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4화.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거야. (4)
조걸이 눈을 부라리자 백천과 임소병, 그리고 윤종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없는 사람들입니까? 예!”
“그⋯⋯.”
“어⋯⋯.”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챙길 건 챙겨야지! 어떻게 합류할지 방법도 마련 안 해 주고 저 뒤에다가 버려두고 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예?”
물론 여러모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쓴소리를 듣고 있는 이들도 대체 자신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질러 버렸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래서 내가 의식을 놓을 수가 없다니까! 잠시만 한눈팔면 사고를 치는데 제가 어떻게 쉽니까, 제가!”
그 지적을 하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조걸이 놈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위장을 바늘로 쿡쿡 쑤셔 대고 있었다. 살다 살다 조걸이 놈에게 쓴소리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
“내가 그래도 사숙이라고 믿었는데, 어휴⋯⋯. 믿을 인간을 믿어야지.”
백천의 고개가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하지만 조걸은 피도 눈물도 강북에 두고 왔는지 그 축 처진 어깨를 보고도 위로는커녕 되레 더 매섭게 다그쳤다.
“지금 고개만 숙인다고 될 일입니까? 대책을 세워야지, 대책을!”
그 말도 맞다.
결국 백천은 말없이 제 옆에 있는 임소병을 슬쩍 돌아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소병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 내가 이런 기본적인 걸 놓치다니⋯⋯. 내가 백천 도장이랑 같은 수준이라니⋯⋯.”
이 새끼가?
백천이 눈을 부라렸지만, 임소병은 정말 절망한 모양으로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아예 입에서 혼이 빠져나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얼굴에 대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독촉할 수가 없었다.
백천은 떨떠름한 얼굴로 조걸을 다시 보았다.
“이, 일단 여기 좀 설까?”
“⋯⋯사숙.”
“응?”
“왜 청명이 놈이 사숙만 보면 눈이 돌아서 욕을 해 대는지 지금 처음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 건 이해 안 해도 되는데.
“도대체가⋯⋯. 아악!”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조걸이 순간 비명과 함께 제 입을 움켜잡았다. 옆에서 불시에 날아든 검집이 그의 입을 찰싹 때린 것이다.
“⋯⋯시끄러워. 머리 울려.”
유이설이 들고 있던 검집을 힘없이 내리고는 당소소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아, 아니, 사고! 지금 머리 울리는 게 중요합⋯⋯.”
“시끄러워.”
“⋯⋯.”
백천에게는 대들어도 유이설에게는 차마 대들 수 없었는지 조걸도 역정 내기를 멈추고 입을 삐쭉거렸다.
“남궁 소가주!”
그때 남궁도위가 이끌던 이들과 함께 합류했다. 그 모습을 본 해남 제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일었다. 혹시 중간에 길을 잃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저들이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반면 화산 제자들의 얼굴은 조금 더 희게 질렸다.
“사숙.”
“사형.”
“동룡아.”
“방금 어떤 새끼야?”
백천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이내 모두의 칼날 같은 눈빛을 보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앞쪽으로 합류한 남궁도위가 곧장 물었다.
“청명 도장은 아직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
그 순간 백천은 이해했다. 청명이 왜 때때로 자신을 보며 속이 터져 죽으려고 했는지⋯⋯. 사람이 눈치가 없다는 건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합류를 안 한 겁니까? 당연히 대책은 있겠지요?”
“⋯⋯.”
“없어요?”
“⋯⋯.”
“없어?”
“그, 일단⋯⋯.”
백천이 일단은 아무 말이라도 해서 둘러대 보려고 할 때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아서 오실 겁니다.”
“예?”
모두가 한 방향으로 시선을 틀었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당패는 빙그레 웃었다.
“뭔가 방법이 있습니까?”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그럴 겁니다.”
“⋯⋯말하기가 어렵다니요?”
당패가 겸연쩍게 코를 긁적였다. 그에게는 확실하게 느껴졌다. 백천을 중심으로 퍼져 나오는 당가 비전의 만리추종향이.
당소소는 더는 당가 사람이 아니니 이 추종향을 쓸 수 없고, 당패 역시 추종향을 쓴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향을 백천에게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명확하지 않은가.
다만 이들에게 상황을 단정 지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청명이 어떻게 당가의 추종향을 맡을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청명이 당가의 심법을 전수받아 이 향을 맡을 수 있는 거라면, 당가의 누군가가 외인에게 전하는 게 금지된 무학을 청명에게 전했다는 의미니까.
‘아버님이 그러셨을 리는 없는데⋯⋯.’
생각에 잠긴 당패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은 가주조차 벗어날 수 없는 당가의 절대 철칙이다. 만약 당군악이 청명에게 당가의 무학을 전했다면 당장 가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져도 할 말이 없다.
그나마 가주이니 그 정도에서 수습해 볼 일인 거지, 만약 가주가 아닌 이가 그런 일을 벌였다?
‘무공을 폐하고 전신의 힘줄을 끊는 벌을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진대⋯⋯.’
그런데 누가 감히 그런 미친 짓을 벌였단 말인가?
제정신이 아닌 미친놈이거나, 가주조차 뭘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강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일 테다. 그런데 지금 당가에는 그런 미친놈도, 강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무슨 말을 한다 해도 훗날 문제가 될 수 있다. 그의 생각 없는 말 한마디로 인해 당군악의 권위에 치명적인 흠집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저 얼버무리며 겸연쩍게 웃을 수밖에.
“저기, 소가주⋯⋯.”
“아, 형님! 어디 동네 바보처럼 실실 웃지 마시고 대답을 해 보시라니까요!”
