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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51화 (1,352/1,567)

1351화.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거야. (1)

사색이 된 홍대광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혀, 현재 사패련에서 장일소가 홍견과 다른 정예들을 대동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모, 목적지는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대충 남쪽이라는⋯⋯.”

“확실하오?”

홍대광이 대답 없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땀을 얼마나 뻘뻘 흘리고 있는지, 얼굴만 봐도 그 다급함과 긴장감이 느껴졌다.

“저, 저희 개방이 강남의 정보통을 대부분 상실하긴 했지만, 사패련의 본단마저 감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본단이나 겨우 지켜보고 있는 수준입니다만⋯⋯. 가, 각설하고!”

홍대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지난 항주마화 이후로 장일소가 직접 움직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개방도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게다가 홍견과 만인방의 정예까지 동원했다는 건 무언가 일을 벌여도 단단히 벌일 거란 의미 아니겠습니까?”

이야기를 듣는 동안 현종의 얼굴은 내내 굳어 있었다.

개방은 아직 청명을 비롯한 천우맹 일행의 상황을 모른다. 그러니 이런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해남으로 간 이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는 현종에게는 장일소의 목표가 명확하게 보였다.

“개방이 이 소식을 알았다는 것은, 구파 역시 알았다는 의미겠구려.”

홍대광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개방이야 여전히 구파일방의 소속이고, 그들이 얻은 정보는 구파에 전해지는 게 당연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홍대광이 천우맹에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되레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홍대광은 현종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할 때면 무언가 죄를 짓는 느낌이 드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현종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홍대광에게 깊게 포권 했다.

“감사하오. 소식을 전해 주기 어려우셨을 텐데.”

“이, 이러지 마십시오, 맹주님!”

홍대광이 기겁하며 팔을 내저었다.

“이리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 그리고⋯⋯ 감사는 외인에게나 하시는 거지요. 제가 비록 소속은 개방이라 입장이 애매하긴 하지만, 제가 어찌 화산신룡⋯⋯. 아니, 화산검협과 남이 될 수 있습니까.”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이 아닌 걸 알기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감사를 표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장원의 담 너머로 펼쳐진 장강으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장강은 여전히 수로채의 선단들이 장악하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저 포진을 뚫고 진격하고 싶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기에 더욱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여 수로채의 마수가 닿지 않는 곳을 통해 장강을 넘어야 한다.

현종이 말했다.

“장문인.”

“예.”

“시간이 없소.”

“지금 바로 출정을 준비하겠습니다.”

“미안하외다, 장문인.”

운암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사부님께서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만약 화산의 제자들이 강남에 고립되었고, 이곳에 청명이 놈이 있었다면 그놈이 뭐라 했겠습니까?”

현종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그 표정을 보며 운암은 빙그레 웃었다.

“녀석이라면 당연히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당장 강남으로 가야 한다고 악을 써 댔겠지요. 누가 말려도 듣지 않았을 것이고, 정 안 되면 혼자서라도 주저 없이 강남으로 갔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문인.”

“녀석들이기에 구하러 가는 게 아닙니다. 그나마 녀석들이기에 한순간이나마 이게 옳은 선택인지를 고민한 것입니다. 다른 녀석들이었다면 고민이나 했겠습니까?”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암의 말이 옳다. 지금 위험에 처한 이들이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 같은 제자들이고, 화산이 보듬어야 할 아이들입니다. 주저함도 망설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백의 목숨을 버릴 각오가 없다면, 문파라는 이름은 그저 허울일 뿐입니다.”

운암의 시선이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렇지 않더냐?”

“맞습니다, 장문인!”

평소와 같은 환호도, 구시렁대는 목소리도 없다. 의지견정한 목소리만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현종은 순간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꾸나.”

“예, 장문인!”

현종의 시선이 당군악에게로 향했다.

“가주님.”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더러 이곳을 지키라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맹주님.”

그는 현종이 할 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거기에는 제 자식들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중요한 제 아이들이.”

“하나⋯⋯.”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당군악의 얼굴에 한기가 어렸다.

“당가를 위해서라면 자식의 목숨 따위는 언제든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가의 가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당군악의 얼굴은 냉엄하기 그지없었다.

“당가의 피를 이은 이를 건드린 자에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이는 수백 년간 내려온 당가의 율법이고, 피로써 지켜져야 할 당가의 철칙입니다. 그 철칙은 당가의 존재보다 오히려 우선합니다.”

그 두 눈에 새파란 살기가 차올랐다.

“설령 화산이 가지 않는다 해도 당가는 강을 넘었을 겁니다. 그러니 저에게 이곳에 남으라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가주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당군악의 의지를 꺾을 방법은 없다. 천우맹이라는 이름 때문에 지금껏 참아 온 건 당군악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확실히 당가의 율법은 유명하지요.”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이 말을 꺼낸 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율법에 대한 의무감이, 지금 남궁의 간절함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궁 장로.”

남궁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가문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남궁에 있어 소가주의 존재는 가문 그 자체보다 더 큽니다.”

남궁명은 철갑이라도 쓴 듯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보내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이리된 이상 차선을 택할 수밖에요. 남궁의 차선은 모두가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소가주님을 구해 내는 것입니다. 뒤는 없습니다.”

남궁명에게서 서릿발 같은 한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곁에서 남궁단 역시 비장한 얼굴로 동의를 표했다.

