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1화. 구하러 갈 것입니다. (1)
어둠이 깊게 내린 밤. 소담한 달빛이 아직 불 밝혀진 전각의 창가에 내려앉았다.
사락. 사락.
먹물에 젖은 붓이 종이 위를 누비는 소리가 창틈으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진 붓 소리를 멎게 한 것은 문밖에서 넘어온 목소리였다.
“가주님.”
“들어오게.”
당군악이 손에 든 붓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곧 문이 열리고 당가의 호법 당익(當霬)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침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아직은 이르지.”
당군악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본가에서 보낸 독과 암기들이 조금 전 도착했습니다.”
“다행이군. 함께 온 보고는?”
“예, 가주님. 사천으로 보낸 유민들은 모두 잘 정착했다고 합니다. 내일 보고를 드릴까 하다가⋯⋯.”
당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에 손이 많지 않을 텐데 고생들 했겠어.”
지금 당가에 남은 이들은 무위 면에선 딱히 전력이 되기 어렵다. 물론 당가 내에서는 독을 만들고 암기를 제조하는 일이 무학에 비해 덜 중요하다 할 수 없으니 놀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몸 편한 사천에 남은 놈들이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당익의 말에 당군악이 나직이 웃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이런 농에 웃음을 보이는 일 따윈 없었겠지만, 지금의 당군악은 예전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당익은 그 미소에 묘한 씁쓸함이 묻어나는 걸 놓치지 않았다.
“⋯⋯해남에 향하신 분들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쉬이 소식을 전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긴 합니다만⋯⋯.”
말끝을 흐린 당익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해남행에는 당가의 소가주인 당패 역시 동행했다.
당가의 호법으로서 당패의 해남행에는 그 역시 찬성했다. 어쨌든 천우맹에 이름을 올린 문파에서 주요한 이들이 모두 동행하는 임무인데, 거기서 당가가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주님. 소가주님은 잘해 내실 겁니다.”
“걱정이라⋯⋯.”
“⋯⋯예?”
당군악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은 지금 내게 너무 과분하군.”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
“자네도 그만 쉬게나. 내일 새벽부터 다시 수련해야 할 테니.”
그러더니 방문을 나서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당익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풀벌레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다.
당군악은 언제나 그랬듯 묘한 기분을 느꼈다.
본디 풀벌레는 사람을 경계한다. 근거리에 사람이 있으면 보통은 다들 숨을 죽이고 울음을 멈추기 마련.
하지만 저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풀벌레들이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딱히 저 사람이 기척을 감추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학의 경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마 당군악으로서는 평생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현종. 그가 강가에 서서 먼 강남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등을 말없이 바라보던 당군악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들과 딸을 적지로 보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걱정과 우려조차도 저 사람보다 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 사람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적지에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음?”
풀벌레 소리가 멎은 것을 알아챈 현종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당군악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현종 역시 가벼운 묵례로 그를 맞이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맹주님.”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쉬이 잠이 오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가주님.”
당군악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강변에 나란히 서서 강 건너를 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넘을 수 있는 저 강이 지금은 한없이 멀고 넓게만 보였다.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 희미한 풀벌레 소리와 강에 밀려오는 파도 소리만이 이어졌다.
당군악이 무엇이라도 화두를 꺼내 보려 입을 연 찰나, 현종이 먼저 말했다.
“가주님께서는⋯⋯ 가주 자리에 오른 걸 후회하신 적이 있습니까?”
당군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꽤 실례가 될 수 있는 민감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은 현종이기에 용인되었다. 현종이 당군악에게 무례를 범해도 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말에 악의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후회⋯⋯.”
그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까 고민하며 당군악은 조용히 현종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질문에 그가 대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건 애초에 질문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는 오히려 물었다.
“화산의 장문인이 된 걸 후회하십니까?”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종종 그랬지요.”
“⋯⋯.”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화산의 장문인이 된 것이 삶에 있어 가장 보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면⋯⋯.”
현종의 시선이 달을 품은 강으로 향했다.
“다만, 한 번씩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가.”
당군악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말씀이신지⋯⋯.”
“가주님께서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물론 누구나 살다 보면 그렇겠지만, 특히 장문인으로 살면 본심을 숨겨야 할 때가 많이 생기지요.”
당군악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이 중한 자리지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명을 만나기 전, 장로원에 과도한 견제를 받던 당군악은 제 본성 이상으로 냉정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되었으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다지만,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제 능력껏 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게 그저 평온하게만 들리지 않는 이유는, 깊고 어둡게 가라앉은 현종의 눈빛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되지 않더군요. 저라는 사람은 그리 크지 않은데, 사람들은 자꾸 제가 큰 사람이길 원했습니다. 화산의 장문인이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말이지요.”
