 멈춰 세웠다. 기우뚱 기울다 못해 거의 엎어질 뻔했던 이들이 가까스로 몸을 바로 세우며 벌컥 고함을 쳤다.

“아오! 뭡니까, 갑자기!”

격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임소병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와, 들은 척도 안 하네. 욕을 이렇게나 하는데?”

“사파는 원래 욕먹는 게 일이라서 이 정도 욕은 기별도 안 간다더라고.”

“그런 것치고는 청명이가 지랄하면 눈 뒤집히던데?”

“⋯⋯그 새끼는 욕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욕으로 사람을 찔러.”

“아, 그렇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임소병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여기서 납시다. 적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이슬을 피하기 딱 좋은 지형이네요.”

“⋯⋯여기서요?”

“예.”

“아니, 굳이 휴식을⋯⋯.”

반사적으로 말리려던 윤종이 문득 입을 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해남 제자들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부상자까지 업고 달렸으니 지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주는 게 중요합니다. 급하다고 무작정 달리기만 하다 보면 결국에는 시간을 더 지체하게 되는 법이지요.”

“알겠습니다.”

백천도 임소병에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쉬어 갑니다. 다들 쉴 자리를 찾으십시오. 대신 불은 피우지 마십시오.”

윤종의 등에서 조심조심 내려온 조걸이 의아한 듯 물었다.

“불은 왜요? 만인방 놈들이 따라붙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을 텐데.”

“여긴 강남이다. 만인방이 아니라 해도 사방 천지에 눈이 깔려 있지. 산을 오르던 양민들이라고 해서 꼭 우리 편이라고는 할 수 없고.”

백천의 설명을 들으며 조걸의 얼굴이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러자 백천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먼 데서 불빛만 본 사람들이 우리가 누군지 알 턱이 있겠느냐? 수상한 걸 본 적 없냐고 만인방이 물으면 당연히 봤다고 대답하겠지.”

“아아, 그렇겠네요.”

조걸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해야죠.”

“그래.”

“사형, 뭐 합니까? 쉴 자리 찾읍시다. 꾸물대면 다른 놈들이 좋은 자리 다 채어 갑니다.”

조걸이 윤종을 채근했다. 백천은 그런 그를 보다 쓰게 웃었다.

그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다루는 게 능숙해지셨는데?”

“칭찬이냐?”

“결국 사기꾼이 되어 간다는 뜻이지.”

“⋯⋯칭찬 고맙다.”

청명이 백천의 표정을 보며 웃었다.

사실 백천은 내심, 양민들이 이쪽의 정체를 확실히 안다고 해도 만인방에 밀고하지 않는단 보장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었겠지. 특히 조걸 같은 놈에게는 말이다.

“너도 쉴 곳이나 마련해라.”

“별걱정을 다 하시네. 그새 또 잔소리가 늘었어.”

백천은 부인하지 않고 쓰게 웃었다. 저 말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라서.

해남의 제자들은 분분히 흩어져 쉴 만한 곳을 찾았다. 그래 봐야 대충 평평한 곳을 찾아 드러눕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은 이자양이 기진맥진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여긴 너무 습하다. 저쪽으로 가서 눕거라. 뒤에 놈은 이리 주고.”

“아, 아닙니다, 대사형. 사형도 지치셨을 텐데⋯⋯.”

“됐으니 어서.”

곽환소는 계속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다른 사형제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이자양이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대단하네.’

이자양은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중간 사형제들과 부상자들을 살피느라 남들보다 두 배는 고생한 곽환소가 다른 이들부터 챙기고 있는 것이다.

힘이 남아서? 그럴 리가.

곽환소의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는 게 이자양의 눈에도 보일 정도다. 아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아무 데나 드러누워 버리고 싶을 것이다.

곽환소는 그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참고 있는 것이다.

“⋯⋯대단하네.”

