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6화. 놈의 목숨을 거두겠다 하신다. (1)
“적이다!”
“어, 어디냐?”
어둠에 빠진 십만대산이 순식간에 혼란해졌다.
“이쪽이야!”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다급하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달려갔다.
“이, 이런!”
곧 땅에 널브러진 시신이 보였다. 아직 목에서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걸로 보아, 이자가 조금 전 그들을 불러들인 비명의 주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주변을 뒤져라!”
맞으면서, 또 동시에 틀린 말이었다.
멀리 가지 못했다는 건 정확한 판단이지만, 굳이 주변을 뒤질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찾는 이는 이미 그들의 등 뒤로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파아아아앙!
검 끝이 공기를 터뜨리며 만인방도들의 등에 파고들었다. 주저라고는 없는 참격이 단숨에 심맥을 잘라 냈다.
“크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어두운 밤하늘에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저기다!”
“놓치지 마라!”
비명을 듣고 달려온 수십의 만인방도들은 어둠 속에서 검을 들고 있는 청명을 발견하자마자 득달같이 쇄도했다.
무심하게 그들을 일별한 청명은 곧장 검기를 뿜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
파아아앗!
일순간 청명의 몸이 길게 늘어나는 듯했고, 어느새 그 자리에 있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화산 특유의 검은 무복과 짙게 내린 어둠이 서로 얽혀들며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흐려진 것이다.
“저쪽! 저쪽으로 갔다! 당장 쫓아!”
“어디?!”
“저쪽이라니까, 이 멍청한 놈들아!”
만인방도들은 악을 쓰며 청명의 종적을 쫓았다.
“기, 기척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람이 하늘로 솟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하, 하지만⋯⋯!”
무인은 단순히 눈으로만 상대를 쫓는 게 아니다. 상대의 기척, 기의 흐름, 희미한 소리, 그 모든 것으로 상대의 종적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감을 돋워도 놈의 기척을 찾아낼 수 없다. 마치 정말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퍼, 퍼져라!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허깨비가 아닌 이상 정말로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 반드시 주변에 있다.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그 순간 소리치던 이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영혼마저 얼려 버릴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잘 벼려진 금속이 주는 섬뜩함이 목부터 스멀스멀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어, 언제⋯⋯.’
서걱!
촤아아아악!
차디찬 검날이 사내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로 달아오른다.
“뭐, 뭐야!”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신음에 앞서 달려가던 이들이 기겁하여 돌아보았다. 뒤에서 함께 달리던 이는 어느새 피거품을 문 채 허물어지고 있고, 그 등 뒤에 있던 청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경한 이들이 발작하듯 도를 휘둘렀다.
“으아아악! 죽어라아아아!”
하지만 놀라서 마구잡이로 휘두른 도로 잡아 낼 수 있는 청명이었다면, 만인방이 이토록 많은 희생자를 낼 이유가 있었겠는가?
카아앙! 카앙!
날아드는 도를 단숨에 쳐 낸 청명의 암향매화검은 굶주렸던 독사처럼 날아들어 적의 목을 물어뜯었다.
콰드득!
“끄르륵⋯⋯.”
목이 뚫린 이들은 하나같이 눈에 경악을 실은 채 허물어졌다. 평소보다 더 깊게 검을 찔러 넣은 청명이 흘러내린 피로 그 검을 완전히 적셨다.
“저기다!”
“신호를 보내라, 당장!”
삐이이이익!
누군가가 불어 댄 호각 소리가 비명처럼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청명의 눈빛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쾅!
그가 선 땅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강력한 진각으로 단숨에 적과의 거리를 좁혀 낸 청명은 검을 쾌속하게 휘두르며 달려드는 이들의 허리를 단숨에 베었다.
파아앗!
잘린 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노오오오옴!”
눈앞에서 동료들이 양단되자 남은 이들은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인 채 도를 휘둘렀다.
