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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53화 (1,354/1,567)

1353화.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거야. (3)

파아아앗!

주변 경관이 일그러지고 길게 늘어난다. 땅을 박찬 청명이 더욱더 가속하며 앞으로 쏘아졌다.

‘이쪽인가?’

눈을 살짝 찌푸린 청명은 방향을 틀어 더 가속했다.

코끝에 느껴지는 선명한 향이 그를 이끌고 있었다.

그 향을 따라 이동하는 그의 뇌리에 과거 주고받았던 대화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 나는 이런 거 필요 없다니까?

- 그냥 시키는 대로 좀 익히십쇼. 한 번만 배워 두면 써먹을 데가 많다니까 그러네!

- 내가 개도 아니고, 냄새 맡는 법을 익혀서 뭐 어디 쓰라고?

- 술 냄새 맡을 때는 개새끼가 따로 없더구만.

- 뭐, 이 새끼야?

청명의 입가에 절로 낮은 미소가 지어진다.

이 짙은 풀 냄새 사이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향은, 다름 아닌 당가 비전 만리추종향(萬里追從香)이었다.

하오문이나 개방에서 사람을 추적할 때 사용하는 향. 그에 맞는 기공을 익힌 이들은 이 향을 놓치지 않는다. 이름처럼 만 리 밖에서 향을 맡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몇십 리 정도는 문제없이 쫓을 수 있다.

‘당가주한테서 미리 받아 놓기를 잘했지.’

물론 만리추종향을 내어 놓는 당군악의 묘한 눈빛을 버터 내야 했지만, 이 정도면 그만한 모험을 감수하고 수고를 할 가치는 충분했다.

향은 둔해 빠진 동룡이 놈한테 묻혀 두었으니, 길이 엇갈릴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향을 따라 달리기만 해도 자연히 선두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던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청명은 슬쩍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두어 번 손을 쥐었다 펴 본 그는 고개를 만족스레 끄덕였다.

성치 않은 몸으로 꽤 오래 싸웠음에도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힘이 더 솟는 기분이었다. 토굴에서 나설 때의 몸 상태가 만전에 비해 칠 할 정도였다면, 지금은 적어도 팔 할 이상이라 평가해야 했다.

‘생각 이상이군.’

물론 과거의 청명도 몸 안에 흐르는 도가 계열 내력의 덕을 많이 보았다.

수도 없이 상처를 입고 때로는 목숨이 위험할 만큼의 부상을 당하고도 마지막까지 싸울 수 있었던 것 역시, 따지고 보면 치유와 회복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도가 계열 내력 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육체가 보여 주는 회복 속도는 그런 청명의 예상조차 가뿐히 뛰어넘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고 내력을 끌어 올릴 때마다 몸 안에 흐르는 청정한 내력이 탁기와 노폐물을 밀어 내고 망가진 육체를 절로 수복한다. 마치 자신이 머물 집을 스스로 수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自然)이라⋯⋯.’

천하에서 가장 맑은 기운이란 천하에서 가장 자연에 가까운 내력이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자연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무너지고 허물어져도 시간이 흐르며 제 모습으로 돌아가기에 자연이 아니던가?

그래, 마치 지금의 화산처럼 말이다.

타앗!

청명의 발이 땅을 사뿐히 밟았다. 그리 큰 힘을 실은 것도 아닌데 다리를 타고 흐른 내력이 그의 몸을 가볍게 띄워 올렸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몸은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나아가는데, 막상 눈에 보이는 세상은 더없이 빠르게 그를 스쳐 간다.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두 가지가 공존하는 순간, 당연히 여겨 오던 감각들이 모두 뒤엉키고 모호해졌다.

파아아앗!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더욱 빠르게 가속한다.

이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까지 도달한 청명의 눈이 점차 초점을 잃어 갔다.

‘사람 역시 자연 중 하나⋯⋯. 하지만 그 행위에 의지가 담긴 것은 곧 인위(人爲). 자연이란 인위를 배격하고 원초로 돌아가는 것. 그러니 자연이란 곧 사람을 배제하는 것.’

초점을 잃은 그의 두 눈엔 형언할 수 없이 깊은 무언가가 담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이 자연의 일부라면 사람의 의지 역시 자연의 의지일 터, 어찌하여 그 의지를 인위라 배격하는가? 의지가 담긴 것과 의지가 담기지 않은 것. 하나 동물 역시 그 행위에 의지가⋯⋯.’

