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2화.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거야. (2)
“으⋯⋯.”
배 속이 뒤집히는 감각. 몸이 빙글빙글 돌고, 어딘지 모를 바닥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느낌. 익숙하지만 또 한없이 낯선 그 감각과 함께 조걸은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무언가 빠르게 스쳐 지가나는 모습이 연이어 들어왔다. 다시 한번 질끈 눈을 감았다 뜬 그는 주변을 살피다 쉰 목소리로 입을 뗐다.
“⋯⋯뭐야.”
“깼냐?”
조걸은 그제야 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사형?”
“그래.”
익숙한 사람의 뒤통수가 앞에 있었다. 조걸은 그제야 자신이 윤종의 등에 업혀 이동 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십만대산을 벗어나서 강북을 향해 북상하는 중이다.”
“벌써⋯⋯. 쿨럭! 쿨럭! 아으⋯⋯.”
오랫동안 목을 쓰지 않아서인지 잔기침이 계속 터져 나왔다.
“좀 더 쉬어라.”
“이제 괜찮습니다. 내려 주십⋯⋯.”
“아직은 더 쉬어.”
윤종의 단호한 목소리에 조걸이 입을 닫았다. 사실 허세를 부리기는 했지만, 몸 상태는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등에 업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버티는 게 쉽지 않을 지경이다.
“소소야.”
“네. 벌써 살피고 있어요.”
“⋯⋯깜짝이야.”
조걸이 잘 돌아가지 않은 목을 꾸역꾸역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유이설을 업은 당소소가 그의 뒤로 바짝 붙어 등에 손을 대고 있었다.
“맥은 정상이고⋯⋯. 내상은 이제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문제는 외상인데, 쉽게 아물 상처가 아니니까 한동안은 조심해야 해요.”
조걸이 눈을 끔뻑이고는 당소소의 등에 업힌 유이설을 보았다. 유이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가 입은 상처와 유이설이 입은 상처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는 잠깐 무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유이설은 정말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서 싸웠으니까. 그러니 의식을 차리는 데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잠깐⋯⋯.’
그 사실을 깨달은 조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앞쪽에서 달리고 있는 백천과 임소병은 물론,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해남의 제자들까지 두루 살핀 그가 눈을 부릅떴다.
“사, 사형! 청명이는요?”
“왜? 죽기라도 했을까 봐?”
“아니, 그 새끼가 어떤 새낀데 죽습니까? 그게 아니라, 그 새끼 어디 갔냐고요. 몸이 걸레짝이 됐었는데.”
“진즉에 깨어나서 만인방 놈들 썰어 대는 중이다.”
“그 몸으로요?”
“본인은 멀쩡하다던데.”
“⋯⋯아.”
이쯤 되면 정말 농담이 아니라 뼈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 맞는지를 의심해 봐야 할 지경이다. 상처를 입어도 청명이 가장 많이 입었고, 지쳐도 청명이 가장 많이 지쳤을 텐데.
유이설은 아직 혼수상태고, 조걸은 겨우 의식을 차린 참인데 진즉에 일어나서 싸우고 있다고?
“⋯⋯사람 새낀가?”
“나도 의심스럽기는 하다.”
조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위험한 건 아닙니까?”
“그런 상황까지는 아니다. 물론 위험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협곡에서의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야.”
확실히 조걸의 눈에도 그래 보이기는 했다. 앞서가는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뒤쪽에 있는 이들의 상태 역시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좋아 보였으니까.
조걸이 적당히 의식을 차렸다고 생각한 윤종이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다른 분들은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겁니까?”
“그래.”
“⋯⋯아니, 그러다 길이 엇갈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해남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혹시 몰라 속도도 적당히 조절하고 있다.”
“음.”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아한 부분은 꽤 있지만, 다들 고심해서 짜낸 작전이다. 속 편하게 드러누워 있던 그가 일일이 따질 만한 부분은 아니다.
그리고 백천과 임소병이 세운 계획이라면 뭐라도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그때 윤종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이 미친놈아.”
“⋯⋯예?”
“눈 뜨자마자 남 걱정이냐? 네 생각이나 해라! 몸뚱이는 어디서 얼기설기 기워 놓은 헝겊 쪼가리처럼 되어 놓고는.”
