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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50화 (1,348/1,567)

1350화. 놈의 목숨을 거두겠다 하신다. (5)

“사숙! 무슨 일이랍니까?”

“글쎄. 그게⋯⋯.”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사뭇 심각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건 현재 현종이 집무실 겸 처소로 쓰고 있는 전각이었다. 조금 전 천우맹의 중진들이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그 집무실로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 아닙니까?”

“나한테 묻는다고 내가 뭘 알겠느냐?”

백상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백천이 자리를 비운 이상 그가 백자 배의 맏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라고 해서 딱히 특별히 들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이 그런 백상의 처지를 아는 것도 아니니 연신 질문이 쏟아졌다.

종회가 굳은 얼굴로 재차 물어왔다.

“혹시⋯⋯ 해남으로 간 사숙과 사형들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닙니까?”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순식간에 사방에서 험악한 눈빛이 날아들었다. 그 눈빛에 찔끔한 종회가 목을 움츠렸다.

“아, 아니, 그런 일이 아니고서야 다들 저리⋯⋯.”

“사패련이 움직였을 수도 있고, 구파 놈들이 또 헛짓거리를 했을 수도 있지!”

“막말로 사형들은 아직 해남에 도착도 못 했을 텐데 뭔 일이 벌어지는 게 말이나 되냐, 이 새끼야?”

“주둥아리 쫑쫑 꿰매 버리기 전에 다물어라.”

종회가 고개를 푹 숙이자 백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기다려 보자꾸나. 장문인께서 드셨으니 결론이 나면 뭐라도 언질을 주시지 않겠느냐?”

“⋯⋯예, 사숙.”

하지만 화산 제자들의 굳은 얼굴을 도통 풀지 못했다. 아까 처소로 향하는 현종의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 모습만 보아도 해남으로 간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숙, 만약에 말입니다.”

“물을 것 없다.”

“⋯⋯예?”

백상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뭘 물으려는 건지는 알겠지만, 그런 건 굳이 물을 것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뿐이니까.”

“예. 사숙!”

이내 다른 제자들의 얼굴에도 굳은 의지가 서렸다.

모두의 시선이 이젠 옮겨져 있었다. 저 먼 남쪽을 향해서.

천우맹 중진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만인방이 그들을 뒤쫓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러합니다.”

잠시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던 맹소가 앓듯이 말했다.

“만인방이⋯⋯.”

맹소의 얼굴에 잠시 혼란이 어렸다.

“후방의 해남을 치기 위해 만인방이 직접 나섰다는 말입니까? 이런 상황에?”

현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맹소는 의문이 다 풀리지 않은 듯 다시 물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천우맹이 해남도에 도착한 이후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겁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허⋯⋯.”

그는 순간 상황과 어울리지도 않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우연? 아니, 이건 우연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본래 천우맹에선 그리 빨리 해남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정상적인 길로 해남에 향했다면 최소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하지만 천우맹에서 파견한 이들은 비정상적으로 빨리 해남에 도착해 버렸고, 그 덕에 만인방의 손에 해남이 지워지기 전에 그들을 구출해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놈들이 해남을 치는 건 전쟁이 시작될 때인 줄 알았는데, 그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놈들도 알았던 거겠지요.”

당군악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맹소가 의문을 표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자신들이 해남을 친다고 해도 구파일방이 움직이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맹소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장일소는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는 귀신 같은 면이 있는 자다. 법정이 해남을 위해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걸 그 장일소가 놓칠 리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연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당군악에게로 집중되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사실은, 해남으로 간 아이들이 만인방에 쫓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저 강남에서 말입니다.”

맹소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져 오는 걸 느꼈다.

강남은 사패련의 땅. 그곳에서 사패련에게 쫓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 못 할 이가 이 자리에 어디 있겠는가. 백천간두, 절체절명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것이다.

맹소의 시선이 현종에게 가 닿았다.

“하면,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현종은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러자 맹소의 표정이 순간 묘하게 변했다.

얼핏 우둔해 보이는 외양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맹소는 야수궁의 궁주다. 그리고 야수궁은 동물의 특성을 살린 무학을 익히는 만큼, 감각만큼은 천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감각이 지금 말하고 있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현종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고 말이다.

“아이들이 보내온 서찰에는, 강남을 관통해 강북으로 오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얼핏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시퍼런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모두가 알았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제 안에 떠오른 말은 질책이었습니다.”

“⋯⋯맹주님.”

“어찌 그런 무모한 선택을 했는가? 그저 해남을 두고 복귀하면 그만인 것을. 어찌 제대로 온정 한번 나누어 본 적 없는 해남을 위해서 목숨까지 거는 선택을 한 것인가? 그것을 협의라 한다면, 협의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을 칭함이 아닌가?”

모두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내심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했던 말을 지금 현종이 대신 꺼내 준 것이다.

“하지만 그 직후 바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생각입니까?”

“나는 이런 와중에도 옳고 그름을 따져 묻고 있구나.”

순간 모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그들의 내심을 현종이 모두 들여다본 것만 같아서였다.

