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7화. 놈의 목숨을 거두겠다 하신다. (2)
“저쪽이다! 저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서둘러!”
만인방도들이 전력으로 달렸다.
“조장! 옆입니다! 옆에서 비명이 들렸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이쪽으로 간다!”
전방을 향해 달려가던 만인방도들이 격하게 방향을 틀며 쏘아진다. 이내 그들이 지나간 자리로 몇몇 무리가 뒤따르듯 지나갔다.
그리하여 세상이 다시 짙은 고요로 물들 때쯤.
“가십시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 몸을 감추고 있던 한 무리가 수풀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쪽으로.”
“예!”
백천과 임소병을 선두로 한 천우맹과 해남의 생존자들이 적들이 사라진 땅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소소.”
“걱정하지 마세요, 사숙! 죽어도 안 놓칠 테니까요.”
유이설을 둘러업은 당소소가 당차게 대답했다. 백천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걸을 엎은 윤종 역시 기민하게 따라붙었다.
“그보다 앞쪽은 어떻습니까.”
“살피고 있다.”
백천은 있는 대로 기운을 끌어올려 전방으로 기감을 퍼뜨렸다. 지금 그들이 해야 할 건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청명이 놈이 이목을 끌 동안 이 십만대산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쪽으로, 어서!”
순간 눈을 빛낸 백천이 빠르게 지시를 내리며 방향을 틀었다. 드높은 산자락의 구석으로 그들이 몸을 숨긴 직후, 한 무리의 만인방도들이 쾌속하게 그들이 조금 전까지 달렸던 길로 달려갔다.
그들이 멀어지고 나자 백천이 다시 모두를 이끌고 달렸다.
“녹림왕.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십만대산은 횡으로는 수천 리에 달하지만, 종으로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한 시진도 안 걸릴 겁니다!”
“그럼 서두릅시다!”
그때 해남 장문 금양백이 뒤에서 달려왔다.
“장문대리.”
“예, 장문인.”
“화산검협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이들의 수가 적지 않소! 괜찮은 것이오?”
두 눈에 짙은 우려가 어려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그들은 큰 교전 없이 십만대산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인즉, 뒤에 홀로 남은 화산검협이 모든 만인방도를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살아남은 이의 태반이 크고 작게 부상을 입은 처지의 해남이 감히 할 말은 아닐지 모르나, 금양백은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해남이 화산검협에게 입은 은혜는 이제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지경이니까.
“화산검협은 몸도 성치 않잖습니까? 누구라도 도와야⋯⋯.”
“아니, 말 같은 소리를 좀 하십시오.”
그 말을 차게 끊어 버린 건 백천이 아닌 임소병이었다. 백천의 옆에서 달리고 있던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금양백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가 누굴 돕습니까! 누가 누굴!”
“아, 아니⋯⋯. 하지만 화산검협의 부상이⋯⋯.”
“애초에 그 양반이 부상을 왜 당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짐덩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으니 그런 것 아닙니까? 그 양반이 혼자였으면 그렇게 당했겠습니까?”
금양백이 입을 꾹 다물었다. 녹림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해남에서 이 대산까지 오는 길은 더없이 험했으나, 그런 길도 만일 청명이 홀로 돌파하려 했다면 그리 어렵지 않았을지 모른다.
소수의 강자가 다수의 약자를 상대로 완벽하게 싸우기란 어렵지만, 그 다수의 약자를 헤집어 놓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기동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강자는 싸울 시기와 장소를 마음대로 선점할 수 있다. 그러니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서 지치기 전까지 검을 휘두르다 몸을 빼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청명은 그 기동력을 봉쇄당한 상태에서 적들을 맞이했다. 지친다고 물러날 수도, 부상을 입었다고 달아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건 몸을 사슬로 칭칭 감은 채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모두가 거리를 벌려 준 덕분에 지금 처음으로 청명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족쇄에서 벗어난 것이다.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를! 우리가 뭘 돕습니까! 발목이나 안 잡는 게 돕는 거지!”
