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8화. 놈의 목숨을 거두겠다 하신다. (3)
“가만히.”
남궁도위가 들어 올렸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보였다.
그 신호를 본 해남의 제자들이 숨을 멈추고, 최대한 기척을 죽였다.
타다다다닥!
신속한 발소리와 함께 그들이 몸을 감춘 수풀 앞으로 한 무리가 지나쳐 갔다.
“이쪽이다!”
높이 들려온 외침에 해남의 제자들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이며 몸을 숨겼다. 긴장에 목구멍이 바짝 조이고 타들어 간다.
다행히도 앞을 지나친 이들은 그들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멀리서 저렇게 처절한 비명이 들려와서 적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혹여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단 이유로 다른 적의 흔적을 찾으려 들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도장.’
남궁도위는 비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지금 그가 청명을 도와줄 방법은 한시라도 빨리 이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거니까.
“이동하겠습니다.”
“예!”
파앗.
남궁도위가 땅을 박차며 앞장섰다. 그의 시선은 앞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로 향해 있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다섯 번째.’
그러나 발길은 봉우리의 좌측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길을 선택한다면 기껏 일행을 나눈 보람이 없다. 최대한 다른 길을 선택해 적의 시선을 피한 후에 합류해야 한다.
“웬 놈이⋯⋯.”
남궁도위가 지체 없이 검을 날렸다. 놀라 고개를 돌리려던 만인방도의 목이 즉시 꿰뚫렸다.
“끄르륵⋯⋯.”
성대까지 꿰뚫린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경련하다 허물어졌다. 남궁도위는 풀썩 소리가 나기 전에 그를 재빨리 잡아채었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밀쳐 넣기 위해서였다.
“후욱⋯⋯.”
이마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체력이야 적당히 보충했다지만, 적이 어디에 있을지 항시 살피며 나아간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기감을 퍼뜨리는 것도 결국은 내력을 운용하는 일이다. 경공을 펼쳐 내는 동시에 기감을 퍼뜨려 대다 보니 심력이 몇 배는 깎여 나가는 느낌이었다.
‘우는소리 하지 마라.’
그래 봐야 겨우 일각에 불과하다. 일각 만에 지쳤다는 소리는 죽어도 할 수 없다. 백천은 이 각이 넘게 그들을 이끌었고, 청명은 며칠 내내 그들을 이끌었으니까.
이 정도로 힘이 든다고 말하는 건 고고한 남궁세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서두릅시다!”
“예, 소가주님!”
남궁도위는 재차 땅을 박차며 마음으로 말을 전했다.
‘부디 늦지 말고 따라오십시오, 도장!’
❀ ❀ ❀
파아아앗!
청명의 검이 비틀리며 적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끄아아아아악!”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일그러질 만큼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더 많은 이들을 이곳으로 끌어모아 줄 신호탄이 되어 줄 것이다.
“저기 있다!”
“이⋯⋯!”
소리에 꼬여 달려온 이들이 청명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달려들다 말고 이내 움찔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이 어둠 속에서도 처참히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인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지금 몰려온 그들보다 더 많다. 어쩌면 지금 자신들이 제 죽을 곳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잠시 멈추었다 해서 그들의 운명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타앗!
청명이 단숨에 땅을 박차고 허공을 격해 날아왔다.
“피, 피해⋯⋯.”
파아아아앙!
다급한 목소리가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선명한 붉은 선이 어둠을 갈랐다.
털썩. 털썩.
제대로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한 이들의 몸이 사선으로 갈려 허물어졌다.
촤악!
청명이 검 끝에 맺힌 피를 털어 냈다. 그의 시선이 조금 어둑해졌다.
어쩐지 조금 전부터 공격해 오는 놈들의 수가 줄어든 것 같았다. 물론 단순히 이 근방의 적을 모조리 처리해서일지도 모르지만⋯⋯.
퍼어엉! 퍼어어엉!
그 순간 남쪽 하늘에서 화려한 폭죽이 터지는 게 보였다. 십만대산의 어디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불꽃이었다. 청명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확실히⋯⋯ 곤란한 놈이군.’
아마 산맥에 퍼져 있는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신호일 것이다.
호가명이 저지른 실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청명이 이곳의 지형에 더없이 익숙하단 사실을 몰랐다는 것. 하지만 이건 호가명이 예방하거나 극복할 수 있었던 부분이 아니다. 청명이 십만대산에 익숙하며, 다수를 상대로 벌이는 유격전을 수도 없이 치러 왔다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두 번째 실수. 이건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실수였는데, 자신들의 강점이 무엇인지를 간과했다는 점이다.
지금 만인방이 천우맹 일행에 비해 가지는 절대적인 강점은 압도적인 수의 우위다. 많은 머릿수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고 위협이 된다.
호가명은 그 수의 우위를 활용하는 데서 실수를 저질렀다. 아무리 많은 이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이 넓은 곳에 흩어 놓으면 결국은 소수와 소수 교전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교전이라면 청명이 패할 리가 없다. 불리한 전장에서 불리한 방식으로 싸울 때부터 호가명의 패배는 예견되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호가명은 확실히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아채고 즉각 재정비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
청명은 냉정하게 생각을 이어 갔다.