카강!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도를 비스듬히 흘린 청명은 그대로 검을 날려 적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 갈라진 목에서 채 피가 뿜어지기도 전에 땅을 박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놓치지 마라!”
사방에서 다급하게 달려온 이들이 악을 쓰며 그 뒤를 쫓았다.
그 순간, 달려가던 청명의 모습이 칼처럼 솟아오른 산의 뒤편으로 훅 사라졌다.
“따라붙어!”
만인방도들 역시 땅을 박차며 즉시 청명이 이동한 곳으로 치고 들어갔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막막하고 숨막힐 정도로 무거운 어둠뿐이었다.
“뭐⋯⋯.”
없다. 본능적으로 기감을 펼쳤지만, 역시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거⋯⋯!”
악에 받쳐 고함을 지르던 이가 순간적으로 입을 닫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쭈뼛 선 것이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채 움직이기도 전에 뒷덜미로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들었다.
푸욱!
위에서 비스듬히 내리꽂힌 검이 만인방도의 목 뒷덜미를 꿰뚫었다.
경추를 끊고 척추까지 뚫고 들어간 검에, 그는 거의 튀어나올 듯 눈을 부릅떴다. 곧장 숨이 끊어지지 않은 통에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갉았다. 방도의 전신은 발작을 일으키며 덜덜 떨었다.
“주, 죽여!”
주변에 있던 이들이 재빠르게 도를 휘두르며 경계했다. 하지만 그들의 도가 채 뻗어지기도 전에 몸을 꿰뚫고 나와 있던 청명의 검이 사방으로 검기를 흩뿌렸다.
“아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악!”
검기에 도륙 난 이들의 단말마와 함께 짙은 피 냄새가 훅 번져 나갔다. 단숨에 다섯을 고혼으로 만들어 버린 청명이 스르륵 어둠으로 스며들었다.
“여, 여기다! 이쪽이야!”
뒤늦게 도착한 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청명의 검에 난자당한 채 식어 가는 육체뿐이었다.
“이, 이놈⋯⋯.”
“저쪽이다!”
그때 청명의 움직임을 발견한 이가 소리쳤다. 그러자 몇몇 이들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청명을 쫓아 달려갔다.
“우, 우리도!”
그때 그들의 뒤에서 우렁우렁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느 쪽이냐!”
“조장님!”
귀겸대(鬼鎌臺)의 삼조장 모휘(毛暉)였다. 그의 등장에 수하들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그들끼리 저 청명의 뒤를 쫓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화산검협입니다, 저 뒤쪽에!”
“따라와라!”
모휘가 단숨에 앞으로 짓쳐 달려 나갔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도 용기백배해 뒤따랐다.
하지만 험한 산세를 평지처럼 달리던 모휘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분명 화산검협의 뒤를 몇몇이 쫓고 있었을 텐데,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질 않았다. 이 와중에 산이 복잡하고 험해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다.
순간 구토가 쏠릴 정도의 공포심이 덜컥 밀려왔다. 하지만 모휘는 이를 악물고 발을 내디뎠다.
쿵!산의 뒤편으로 돌아서자마자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으⋯⋯.”
여기저기에 만인방도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 아직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뻥 뚫린 구멍에서 뜨듯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다.
“이 빌어먹을 놈이⋯⋯.”
모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조장님!”
“놈의 종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휘둘릴 것 없다! 귀신도 아닐진대 놈이 어디로 갔겠느냐! 조를 둘로 나눈다. 하나는 이 주변을 살피고, 다른 이들은 산 위를 살핀다!”
“예!”
모휘의 시선이 위쪽으로 강하게 꽂힌다. 그가 청명이라면 이 칼처럼 솟은 산을 이용할 것이다. 심지어 어둠이 짙어 몸을 숨기기에는 아주 최적일 테니까.
“끄, 끄륵⋯⋯.”
아래쪽에서 들려온 희미한 소리에 모휘의 눈썹이 꿈틀했다. 목이 제대로 베이질 않아 아직 죽지 못한 이가 고통에 경련하고 있었다.
