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9화. 놈의 목숨을 거두겠다 하신다. (4)
“이리로.”
호가명이 짧게 말했다. 유공은 얼굴을 굳힌 채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주변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빌어먹을.’
쥐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다 보면 이 추격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여지없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들리지 않나?”
호가명이 재촉하자 주변의 분위기가 덩달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다시 한번 군사님의 말을 무시한다면 당장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듯이.
유공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었다. 호가명의 가라앉은 눈빛이 유공을 훑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 말입니까?”
“굳이 말을 돌리는 건 용서하지 않겠다. 그건 비효율적인 일이지.”
“⋯⋯.”
“확인하고 싶은 건 하나. 네가 협조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유공의 손끝이 살짝 떨려 왔다.
호가명의 눈빛은 변함없이 무심하고 서늘할 뿐이었지만, 그 앞에 선 유공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저 가라앉은 눈빛이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감히 수작질을 부릴 엄두 따윈 내지 말라고 말이다.
“어떻지?”
호가명이 다시 묻자 유공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입 안에서 바스러졌다.
호가명은 감정 없는 눈으로 그런 유공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이 더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뒤쪽에 있는 이에게로 향했다.
“아⋯⋯.”
갑작스럽게 시선이 제 쪽으로 돌아오자, 유공의 사제 고홍의 어깨가 파드득 경련했다. 얼굴에서 삽시간에 핏기가 가셨다.
“데리고 와라.”
“예.”
만인방도들이 고홍의 양쪽 어깨를 잡아 그를 호가명의 앞으로 끌고 갔다. 고홍은 희게 질린 얼굴로 그를 잡은 이들을 돌아봤지만, 차마 반항할 엄두 같은 건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갔다.
털썩.
고홍을 끌고 온 이들은 그를 호가명의 앞에 내쳤다. 땅을 짚고 쓰러진 고홍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저는⋯⋯.”
호가명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유공의 얼굴이 희다 못해 퍼렇게 질려 버렸다.
“강요는 하지 않는다.”
“⋯⋯.”
“하지만 이곳에 있다면 사파의 방식을 따라야지. 사파에서 스스로 목숨을 보전하는 길은 오직 쓸모를 증명하는 것뿐.”
“저, 저는⋯⋯.”
고홍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무엇을 바라는지 모를 리 있겠는가. 쥐 죽은 듯 있었을 뿐, 이들의 움직임과 행보에 내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들이 그에게 바라는 건, 해남의 사형제를 팔아넘기는 일이다.
그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그저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사형제들조차 팔아넘길 수 있다고 결심한 이는 그가 아니었다. 바로 유공이었다.
“어떤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마른침을 삼킨 고홍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네 목숨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가?”
호가명의 위압적인 눈빛이 고홍을 내리눌렀다.
고홍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어딘가로 향했다. 굳은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본능과도 같은 눈짓이었다.
호가명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고홍의 본능을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군.”
그 짧은 눈짓 하나로도 간파당해 버리자 고홍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호가명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럼 간단하지. 남은 것은 둘 중 하나다. 협조해서 살아남든가, 의리를 지키고 모두 죽든가.”
“⋯⋯.”
“물론 너뿐 아니라 해남에 남은 이들까지 말이다.”
“으⋯⋯.”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호가명에게 끌려온 이후로, 지금까지 그의 몸에는 어떠한 위해도 가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전신을 난도질당하는 게 더 나을 듯했다. 저 칼날보다 더한 말을 버텨 내는 것에 비하면 육신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시간은 충분히 줬다. 결정해라.”
“저는⋯⋯.”
고홍의 창백한 입술이 벙긋거렸다.
살고 싶다는 욕망, 하지만 한때 동료였던 이들을 이렇게 팔아넘길 수는 없다는 의지.
그 버릴 수 없는 두 가지가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저, 저는⋯⋯.”
고홍의 눈이 갈 곳을 모르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만 꽂혀 있다.
호가명의 무심한 시선, 만인방의 노기 어린 시선, 거기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유공의 시선까지.
순간 눈앞이 어찔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배 속에서 역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저, 저는⋯⋯.”
고홍이 끝내 결정의 말을 뱉지 못하자 호가명이 미련 없이 잘랐다.
“이놈은 쓸모가 없군. 죽여라.”
“예!”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좌우에 있던 만인방도들이 도를 뽑아 들었다. 이게 그저 위협이 아니란 사실을 아는 고홍이 눈을 부릅뜨며 황급히 외쳤다.
“자, 잠시, 잠시만! 나, 나는⋯⋯!”
파아앗!
하지만 만인방도들이 휘두른 도는 그의 목을 향해 여지없이 날아들었다.
“그만!”
그 순간, 누군가가 발작처럼 커다랗게 외쳤다.
시퍼런 도기를 품고 날아들던 도가 고홍의 목에 맞닿은 채 멈춰 섰다.
주르륵.
갈라진 피부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말하겠소.”
고함을 지른 건 유공이었다. 그는 퍼렇게 질린 입술을 꾹 깨문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사, 사형!”
호가명의 칼날 같은 시선이 유공에게로 향했다.
“시간을 줄 생각은 없다.”
“사, 사형 안 됩니다. 사형!”