당패의 웃음에서 미묘한 기색을 눈치채고 눈치만 살피던 이들이 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남궁도위를 돌아보았다.
남궁도위는 속이 터진다는 듯 덧붙였다.
“벙어리입니까?”
“⋯⋯.”
도위야. 성격이 많이 험해졌구나⋯⋯. 하늘에 계신 전대 가주님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슬퍼⋯⋯. 아니, 그 양반이면 좋아했을 것도 같고⋯⋯.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남궁도위의 눈에 드물게도 광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아니⋯⋯!”
하지만 그때.
“뭔데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
“헉!”
“청명아!”
어느새 유령처럼 나타나 곁에 있는 청명이 놈을 보고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모두의 얼빠진 시선을 받으며 그는 피식 웃었다.
“뭐야?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살아 왔네.”
“안 뒈졌네.”
“에이, 아쉽다.”
“늦어.”
조걸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어떻게 찾아온 거냐? 너는 해남의 표식을 보는 법도 모른다며?”
“쯧쯧. 하여튼 애송이들이란. 이 어르신은 다 방법이 있단다. 이게 연륜이라는 거지.”
“네가 제일 어려, 미친놈아!”
선두에 있는 이들은 언제 심각했냐는 듯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뒤쪽에서 따라 달리던 곽환소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동료라⋯⋯.’
그는 알 수 있었다. 서로 험악한 말을 늘어놓는 와중에도 모두가 화산검협의 몸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뒤쪽에서 혼자 전투를 벌이는 동안 혹시나 그의 몸이 더 상하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살피는 것이다.
게다가 화산검협이 등장하고 나니 순식간에 활기가 돌아왔다. 그가 다시 합류해서 딱히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제들에게 힘을 주는 듯 보였다.
‘저런 게 동료의식이라는 건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해남에는 저런 동료 의식이 없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이들 간의 관계가 이제 함께 움직인 지 몇 해 되지 않는 이들보다 못한 것이다.
곽환소는 어째서 청명이 해남을 제대로 된 전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장문인께서는?”
청명의 질문에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합류하지 않으셨다.”
“왜? 문제가 생기진 않은 것 같던데?”
문파의 표식을 확인하고 뒤를 쫓는 일이라면 가장 능숙해야 할 이가 금양백이다. 그런 이들의 합류가 가장 늦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
“그래서다.”
“음?”
“표식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만큼, 후미를 맡겠다고 하시더구나.”
“흐응?”
청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먼 곳을 잠시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시켰어?”
“내 주제에 장문인께 그런 일을 시킬 수 있겠냐? 본인께서 그리하겠다고 하시더라. 혹 문제가 생겨도 그쪽은 바로 합류할 수 있다고 하시며.”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해남은 그저 백천이 내리는 명을 기다리거나, 그 명에 반발하는 것만 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보아하니 아직 여력이 남은 장로들을 위주로 후미를 방비하고, 젊은 이들을 앞으로 보낸 것이 분명하다.
뒷짐을 지고 고아한 척하던 이들이 목숨을 걸고 사지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해남도, 협곡, 그에 이어 십만대산까지 이어진 격전이 그들을 장로가 아닌 검수로 만든 것이다.
‘이제야 써먹을 수 있겠네.’
이것만으로도 청명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기준에는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
“연락법은?”
“일단 딱히 없다.”
하기야 연락은 그쪽에서 해 올 테니 별문제 없을 것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뒤쪽에서 달리는 이들의 상태까지 확인한 청명은 피식 웃었다.
“개판이네.”
“⋯⋯솔직히 그렇지.”
아직 좋다 할 상황은 분명 아니다. 해남의 제자 중 많은 이들이 부상자라 거동이 어렵고, 후미로 처진 인원들을 감안한다 해도 그 수가 확연히 줄었다.
의식을 잃은 이들을 업고 들고 달리느라 속도도 많이 높일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대패를 당하고 살길을 찾아 도주하는 패잔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청명도 백천도 그 사실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합류에 성공했고, 그 결과 사패련의 포위망을 완벽하게 돌파하여 강남을 질주하고 있다. 입은 피해가 크다지만 광동에서 벌어졌던 격전의 승리자는 누가 뭐라 해도 천우맹과 해남이었다.
청명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이대로 장강까지만⋯⋯.’
지금 보기에, 변수가 없다면 그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래. 변수만 없다면 말이다.
청명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삐죽삐죽 음산하게 솟아오른 산맥들을 바라보는 두 눈에 묘한 빛이 어렸다.
❀ ❀ ❀
푸드드득.
호가명의 손목 위에 앉아 있던 붉은빛 매가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삽시간에 저 먼 북쪽 하늘로 쏘아져 갔다.
호가명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의 앞에서 달리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후욱! 후욱! 후욱!”
유공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처음 표식을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못한 채 달리는 중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는 처지지 않도록 달리는 것과 동시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문파의 표식도 찾아내야 한다.
당연히 체력이 급격히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거기에 마음까지 복잡하니 안팎으로 모든 것이 그를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저기 너희의 표식이다.”
들려온 목소리에 유공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앞에 선 커다란 나무에 해남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재빨리 표식을 해석한 그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북⋯⋯.”
“조금 전과 같은 형태군. 북동이다. 계속 가지.”
순간 유공이 멍하니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호가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되레 유공을 바라보았다.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유공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호가명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에 날아들었다.
“수작질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네가 남기고 온 가족들이 모두 갈기갈기 찢겨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유공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눈에 거대한 공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호가명의 손바닥 안에 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거대한 손바닥 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