위기는 사람을 담금질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사실 이자양은 곽환소를 대사형으로 인정은 해 왔지만, 그를 딱히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 폭급한 성격과 이기적인 면모가, 모두를 아울러야 하는 장문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곽환소에게서는 과거 이자양이 보았던 단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해남도부터 이곳까지 그 험난한 길을 거쳐 오며 곽환소는 누가 뭐래도 해남 장문인의 자격이 있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똑같은 위기를 겪고도 이자양은 딱히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곽환소는 그 위기를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릇이 다른 거다.’

이자양은 쓰게 웃었다.

한때는 대충 곽환소를 장문인의 자리에 세워 놓고 슬슬 옆구리를 찔러 가며 해남을 그의 뜻대로 움직여 보려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엄두도 나질 않는다. 저리 성장해 버린 곽환소를 무슨 수로 휘두르겠는가?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살아남으면 말이지.’

어느새 이자양의 눈에 작은 희망이 깃들었다.

곽환소를 바라보는 사형제들의 두 눈엔 굳건한 신뢰가 어려 있다. 과거의 해남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눈빛이었다.

지금은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이곳을 빠져나가 저 곽환소가 해남의 장문인이 되고, 이자양이 전력으로 보좌할 수 있다면 해남의 영광을 재현하는 게 꿈은 아닐지도 모른다.

잠시 그 광경을 멍하니 그려 보던 이자양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봇짐에서 건량을 꺼냈다.

‘너무 멀리 갔군.’

일단은 살아남는 것부터⋯⋯.

“사형, 건량 남은 것 좀 있습니까?”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며 물었다. 이자양이 되물었다.

“왜? 건량은 충분히 챙겨 오지 않았더냐?”

“⋯⋯싸우다가 짐을 잃어버렸습니다.”

“아⋯⋯.”

해남에서 출발할 당시 식량은 챙길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챙겼지만, 그 격전을 치르며 짐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도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부상자들의 경우엔 짐이 남아 있는 사람이 짐을 잃은 사람보다 더 적을 지경이었다.

“그럼 일단 이거라도 먹거라.”

“사, 사형, 그럼 저도 좀⋯⋯.”

이자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몇몇 이들이 슬그머니 일어나 먹을거리를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 물 남는 사람 없습니까?”

“금창약 다 떨어졌는데, 금창약 있는 사람?”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이자양의 얼굴은 점차 굳어만 갔다.

강남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는 충분히 해 왔다고 여겼는데, 아직 반도 가지 않은 상황에서 물품들이 동나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라면 준비해 온 돈으로 새로 물품을 구하면 그만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강남에서 그들이 돈을 쓸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의 눈도 피해야 하는 판에.

이런 상황에서 돈 따위야 아무 쓸모 없는 짐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식량 부족은 심각한 문제다.’

물론 무인은 평범한 사람에 비해 식사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간이 길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버티는 것에 불과하다. 온 힘을 다 써 가며 전력으로 달리는 와중에 음식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다면 무슨 꼴이 벌어질지야 뻔하지 않은가?

“⋯⋯나, 나도 건량이 없는데⋯⋯.”

“나도 겨우 한 번 먹을 분량뿐인데, 이걸 너희를 주면 나는 뭘 먹으라는 거냐?”

“누구 숨겨 둔 것 없습니까? 지금 아낄 때가 아닙니다!”

처음엔 조금 당황하여 술렁이는 정도였지만, 점차 긴장감이 번져 갔다. 이대로 조금 더 방치하면 큰 문제가 생길 법했다.

“다들⋯⋯.”

곽환소가 막 무어라 말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쿵!

그들의 앞에 무언가 떨어졌다.

“여기는 뭔 사슴 새끼들이 눈이 멀었나. 뻔히 사람 있는데 앞을 지나가고 난리네.”

사냥한 사슴을 해남 제자들 쪽으로 던진 청명이 손을 툭툭 털며 낄낄 웃었다. 해남 제자들은 땅에 놓인 사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백천은 영 탐탁지 않은 눈으로 흘기며 잔소리했다.

“야, 불은 피우면 안 된다니까?”

“아오, 또 잔소리! 태어나면서도 우는 대신에 잔소리했겠다. 시끄럽고, 보기나 해!”

“응?”

청명이 검으로 사슴 가죽을 슥슥 벗겨 냈다. 어째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너무 능숙한데?”