“쯧.”
모휘는 그에게로 한 발짝 다가가 도를 들어 올렸다. 죽음이라도 편히 맞도록 해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하의 숨통을 끊어 주기 위해 도를 들어 올린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게 보였다. 수하가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아주, 간절하게.
파아아아아앗!
그 순간 수하의 배를 뚫고 튀어나온 빛살이 모휘의 몸에 박혔다.
“아아악!”
모휘는 순간적으로나마 몸을 비틀어 급소를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수하의 간절한 눈빛에서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안전해진 건 결코 아니다.
파아아아앗!
시신이 뒤집히며 그 아래에서 피칠을 한 청명이 솟아올랐다. 검이 연이어 날아들어 모휘의 양 무릎을 베었다.
서걱! 서걱!
반쯤 잘려 버린 모휘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으아아아악!”
그 와중에도 도를 휘두르려 한 모휘는 분명 만인방의 대 하나를 책임질 자격이 충분하다 하겠다. 그러나 청명의 검은 비정해서 삽시간에 그의 손목과 팔목마저 베어 버렸다.
서걱!
“끄륵⋯⋯.”
연이어 청명의 검이 모휘의 명치마저 베었다.
더는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된 모휘는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했다. 하지만 그 전에 모휘의 뒤로 돌아간 청명이 손을 뻗어 머리채를 꽉 움켜쥐었다.
모휘의 고개가 강제로 뒤로 획 젖혀졌다. 훤히 드러난 그의 목에 암향매화검이 닿았다.
“으⋯⋯. 으으⋯⋯.”
가까스로 눈을 돌려 뒤쪽을 본 순간, 모휘는 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서늘하고 푸른 광망을 흘리는 청명의 눈을 말이다.
“화, 화산⋯⋯.”
푸욱!
“으아아아아아악!”
모휘의 입에서 처절하기 짝이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끔찍한 비명은 마치 아군을 불러들이는 호각처럼 메아리치고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흐으⋯⋯. 흐으으⋯⋯.”
손아귀에 잡고 있는 자가 고통을 어쩌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음에도 청명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처음처럼 서늘한 한기를 머금은 채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모휘는 고통에 떠는 중에도 기이하다 여겼다. 그는 죽는 것 따윈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자의 눈을 본 순간 죽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포가 온몸을 잠식했다.
“더 크게 질러야지.”
“⋯⋯.”
“그래야 더 몰려들 테니까. 여기가 제 무덤인지도 모르는 머저리들이 말이야.”
“이, 이 개 같⋯⋯.”
콰득!
청명의 검이 모휘의 목을 파고들었다. 단숨에 근육과 혈관을 갈라 버린 검은 이내 목뼈까지 망설임 없이 끊었다.
“끄, 끄르륵⋯⋯.”
피거품이 솟았다. 모휘의 눈에서 빛이 빠르게 사라졌다.
미련 없이 모휘를 걷어차 날려 버린 청명은 사방에서 모여드는 이들의 인기척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저벅.
그리고 오히려 긴장하여 머뭇대는 적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주저하고 있던 이들은 다가오는 청명을 보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청명이 물었다.
“왜 그러지?”
무심한 시선이 그들을 한차례 훑었다.
“나를 죽이겠다고 쫓아온 게 아니었나?”
“이, 이 미친놈⋯⋯.”
청명의 시선이 슬쩍 하늘로 향했다. 빛 한 점 없이 어둡다. 마치 오래전 이 산에서 맞이했던 숱한 밤처럼.
“이해한 모양이군.”
들어 올려진 검 날이 청명의 얼굴을 비스듬히 가렸다.
“입장이 바뀌었단 걸 말이야.”
검면 뒤로 반쯤 드러난 청명의 눈이 서늘한 빛을 뿜었다.
“계속하자. 밤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이윽고 고통에 겨운 끔찍한 비명이 신호음처럼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