고홍이 다급히 만류하자 유공은 눈을 뜨고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고홍의 목에 닿은 도에 다시 서늘한 도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유공은 결국 앞쪽에 선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의 내심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보여 주는 광경이었으나, 누구도 그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형! 그만두⋯⋯!”
“저 나무에 문양이 새겨져 있소.”
고홍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호가명은 그런 그의 반응을 흘긋 보았다. 저것만 보아도 유공이 거짓을 고하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유공이 가리킨 커다란 나무의 위쪽엔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힘든, 희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의미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드오.”
“이유는?”
“사형!”
고홍이 괴로운 얼굴로 외쳤다. 그러나 유공은 이미 체념한 듯 그가 아는 바를 숨김 없이 풀어놓았다. 어차피 호가명을 속이기란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저건 해남의 장풍파랑검법 중 칠 초식의 검흔이오.”
“흐음?”
“검을⋯⋯. 아니, 도라도 좋소.”
유공이 병기를 달라며 손을 내밀자 만인방도들이 허락을 구하듯 호가명을 돌아보았다.
“내어 줘라.”
“예.”
그들이 들고 있던 도를 내밀었다. 유공은 손에 익지 않은 도를 쥐고 잠깐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내력이 실리지 않은 검초를 허공에 전개했다.
“그리고 그 초식은 이리 끝나지.”
약식으로 가볍게 전개된 초식이 끝나자 그 도의 끝은 한 방향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 끝으로 향했다. 도의 끝은 어느 숲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해하셨소?”
“초식이 끝날 때 검이 가리키는 방향이라⋯⋯.”
호가명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꽤 머리를 썼군.”
확실히 합리적이다.
암호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다 해도 언젠가는 파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대가 금방 파악할 수 있는 암호를 사용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치명적인 피해를 초래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암호의 의미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오직 해남의 검을 배운 해남의 제자만이 해석할 수 있는 방식이니까.
‘명문은 명문이라는 거로군.’
조마다 이 암호를 확실히 확인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와중에도 이 흔적을 놓치지 않을 만큼 눈썰미 좋은 이들로 말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호가명이 재차 물었다.
“거리는?”
“모르오.”
유공이 고개를 내저었다.
“기본적으로 이 표식은 십 리를 기점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지만, 이는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소. 그들이 어찌 합의했는지 알 수 없으니⋯⋯.”
“하지만 이 방향대로 나아가다 보면 다음 표식이 나타난다, 이 말이로군.”
“그렇소.”
“그게 아니면⋯⋯.”
호가명이 차가운 눈으로 유공을 응시했다.
“앞서가는 이들을 만나게 되든가.”
유공의 눈에 어려 있던 미약한 적의가 그 말에 힘없이 흘러내렸다.
“⋯⋯그럴 것이오.”
“다시 말해, 놈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너희를 살려 둘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군. 맞나?”
“⋯⋯.”
“어째 과히 친절히 설명해 준다 싶더니.”
호가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
“다만 시간을 끄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머리가 좋은 놈 같으니 내가 굳이 여럿을 데려온 이유도 짐작할 수 있겠지?”
“⋯⋯알고 있소.”
“앞장서라.”
유공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쉬며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문득 누군가가 그를 노려보는 게 보였다. 고홍이었다. 눈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원망이라도 하는 건가?’
어차피 이곳까지 온 것만으로도 문파를 팔아먹은 배신자가 된 건 마찬가지다. 이제 와 대체 뭘 지키겠다고 하나뿐인 목숨까지 바친단 말인가?
애초에 그럴 기개가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터.
목숨을 걸 용기도, 사문을 배신할 용기도 없으면서 그저 원망할 이만 찾아 대는 꼴을 보니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역겨움이 밀려왔다.
살아남아야 한다.
지금 유공에게 남은 목표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해남 문도로서의 자부심도, 스스로 꿈꿨던 길까지 모조리 두엄 더미에 집어 던져 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그의 목숨과 해남에 남은 식솔들의 안위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공은 고홍과 눈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마주 쏘아봐 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먼저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출발해라.”
“⋯⋯예.”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유공을 보며 호가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자.”
“예!”
다른 이들도 그런 유공의 뒤를 따라 우거진 숲으로 파고들었다.
‘확실히 네가 준비한 한 수는 치명적이었다, 화산검협.’
하지만 청명 역시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쪽에서도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패를 준비해 뒀단 사실을 말이다.
“승냥이가 개를 부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천하의 너라고 해도 말이다.”
하물며 예상한다 해도 상관없다. 이미 이 전장은 호가명의 것이 아니니까.
설사 그가 또다시 놈에게 당한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전장의 흐름은 온당히 모든 것을 쥐어야 할 이의 손으로 향했다.
호가명의 눈빛에 기이한 열기가 넘실거렸다.
그 역시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그이기에 더욱더 간절히 확인하고 싶었다.
화산검협. 아니, 매화검귀. 그는 손조차 써 보지 못한 압도적인 괴물을 과연 련주께서 어찌 짓밟아 놓을 것인지를.
지금껏 저 매화검귀에게만은 이해할 수 없는 호의를 보여 오던 패군이 마침내 묻어 두었던 칼을 뽑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