그 말에 조걸은 말없이 슬쩍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너른 소매 틈으로 드러난 팔뚝에 지네처럼 꿰매 놓은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거, 잘 좀 꿰매지. 뭔 의원이라는 애가 섬세함이⋯⋯.”
“뭐요? 입 꿰매 달라고요?”
“⋯⋯아닙니다.”
등 뒤에서 날아든 날카로운 당소소의 목소리에 조걸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지금은 쟤를 못 당한다. 아니, 사실 평소에도 못 당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하여튼⋯⋯.
그때 옆쪽에서 달리고 있던 이자양이 목소리를 높였다.
“계속 직진입니까?”
“북동쪽으로!”
“예!”
말을 끝낸 임소병이 즉시 방향을 틀었다. 그 방향을 확인한 이자양 역시 곧장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을 전개했다.
카가각!
그가 뿜어낸 검기가 전방에 우뚝 솟은 나무 상단에 미세한 검흔을 새겼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도 힘든 미세한 흔적이었다.
조걸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달리는 와중에 저걸 볼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는구나.”
“⋯⋯아니⋯⋯.”
그 의문을 풀어 준 건 금세 제자리로 돌아온 이자양이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다른 문파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해남 사람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으니까요.”
“예?”
이자양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해남의 제자들은 어릴 적부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던 이들입니다. 망망대해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넘실대는 수면에 떠오른 작은 기포 하나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 법이지요.”
“어⋯⋯.”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눈이 좋습니다. 흔적을 놓칠 염려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그 의미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초원에 사는 사람들이 눈이 좋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인가 보다.
“사형.”
“응?”
“⋯⋯저거 우린 봐도 죽어도 모르겠죠?”
“있는지도 모를걸?”
“그러게요⋯⋯.”
“문파마다 저런 비전 하나씩은 다 있다고 하더구나. 막상 보니 명불허전이긴 하다.”
“문파마다요? 우리도 그런 게 있습니까?”
“있었는데요.”
“예?”
“없어졌습니다.”
“⋯⋯아.”
불탔구나. 그렇지. 화산에 원래부터 없었던 건 없지. 활활 잘도 타 버렸을 뿐.
“어쨌든 우리가 못 알아보는 거면 사파 놈들은 절대 못 알아보겠네요.”
“그럴 거다. 안 그래도 지금 저 표식 하나를 믿고 방향을 이리저리 틀고 있다. 혹시라도 우리 흔적을 발견하더라도 진행로를 절대 짐작하지 못하게 말이다.”
“아아.”
어쩐지 나무에 표식을 새기는 동시에 방향을 급격하게 틀더라니⋯⋯.
“아군이 알아볼 수만 있으면 되겠네요.”
“알아본 모양이네.”
“예?”
“뒤쪽에.”
윤종의 말에 조걸이 뒤를 돌아보았다.
윤종의 말과는 달리 그의 눈에는 딱히 뭔가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억지로 기감을 끌어 올려 보니, 확실히 우거진 숲 저 뒤쪽에서 뭔가 다가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 긴장이 팽팽하게 온몸을 당겼다.
‘적?’
하지만 그 우려는 곧 풀렸다. 선두에서 다가오는 이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당 소가주시구나.”
윤종이 말을 하기 무섭게 뒤쪽에서 당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 달려오는 해남도들의 모습도 분명히 보였다. 나뉘었던 이들 중 한 무리가 문제없이 합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와, 저걸 진짜 알아보네.”
“그러니 비전 아니겠느냐?”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문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라는 말이 괜히 조걸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사형.”
“응?”
“우리도 돌아가면 하나 만듭시다, 저런 거.”
“⋯⋯왜?”
“쓸모가 있어 보이잖습니까. 그리고⋯⋯.”
조걸이 뭔가 겸연쩍은 듯 목소리를 살짝 죽였다.
“뭔가 부럽기도 하고.”
그 말에 윤종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망할 놈은 걸레짝이 되었다가 이제 겨우 의식을 차려 놓고는 벌써 화산 이야기부터 하고 있다. 몸도 성치 않을 텐데 말이다.
“그래, 꼭 만들자꾸나.”