사고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그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사고의 흐름은 이내 도도한 강처럼 흘러 그에게 스몄다. 감각이 확장되는 동시에 모호해지고, 세상이 선명해지는 동시에 흐려진다.

나와 세상을 나누는 경계가 흐려져만 간다.

흐르고 흐른다. 하지만 결국 그 흐름은 다시 처음으로 이어진다.

음과 양이 서로 맞닿는 태극의 형태. 하지만 그 형태는 이내 다시 흐트러져 일그러진 원의 형태로 화했다.

‘원이란 동등한 것.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무한히 이어지는 것. 삶이란 끝인 동시에 시작이며, 또한 맺음과 동시에 다시 이어지는⋯⋯.’

“어?”

청명이 순간 눈을 크게 치떴다. 두어 번 끔뻑이던 그는 이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와, 씨! 이걸 놓치네!”

방금 그는 분명 깨달음의 영역에 들었다. 그 영역에 마지막으로 발을 들였던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벽을 넘는다는 것과도 같다. 이는 무인으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거다.

본디 무학을 익힐 때 맞닥뜨리는 벽은 두 가지다. 육체의 벽과 정신의 벽. 그의 육체는 아직 과거에 이르지 못했지만, 정신의 영역은 과거를 넘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런데⋯⋯.

“응?”

그런데 왜 깼지?

보통 깨달음이라는 건 한번 들면 이리 쉽게 깨지는 않는다. 보통은 사유의 끝에 부족함을 느끼고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법인데? 그런데 지금은 마치 뭔가에 가로막힌 듯 강제로⋯⋯.

까딱. 까딱.

청명의 발끝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제야 청명은 제 발에 아까부터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앞에 펼쳐진 드넓은 창공이 뒤늦게 보였다.

“하늘⋯⋯?”

땅은 까마득하게 아래로 펼쳐져 있다. 그리고 뒤로는 그가 언제 박차고 온 건지도 모를, 깎아지른 절벽이 보였다.

와,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뛰었구나. 참 멀리도 뛰⋯⋯.

“아아아아아아아악! 야, 이 미치이이이이인!”

청명의 몸이 쾌속하게 추락하며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팔다리를 아무리 허우적거려 봐도 잡을 곳도, 닿을 곳도 없다. 벌써 삼십 장은 넘게 멀어진 절벽을 무슨 수로 잡겠는가? 그가 손행자(손오공)도 아니고.

“히이이이이익!”

대경할 속도로 땅이 가까워져 오자 청명은 황급히 장력을 마구 뿜었다. 그 반동으로 속도가 조금이나마 줄었다.

그때 청명의 눈에, 높이 솟은 소나무 가지가 보였다. 굵직하게 삐죽 솟은 그것을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잡아야 해!’

허공을 강하게 차며 몸을 옆으로 밀어 낸 청명은 손을 힘껏 쭉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굵은 나뭇가지를 단번에 낚아챘다.

‘돼, 됐⋯⋯.’

우지끈!

“어?”

쿠우우웅!

끝내 얼굴부터 땅에 처박힌 청명의 몸이 애처롭게 바르르 떨리다가 늘어졌다.

털썩.

그의 옆으로 부러진 소나무 가지가 무심하게 나뒹굴었다.

그래도 다행히 죽지는 않아서, 그의 코에서 이내 콧김이 후욱 뿜어져 나왔다. 바짝 마른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끄으으으⋯⋯.”

양손으로 힘겹게 땅을 짚고 얼굴을 땅에서 들었다. 코피가 콸콸콸 시원스레 쏟아졌다.

나무가 부러지긴 했지만, 어쨌든 속도를 줄여 준 덕분에 뒈지지는 않았다. 그게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생각을 좀 해 봐야겠지만.

“⋯⋯끄으으으.”

뒤틀린 코를 맞추고 코피를 팽 풀었다. 시뻘건 코피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청명은 처연한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재수가 없으니 깨달음에 들어도 절벽에서 떨어지네⋯⋯.

“깨달음 두 번 들었다가는 진짜 황천 가겠다! 이게 말이나 되냐? 이게?”

등선하고 싶다 그랬지, 누가 곧장 황천 가고 싶다고 했냐?

“뭔 달리는 와중에 깨달음이 와?”