“도사 아니었습니까?”

“맞을걸?”

그는 이내 크게 자른 사슴 다리 하나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뭐 하려고⋯⋯. 헐?”

백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슴 다리가 금세 새하얀 김을 뿜으며 모락모락 익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청명이 의기양양하게 낄낄 웃었다.

“이게 열양장력이라는 거다, 열양장력!”

“⋯⋯저런 미친놈을 봤나⋯⋯.”

백천이 입을 쩌억 벌렸다.

“살다 살다 열양장력으로 고기를 익히는 놈은 처음⋯⋯.”

“아뇨, 사숙. 전에도 저랬었습니다. 그때 북해에서.”

“진짜?”

열양장력을 장기로 삼는 남해태양궁 사람들이 들었다면 통탄할 소리였다.

백천이 눈을 끔뻑이는 와중에도 청명은 사슴 다리를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잘 익은 사슴 다리를 슬쩍 뒤로 던졌다.

“먹어.”

“⋯⋯예?”

얼떨결에 청명이 던진 사슴 넓적다리를 받아 든 설소백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요! 저는⋯⋯. 저보다는 다른 분들이⋯⋯.”

“됐으니까 일단 먹어.”

청명이 설소백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도 충분히 잘해 줬어.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고기나 든든히 먹어.”

“⋯⋯도장.”

설소백이 입술을 살짝 깨문다.

빙궁의 궁주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그가 이런 전투에서 제대로 된 전력이 되기는 어려웠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지 지금까지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방해가 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지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청명은 계속해서 대수롭지 않게 사슴을 해체하고 익혔다.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퍼졌다.

해남의 제자들은 차마 달라는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청명이 툭툭 던지는 고기를 받고는 격하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도장!”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청명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많이 지쳤지?”

“⋯⋯사실 좀⋯⋯.”

“몸이 영 힘을 못 쓰지? 고기 먹으면 힘이 막 날 것 같지?”

“그, 그렇습니다! 정말 감사⋯⋯.”

“그런데 그거 아니야.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사람이 그냥 고기만 먹어선 힘이 별로 안 나.”

“⋯⋯예?”

“진짜 힘 나게 해 주는 건 따로 있지.”

청명이 사슴의 갈라진 배로 손을 쑥 밀어 넣더니 안에서 무언가를 잡아 끄집어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청명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게 최고지, 이게.”

“⋯⋯그거요?”

그가 손에 쥔 건 아직 김이 펄펄 나는 사슴의 간이었다.

“이게 생으로 먹으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는 자양강장제거든. 다들 한 점씩 하자고.”

“⋯⋯그걸 생으로 먹는다고요?”

“자, 누구부터 먹을래?”

청명이 사슴 간을 한 점 베어 내며 해남의 제자들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히이이익!”

그러자 해남의 제자들이 일제히 뒤로 우르르 물러났다.

청명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희한하네. 물고기는 생으로 먹는 것들이 이건 왜 못 먹는다고 난리야!”

“그⋯⋯ 그거랑 그게 어떻게 같습니까? 사람이 그걸 어떻게 먹⋯⋯.”

“저기⋯⋯.”

그때 모두의 시선이 청명의 뒤에 선 설소백에게로 향했다.

설소백은 입맛을 다시며 청명의 손에 들린 뜨거운 간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저는 고기 말고 그걸로 주시면 안 됩니까? 북해에서는 순록 생간이 아주 그냥 별미라서.”

“⋯⋯.”

“그리고⋯⋯ 아까부터 피가 자꾸 땅에 떨어지는데, 저걸 아깝게 왜 버리십니까? 저게 얼마나 몸에 좋은 건데.”

“⋯⋯.”

“버릴 거면 저 주십시오! 우리는 없어서 못 먹는 거라서요.”

“어⋯⋯. 그, 그래라.”

“감사합니다, 도장!”

설소백이 반색하고 기뻐했다. 군침을 흘리며 사슴을 향해 다가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청명은 문득 생각했다.

천우맹을 하나로 엮는다는 게 어쩌면 생각보다도 더욱 어렵고 끔찍한 일일 수도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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