노골적인 무시와 힐난에 금양백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는 건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백천이 슬쩍 입을 열어 상황을 중재했다.
“우선은 대산을 빠져나가는 데 전념하시지요. 놈은 알아서 올 겁니다.”
“⋯⋯알겠소이다, 장문대리.”
금양백이 굳은 얼굴로 물러나자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은 분명 녹림왕이 과했다. 하지만 그런 녹림왕을 탓하고 싶진 않았다. 녹림왕의 얼굴 역시 한바탕 쏘아붙인 사람답지 않게 굳어 있으니까.
그 역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임소병은 녹림의 수장이다. 천하에 손꼽히는 책사였던 이가 짐덩이로 전락한 지금의 처지를 온전히 평온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굳이 자신의 입으로 그 상황을 설명하게 만드는 금양백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겠지.
백천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어느 때고 모두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지금 백천이 해야 할 일은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는 게 아니라 이 부상자들을 이끌고 한시라도 빠르게 대산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쪽으로!”
“예!”
앞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백천이 기민하게 방향을 꺾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응이 조금 늦었는지, 달려오던 이들이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한 그들의 후미를 발견하고 말았다.
“적이다!”
“죽여라!”
“큭.”
백천과 몇몇 이들이 입술을 깨물고 적을 향해 달려갔다. 몇 되지 않는 만인방도들이 순식간에 참살되었다.
“끄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이들을 확인한 백천은 고개를 돌리며 지시를 내렸다.
“확실히 모두가 함께 이동하면 너무 눈에 띕니다. 미리 말해 뒀던 대로 흩어집시다.”
“예!”
남궁도위와 당패, 그리고 혜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이 크지 않은 그들은 이틀이라는 짧은 휴식만으로도 웬만큼은 몸을 회복했다. 그러니 각각 해남의 문도들을 이끄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합류 지점은 예정했던 대로!”
“알겠습니다, 장문대리.”
“무운을 빕니다!”
“예!”
미리 이야기해 뒀던 대로 일행을 대동한 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백천은 제 뒤를 지키고 있는 윤종과 당소소에게 시선을 주고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도 가자.”
“예, 사숙.”
해남의 제자들을 대동한 백천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다 슬쩍 어둠에 잠긴 십만대산을 돌아보았다.
‘늦지 말고 와라, 빌어먹을 놈아.’
❀ ❀ ❀
“을칠(乙七)조가 당했습니다!”
“위치는?”
“그, 그게, 지금 위치는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뭔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냐!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지, 지금 모두가 자신이 맡은 구역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라. 정확하게 어느 지점에서 당했는지는⋯⋯.”
“그걸 말이라고!”
호가명의 부관은 보고하는 이에게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그 살기에 기겁한 부하가 납작 몸을 엎드렸지만, 그런다고 없는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뒤이어 들려온 소식 역시 속을 뒤집어 놓기는 매한가지였다.
“정오(丁五)조도 당했습니다!”
“귀겸대 삼조도 당했습니다!”
“현재 놈의 위치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보고선이 부족합니다!”
쉴 새 없이 달려와 떠들어 대는 놈들의 말을 종합해도 딱히 결론이랄 게 나질 않았다.
이 보고로 파악할 수 있는 건 그저 급히 조직해 십만대산에 뿌려 놓은 이들이 이곳저곳에서 참살당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구, 군사.”
부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호가명을 불렀다.
하지만 호가명은 그 모든 보고를 들었을 텐데도 반응조차 하지 않고 어둠에 잠긴 대산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부관은 다시 한번 호가명을 불러 볼까 하다 결국 입을 닫고 말았다. 호가명은 지금 이 상황을 몰라서 반응하지 않는 게 아니다. 반응해 봐야 소용이 없기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호가명의 두 눈이 어둑했다. 잔뜩 갈라진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쉬어 버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호굴로 머리를 들이밀기라도 한 기분이군.”