‘그렇다고 해도⋯⋯.’
호가명이 저지르기엔 다소 어처구니없는 실수다. 이는 결국 호가명이 이런 실수를 저지를 만큼 무너졌었단 의미가 아닐까.
무너지지 않았던 사람보다 한번 무너졌던 이가 다시 일어나는 게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번 즉각적인 대처는 조금 놀라운 면이 있다.
그가 호가명이란 이를 과소평가했던 걸까? 그게 아니면⋯⋯.
“⋯⋯흠.”
청명의 시선이 다시금 하늘로 향했다. 저 멀리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다. 어찌 됐건 저쪽이 물러난 이상,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 정도면 됐겠지.’
애초에 그의 목적은 적의 희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빠져나갈 시간을 버는 거였으니 더 불필요하게 힘을 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땅을 박차며 자리를 벗어나려던 청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눈빛으로 남쪽의 어딘가를 바라보던 그는 이내 빛살이 되어 북쪽을 향해 쏘아졌다.
❀ ❀ ❀
저벅. 저벅.
호가명의 눈이 천천히 땅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의 그는 확실히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이 돌아와 있었다. 낯빛은 여전히 초췌하나, 의관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심지어 눈빛은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찾아냈나?”
“예, 군사! 이곳입니다!”
땅을 살피던 이들이 호가명의 물음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가 이동한 흔적이 있습니다.”
“수는?”
“스물 정도입니다.”
“⋯⋯조금 전에 발견한 족적은 몇이었지?”
“역시 스물 정도였습니다.”
호가명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 주도면밀하군.”
추적을 피하며 조를 나눈 건 확실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감시망을 피해 가는 동시에 추적하는 이들의 혼선도 유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직하군.”
누군가에게 쫓겨 본 적 없는 이들이라면 족적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설사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다 해도 다급하게 달아나는 와중에 발자국까지 남기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을 터. 게다가 땅이 풀로 덮여 있으니 족적이 남을 거란 생각조차 못 했을 수도 있다.
결국은 경험 부족에서 비롯된 실수다.
‘굳이 내가 완벽할 필요는 없지.’
적 역시 완벽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니까.
“그럼 저쪽이로군.”
호가명의 시선이 뒤쪽에 우뚝 솟은 산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발견한 족적의 형태와 방향을 감안한다면 목표로 삼은 곳이 어디인가는 명백하다.
“움직인다.”
“예!”
호가명이 수하들을 대동하고 빠르게 이동했다.
십만대산을 빠져나가는 이들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저들이 어디로 움직였는지만 알 수 있다면 추격의 불씨는 여전히 살릴 수 있다.
“군사! 이쪽입니다!”
앞서 달리던 이들 중 몇몇이 땅에서 흔적을 발견했는지, 손바닥을 대고 무언가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두 무리⋯⋯. 아니, 세 무리 이상. 다른 방향에서 온 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집결지가 여기였다는 건가?”
“한데⋯⋯.”
살짝 흐려지는 말꼬리에 호가명의 눈가가 꿈틀했다.
“뭔가?”
“⋯⋯도착한 시간이 각기 다릅니다.”
“그게 이상할 이유라도 있나?”
“도착한 이들이 합류하지 않고 바로 움직였습니다.”
“움직였다고?”
“예, 여기!”
설명을 하던 이는 수풀을 좌우로 걷어내더니 깊게 찍힌 발자국을 보여 주었다.
“족적의 뒤쪽에 힘이 실려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이곳을 거쳐 계속 달려 나갔다면, 뒤가 아닌 앞이 더 또렷하게 찍혀 있었을 겁니다.”
“계속.”
“하지만 이곳에 머무르며 찍힌 발자국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그건 이곳에 도착해 무언가를 확인한 뒤, 뒤에 올 이들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동했다는 의미입니다.”
“흐음.”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은 일천하나 호락호락하지는 않단 의미로군.”
이곳에서 어설프게 합류를 시도했다면 공격당할 빌미가 되었을 터.
하지만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 할 이유가 또 있었을까?
만일 임소병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뒤에도 매복이 있을지 없을지를 확신할 수 없었군, 녹림왕. 그리고 다른 이들을 믿지 못했어.”
그러니 그가 이곳에서 눈으로 확인한 탈출로를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전달하고, 먼저 길을 확보하러 움직였겠지.
이곳에서 벌어졌을 일이 호가명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들이 상황을 살피고는 탈출로를 정해 이동한다. 그리고 뒤에 도착한 이들은 그들이 확보한 탈출로를 따라간다.
“그런데 한 가지가 빠졌군.”
호가명의 두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어렸다.
만일 임소병이 이곳에 도착해서 살핀 뒤에 갈 길을 정했다면, 자신들이 갈 방향을 후발대에게 전달할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만들어 낸 신호체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이 계획은 오래 고민한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어설픈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미 정해져 있는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호가명의 고개가 뒤쪽으로 휙 돌아갔다. 그의 시선을 받은 누군가가 순간 움찔했다. 호가명의 한쪽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호가명의 시선을 받은 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는 이들끼리는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단 의미겠지.”
“⋯⋯.”
“그렇지 않나?”
호가명의 시선을 받은 이, 해남의 제자 유공이 지그시 제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