청명은 아쉬운 마음을 어쩌질 못하고 제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절벽만 아니었어도 뭔가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눈앞에 절벽이 나타나는 바람에 깨달음에서 강제로 밀려났다. 곱씹을수록 속이 뒤집혔다.

물론 청명도 알고는 있다. 그 사실에 굳이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한번 들었던 깨달음은 언제고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니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 괜히 자꾸 아쉬워하고 집착하다 보면 되레 더 멀어지는 게 깨달음인 것이다.

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아이고오오오! 아까워 뒈지겠네!”

청명은 아예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게거품을 물었다.

안다고 다 할 수 있으면 그게 청명이겠는가? 알아도 위장이 뒤틀리니 청명이지.

지금 정신적으로 조금 더 나아간다고 해서 과거의 무위를 단번에 되찾아 장일소고 뭐고 슥슥 썰어 버릴 경지에 오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결 수월해지기는 했을 텐데!

“왜 하필 저기 절벽이 있고 지랄이야! 이래서 사람 가는 길은 아예 산 깎고, 강 메워서 다 평지로 만들어 버려야 하는 건데!”

- 천존이시여. 저게 도삽니다.

“카악! 좀 닥치쇼!”

청명이 허공을 향해 불을 뿜었다.

“사람이면 낄 때, 안 낄 때를 가릴 줄도 알아야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뭔 일만 났다 하면 앉을 데를 모르고 엉덩이부터 슬그머니 들이밀어!”

격하게 하늘을 향해 삿대질해 대던 청명이 순간 움찔하고는 손을 멈췄다. 귓가에 청문의 목소리가 이렇게 생생히 들려온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어서였다.

“⋯⋯쯧.”

뭔가 멋쩍어진 그는 공연히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사람인지라 십만대산을 넘고 나니 마음이 좀 풀리는 모양이었다.

“오래 사니까 별 경험을 다 하네.”

코웃음으로 어색함을 날려 버린 청명은 그새 많이 희미해진 향을 쫓아 부리나케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다시 바람처럼 나아갔다. 조금 전과 딱히 다를 것은 없었지만, 역시나 깨달음의 실마리는 쉽사리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기는 했지만 미련을 털어 내고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없이 달려 나가던 청명의 눈에 묘한 빛이 피어났다.

‘그건 뭐였지?’

강처럼 도도히 흐르던 흐름. 그 시작과 끝이 서로 맞닿아 휘돈다. 마치 음과 양이 어우러지는 태극처럼. 하지만 그 음과 양은 이내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이어졌다.

그건 태초의 원. 혹은 무극(無極)이라 불러야 할 무언가.

청명 역시 무극이라는 개념을 알고는 있지만, 심상의 세계에서 무극의 형태를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사실은 분명 청명을 한 단계 더 이끌어 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청명의 생각하는 것은 그 무극이 아니었다.

깨달음에서 밀려나기 직전, 그는 분명히 보았다.

영원처럼 돌던 원의 흐름이 무언가로 변해 가는 징조를.

‘그 뒤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그건 어쩌면 청명이 아직 닿지 못한 곳. 아니, 이제껏 누구도 닿지 못해 개념으로조차 전해지지 않은 무언가일지 모른다.

그 원의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열릴지도 모른다. 도무지 닿지 않는 절대적인 강대함. 그 신과도 같은 자와 대적할 방법이.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런데⋯⋯.’

청명의 얼굴에 순간 알 수 없는 복잡한 빛이 깃들었다. 만일 그의 예상이 맞다면, 그 원은 더없이 상서로운 것일 터. 그가 배워 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치와 세상의 근원을 담은 깊고 깊은 진리일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왜⋯⋯ 불길함이 느껴지지?’

찾고자 했던 것에 닿았음에도 어째서 이토록 마음이 무거워진단 말인가? 대체 그 뒤에 무엇이 있기에? 그가 보아야 하는 것이⋯⋯.

“쯧.”

생각에 잠겨 가던 청명이 가볍게 혀를 차고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배가 불러서는.”

뇌리를 잠식해 오던 위화감을 단번에 털어 낸 청명은 한결 산뜻해진 얼굴로 다리에 힘을 실었다.

‘생각은 나중에. 지금은 할 것만 하자.’

발이 향을 쫓아 경쾌하게 땅을 박찼다.

드높은 산지로 이어지는 숲을 가르고 나아가는 그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따뜻하게, 하지만 그저 무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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