남궁세가는 남궁황을 잃었다. 여기에서 남궁도위마저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궁도 함께 가겠습니다.”

화산과 당가, 그리고 남궁세가가 제 의지를 밝혔다.

“그렇다면 빙궁도 함께 하겠습니다.”

“한 장로⋯⋯.”

“궁주를 잃을 수 없는 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문파라도 더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말에 당군악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빙궁은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빙궁의 송원이 발끈했다.

“어째서입니까? 저희가 이곳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송원!”

한이명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그게 무슨 망발이냐! 천우맹 분들이 우릴 어떻게 대해 주시는지 뻔히 보고도 그따위 말을 지껄인단 말이냐?”

“⋯⋯.”

“한 번만 더 그따위 헛소리를 입에 올린다면 내가 먼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송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한이명은 그를 대신해 당군악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북해빙궁이 보기에야 당가 역시 같은 중원인이겠지만, 사실 당가는 중원에서도 여러 이유로 경원시 여겨지곤 했다. 그러니 이들의 기분은 질릴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빙궁을 대동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더운 강남에선 빙궁 분들의 빙공이 제 위력을 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는 한이명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따뜻한 지방으로 갈수록 빙한기공의 위력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평소라면 그 정도는 상관없다고 호기롭게 외쳤겠지만, 상대가 사패련이라면 그 말조차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또 하나는 이곳이 무주공산이 되어 버리면 저들이 강남으로 진입한 우리에게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 돌아와 다시 이 땅을 밟기 위해서는 저들을 견제해 줄 문파가 꼭 필요합니다.”

한이명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궁주를 구하러 가고 싶은 마음은 그 역시 간절하지만, 그는 지금 빙궁의 궁주를 대신하는 이. 당연히 현실적인 문제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가 뒤를 지켜야 한다면 그건 빙궁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무력과 세가 다른 문파에 비해 부족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무엇보다 한이명을 주저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합류가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현종이 한이명을 향해 깊게 포권 했다.

“설 궁주는 저희가 반드시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역할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한이명이 한발 물러섰다.

당군악의 시선이 이번엔 침묵하고 있는 맹소에게로 향했다.

“같은 의미로, 야수궁 역시 이곳을 지켜 주셔야겠습니다.”

맹소의 눈이 복잡한 빛으로 물들었다. 입술을 한번 실룩인 그가 조금 퉁명스러운 어조로 당군악에게 물었다.

“가주께서는 야수궁도 강남에서는 제힘을 낼 수 없으리라 여기는 것이오?”

“그렇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 야수들을 대동해 은밀히 강을 넘는 건 불가능합니다.”

“⋯⋯.”

“그리고 뒤를 지킬 이가 필요하다면 그 적임자로 궁주님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고 가장 빠른 대처를 해 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 궁주님이라면 당가도 믿고 뒤를 맡길 수 있습니다.”

맹소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천당가가 독랄하고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놈들은 모두 멍청이들이다. 이자의 어디가 이기적이고 독랄하단 말인가?

“⋯⋯그리하겠소.”

이걸로 강남으로 갈 이들이 정해졌다.

화산과 사천당가, 그리고 남궁세가.

맹소가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세 문파만으로 충분하겠소?”

“세 문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음?”

“⋯⋯녹림은 아무리 말려 봐야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요. 녹채 사람들은 죽어도 따라오려고 할 겁니다.”

“음.”

맹소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임소병이 없다면 녹림은 천우맹의 이름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한 곳이다. 그렇다면 제 의지대로 움직이려 할 터.

위기의 순간에도 끝끝내 임소병의 곁을 지켰던 녹채라면 그 선택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제⋯⋯.”

“하지만 두 분, 무작정 강남으로 향할 수는 없습니다.”

남궁명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장 장강을 도하하는 것부터가 쉽질 않을 것입니다. 장강은 수로채에 완전히 장악당해 있고, 우리는 강을 넘을 배조차 마땅하지 않잖습니까?”

“그러니 서둘러 배를 수배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설령 피해 없이 장강을 넘는다고 해도 그 넓은 강남에서 해남으로 간 이들이 어느 길로 북상하는지 모른다면 사막에서 바늘 찾는 꼴이 될 뿐입니다.”

당군악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라 반박하기 어려웠다.

“남궁은 이미 한번 마음만 앞섰다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었습니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실린 둔중한 무게를 모를 수가 없었다.

당군악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냉정한 척하지만, 그 역시 지금 흥분한 것이다. 평소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을 놓칠 만큼.

“그럼⋯⋯.”

“녀석들이 어디로 올지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당군악의 시선이 현종에게로 향했다. 현종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준비만 어서 마쳐 주십시오. 제 수양이 그리 깊지 못해 오래 기다리기 힘이 듭니다.”

말없이 현종을 응시하던 당군악과 남궁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바로 채비를 마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현종이 깊게 포권 했다.

두 사람은 즉시 주위의 제자들을 이끌고 나머지 제자들이 거하고 있는 처소로 달려갔다. 마주 인사를 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고개를 든 현종 역시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머나먼 남쪽으로 향해 있었다.

‘청명아⋯⋯. 이놈들아⋯⋯.’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조금만 참거라. 내가 곧 가마.’

이 목소리가 지친 이들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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