뿔뿔이 흩어진 이들로 화산검협을⋯⋯. 아니, 매화검귀 놈을 상대하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다. 그쯤이야 알았다.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보고는 그의 예상조차 깔끔하게 뛰어넘었다.
마치 그들이 놈을 쫓는 게 아니라, 놈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모두를 끌어들여 하나하나 사냥하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아마 지금쯤 해남의 본대는 십만대산을 탈출하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도 예상 못 할 호가명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보고선이 무너진 채로 화산검협에게 달려들고 있는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새로이 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남은 건 화산검협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본대를 놓친다는 결과뿐.
애초에 화산검협이 그의 예상 이상으로 빠르게 회복하여 나타난 이상, 결과는 정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좀 더 철저해야 했나? 놈들의 종적을 놓친 순간 섣불리 병력을 퍼뜨릴 게 아니라 침착하게 기다렸다면 상황이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해도 방법은 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가명은 그런 생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겼다.
정밀하게 짜인 작전일수록 작은 뒤틀림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는 법. 그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촘촘하게 짠다 해도, 저 매화검귀는 강제로 그 계획을 뒤틀어 버릴 수 있는 이다.
이 모든 것은 그저 감당하지 못할 상대를 노린 대가였다.
“⋯⋯병력을 후퇴시켜라.”
“구, 군사!”
“더 이상의 쓸데없는 희생은 줄여야지.”
부관들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옳은 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차마 그 명을 곧장 전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물러나는 순간, 모든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결국 호가명의 완벽한 패배를 뜻하지 않는가.
이 실패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구, 군사! 아직은⋯⋯.”
“더는 내가 련주께 죄를 짓도록 하지 마라.”
부관들은 결국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불과 일백에 달하는 해남의 목을 성과로 내세우기에는 너무도 큰 희생이 있었다. 허락 없이 이행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천하의 호가명이라 해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터.
호가명이 눈을 질끈 감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삐이이이이익!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호각 소리? 아니, 이건 호각소리가 아니다. 이건 그가 익히 아는 짐승의 울음소리다.
‘설마?’
그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달은 고사하고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밤하늘, 그 중간에 흐릿한 붉은빛이 어룽거리고 있었다.
호가명이 반사적으로 팔을 앞으로 내밀자, 허공을 배회하던 빛이 섬전처럼 강하하여 그 위로 내려앉았다.
푸드득.
선홍색 매였다.
크게 한번 날갯짓하고 팔에 앉은 작은 매를 보며 호가명의 눈이 떨렸다.
“려, 련주께서⋯⋯.”
그 매의 정체를 알아본 부관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붉고 검은 깃털을 가진 이 작은 매야말로 장일소의 명만을 나르는 그의 신물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가명은 조심스레 매의 발에 매달린 통을 열어 서찰을 꺼냈다. 펼치는 그 순간까지도 호가명의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읽는 동안 모두가 숨을 죽이며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서찰을 모두 읽은 호가명은 잠시 눈을 감은 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숨 막히는 기다림 끝에 호가명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서찰을 접으며 말했다.
“놈을 상대하는 이들을 이선으로 물려라.”
“구, 군사, 그럼⋯⋯?”
“추격은 계속한다.”
“⋯⋯예?”
호가명의 두 눈은 어둠으로 물든 산맥의 시린 빛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련주께서 놈의 목숨을 거두겠다 하신다.”
그의 얼굴에 기이한 희열의 열기가 피어났다.
호가명은 감당할 수 없었다. 화산검협⋯⋯. 아니, 이제는 매화검귀라 불러야 마땅한 이를. 하지만⋯⋯.
‘련주께서 나서신다면 말이 달라지지.’
제아무리 매화검귀라 해도 이제는 그 운명의 끝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그가 상대해야 할 이는 다름 아닌 패군 장일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