“아이들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 아이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 아이들이 어찌했어야 더 옳았는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조차 말입니다.”

몇몇 이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현종의 눈빛은 더욱 심유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어찌할 것인지를 물으셨습니까?”

“⋯⋯.”

“뻔한 것을 물으십니다. 당연히 아이들을 구하러 갈 것입니다.”

“저, 저 강남으로 말입니까?”

자리에 모인 이들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강남은 사패련의 땅이다. 그들이 강남으로 향한다면 사패련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전력으로 사패련과 자웅을 겨룬다면 전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일을 현종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린 것이다.

“맹주님, 감정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합니다. 감정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지요. 천천히 따져 보고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해야 하겠지요.”

“맹주⋯⋯.”

“하지만 그리하여 결론이 났을 때, 이미 아이들은 산목숨이 아닐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게 되겠지요.”

맹소는 그때 확신했다. 현종이 달라진 것 같다는 자신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따져야 할 것이 있다면, 일이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희생은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저들은 사패련입니다.”

“함께하지 않으실 분들께서는 이곳을 지켜 주십시오.”

“⋯⋯지, 지금 대체⋯⋯.”

“설득할 시간조차 아까운 상황입니다.”

현종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홀연히 일어났다.

사실 맹소와 당군악은 그런 현종을 어느 정도나마 이해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질 못했다. 눈앞의 현종이 익히 알던 현종이 아닌 것만 같아서였다.

언제나 부드럽게 모두를 다독이고 한마디라도 더 경청하려 들던 현종이 아니다. 지금의 현종은 다른 이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매, 맹주님, 잠시⋯⋯.”

당황한 이들이 현종과 대화를 이어 가 보려 했지만, 그 모든 행위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현종이 일체 망설임 없이 밖으로 향했다.

“어, 어딜 가시는 겁니까, 맹주님!”

모두가 놀라 그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현종이 멈추질 않으니 그들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이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당황했다.

하나는 현종이 정말 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전각을 나서 버렸단 사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나선 전각의 앞에 어느새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여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어, 언제?’

뭔가를 알고 모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들 역시 급작스레 문을 박차고 나온 현종의 출현에 당황한 표정이었으니까.

현종은 모인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장문인.”

“예, 하문하십시오.”

운암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내 감히 장문인을 제치고, 아이들에게 한마디 전해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비록 화산의 장문이라고 하나, 사승의 깊은 관계가 단순한 직위보다 못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고맙소.”

현종이 운암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화산의 제자들을 그 두 눈에 담았다.

“제자들은 듣거라.”

“예!”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즉시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해남으로 간 이들이 만인방에게 쫓기고 있다. 어디 하나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저 강남에서.”

제자들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앞에 서 있는 현종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가는 길은 사패련 무리에게 가로막혀 있다. 목숨을 건다 해도 그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아니, 아마도 그 아이들을 도울 수 없을 가능성이 더 크다.”

화산의 제자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 묻겠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해남으로 간 이들을 도우러 가겠느냐? 그 가치 없는 일에 목숨을 걸겠느냐?”

챙.

가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백상이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말없이 검을 쥔 손을 제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화산의 매화, 그들의 상징이 새겨진 그 가슴에.

챙! 채앵!

연이어 여기저기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산의 제자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제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조금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는 확고한 의지로.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단 한 사람이라도 주저하는 빛을 보였다면 그는 몸을 돌렸을 것이다. 그는 화산의 전 장문인이지만, 그라 해도 제자들에게 죽음을 강요할 자격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주저하지 않았다.

‘애초에 협의란 그런 것이었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효율적인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이다. 그리고 그 하고자 하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가이다.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이 아님에도, 그저 옳기에 따라야만 한다면 그것 역시 협의는 아니다.

화산의 제자들 모두가 눈빛으로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란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이미 망설임 따위는 진즉에 내버렸다는 것처럼.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은 저 강남으로 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맹주니이이이이임!”

누군가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놀라 시선을 돌려 보니 장원의 담을 뛰어넘으며 한 사람이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우, 움직였습니다!”

“움직이다니?”

“사, 사패련이⋯⋯.”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 뒤에 어떤 말이 이어질지는 모두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무겁고도 날카로운 말이, 거대한 정처럼 그들의 머리를 내려쳤다.

“사패련이 움직였습니다!”

❀ ❀ ❀

쿠우우웅!

웬만해선 잘 열릴 일이 없는 사패련 본단의 거대한 정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흐으으음.”

열린 문을 통해 나타난 이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오랜만의 외유로군.”

저벅.그의 발이 본단 밖으로 한 발짝 내디뎌졌다.

굳게 닫힌 문을 갑작스레 열고 등장한 사패련의 련주 장일소를 본 행인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러니⋯⋯ 돌아올 때는 커다란 걸 가져와야겠지?”

장일소의 피처럼 붉은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화산검협의 목 같은 커다란 걸로! 하하하하하핫!”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장일소의 붉은 장포 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그의 뒤로 홍견을 비롯한 사패련의 정예들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진군을 개시했다.

방향은 남쪽, 피 냄새가 짙게 풍겨 오는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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