그는 입 안에 맴도는 다음 말을 조용히 눌러 삼켰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당패가 완전히 합류했다. 그는 의식을 차린 조걸을 보며 화색을 띠었다.
“조걸 도장!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끄떡없습니다!”
조걸은 팔을 접어 알통을 보여 주려 시늉을 하다 얼굴을 콱 일그러뜨렸다.
“아야야⋯⋯.”
“가만히 좀 있어라, 망둥이 같은 놈아!”
“거, 승차감이 영⋯⋯.”
“뭐, 이 새끼야?”
너스레를 떨어 대는 조걸을 보며 당패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리 오랜 시간 알아 온 것도 아니고, 말을 많이 섞어 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걸이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조용.”
“오! 사고 깨어나셨습니까?”
“⋯⋯울려, 머리. 조용히 좀.”
유이설이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앓듯이 말했다.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약간⋯⋯ 말하는 게 옛날로 돌아가신 것 같은데? 이걸 퇴행이라고 하던가?”
“사형, 진짜 뒈질래요?”
“사형과 뒈질래요는 잘 안 어울리지 않니?”
“화산에선 잘 어울려!”
“그 말도 맞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저 사람이 의식을 차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일행의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아직 안심이란 말을 꺼낼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말이다.
어쩌면 이게 조걸이 가진 진짜 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모르지. 그건 사숙과 녹림왕이 정하고 있는 거니까. 아니, 어쩌면 청명이 그 망할 새끼가 미리 정해 둔 건지도 모르고.”
“하기야.”
조걸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앞쪽에서 백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선은 방향이고 나발이고 놈들과 거리를 벌리는 게 먼저다. 놈들도 우리를 막으려고 방어선에 집중한 덕에 이쪽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어.”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십만대산까지는 정말 지옥 같았지만, 막상 십만대산을 뚫고 나니, 딱히 그들을 막아서는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성급한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대로 거리만 벌릴 수 있다면 장강까지 문제없이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쪽에서 갑자기 누가 떡 하고 나타나지만 않으면 말이죠? 뭐, 마교의 주교라든가 그런⋯⋯.”
“아, 닥치라고!”
“조동아리 좀!”
“이 새끼 누가 다시 좀 재워라!”
발작적으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걸이 낄낄 웃었다.
이미 많은 이들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을상을 하고 있을 생각은 없다.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 슬퍼하는 건 모두 무사히 빠져나간 다음에도 충분하니까.
‘어떻게든 장강까지만⋯⋯.’
그 순간, 조걸의 고개가 조금 삐딱하게 꺾였다.
“어, 잠깐만요. 그런데⋯⋯.”
“뭐, 또 이 새끼야!”
“사형은 입 다물어요! 진짜로 꿰매 버리기 전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 표식 이건 해남파 분들만 알아볼 수 있다며?”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을 하냐? 어디 머리라도 다쳤어?”
“아뇨. 제 말은⋯⋯ 그럼 청명이 놈은 어떻게 알고 쫓아오는 건데요?”
“응?”
순간 모두의 멍한 눈이 조걸에게로 집중되었다. 조걸은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덧붙였다.
“그⋯⋯ 제가 멍청해서 이해 못 한 거겠지만, 청명이 놈은 이 표식을 모르잖아요. 그런데 지금 제일 뒤에 있다면서요.”
“⋯⋯그렇지?”
“그럼 그놈은 우리가 어디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오는 겁니까?”
조걸이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보나 마나 잠깐 타박이 쏟아진 후 누군가가 그 답을 돌려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타박은 날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뭔가 어색한 얼굴로 슬쩍슬쩍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어?’
어⋯⋯.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조걸이 마지막 희망을 담아 앞을 바라보았다. 이런 멍청한 것들이야 몰라도, 적어도 저 두 사람은⋯⋯.
“어⋯⋯.”
하지만 그 순간 조걸은 보았다.
임소병과 백천. 일행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가장 믿음직한 두 사람이 뭔가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조걸을 보고 서 있었다.
“그⋯⋯러게?”
“⋯⋯.”
“어떻게 오는 거지?”
“⋯⋯.”
믿을 놈들을 믿어야지⋯⋯. 믿을 놈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