당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누군가를 책임지는 자리에 올라 본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그저 그런 척을 했습니다. 대범하지 않은데도 대범한 척, 인자하지 않은데도 인자한 척, 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언가 알고 있는 척⋯⋯.”
“⋯⋯.”
“그렇게 수십 년을 살며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장문의 상을 연기해 왔지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조금 괜찮아졌습니다. 그러다 또 어느 순간에는 익숙해지더군요.”
당군악이 눈을 감았다.
알 것 같다. 생각은 행동을 지배한다. 하지만 때로는 행동이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기도 한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는 것처럼 행동을 바꾸다 보면 생각마저 달라진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되고 싶었던 장문인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하게 되고, 그렇게 화산의 장문인다운 사람에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지요.”
현종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당군악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래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이제는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맹주님⋯⋯.”
“저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화산의 장문이라는 이름에 조금은 덜 부끄러운 이가 되었지요. 하지만⋯⋯ 생각하곤 합니다. 그게 과연 좋은 일이었던가?”
현종의 목소리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묻어났다.
“과연 좋기만 한 일이었던가⋯⋯.”
당군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어라 말을 얹기는 힘들어도 마음속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속도 이토록 아려 오는 것이리라.
짧은 침묵이 고였다. 현종이 다시 입을 뗐다.
“아이들은 훌륭하게 성장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감히 저와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사람들이 되었지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그 녀석들이 어찌 맹주님께 비견되겠습니까.”
당군악의 말에 현종이 고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 성장이 과연 저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던가?”
“⋯⋯.”
“더 많은 책임을 지는 만큼, 더 많은 것들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 아이들도 그저 자신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누군가가 바라는 자신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군악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람이면 다 그리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렇겠지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안타까움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어느새 그 역시 그가 살았던 삶을 저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현종이 말했다.
“하나는 알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했는지 말입니다.”
당군악이 의문 어린 눈으로 현종을 응시했다. 하지만 고요한 수면 같은 현종의 표정에서 내심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 무어라 말하려던 당군악이 문득 시선을 획 돌렸다.
‘뭔가⋯⋯.’
저 강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들여다보니 수면을 가르며 다가오는 그 물체가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어째 하얀 것이⋯⋯.
“족제비?”
당군악의 눈이 커졌다.
저건 청명이 만날 끼고 다니던 그 족제비가 분명하다. 물론 족제비의 생김새를 어찌 구분해서 딱 알아보겠냐마는, 상식적으로 이 야밤에 장강을 가르며 자맥질할 흰 족제비가 세상천지에 또 있겠는가?
키이이이이이이!
당군악과 현종을 발견한 백아가 날카로운 울음을 토하고는 속력을 한껏 높여 거의 날듯이 헤엄쳐 왔다.
타다다닷!
뭍에 도착한 백아는 짧은 발로 순식간에 땅을 야무지게 박찼다. 물기를 털어 낼 생각도 하지 않고 단숨에 현종의 몸을 타 오르더니 제 목에 묶인 보따리를 풀어 내밀었다.
키익! 킥!
거친 숨소리와 기침이 연이어 터졌다. 작은 몸이 덜덜 떨리는 것만 봐도 얼마나 다급하게 이곳까지 달려왔는지 확연히 느껴졌다.
하지만 백아는 그런 건 신경 쓸 일도 아니라는 듯 보따리를 재차 내밀었다. 당장 확인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모양새였다.
현종은 백아가 내민 보따리를 풀어 그 안에 든 서찰을 꺼냈다. 끄트머리가 조금 젖어 있기는 했지만 내용을 읽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표정 하나 변치 않고 읽은 현종은 담담하게 그 서찰을 당군악에게 내밀었다.
“화산검협이 보낸 서찰입니까?”
당군악 역시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서찰을 낚아채 읽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현종과는 달리 서찰을 읽는 내내 크게 요동쳤다.
서찰의 내용은 황당함을 넘어 섬뜩할 정도였다. 해남과 함께 강남을 돌파하겠다는 내용이 그 서찰 안에 간략히 담겨 있었다.
저 사패련의 본거지인 강남을 말이다.
“이, 이 무슨 짓을⋯⋯.”
순간 당황한 당군악이 현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종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저 아까와 같이 강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수라도 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저곳이 강남이라지만 이대로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러다 저들이 모두 죽기라도 한다면⋯⋯.
당군악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하지만⋯⋯ 안 된다.
강남을 침범한다는 건 전쟁을 벌이겠다는 의미다. 저들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그 몇 되지 않는 목숨 때문에 천우맹 전체를 전쟁의 화마 속으로 밀어 넣을 수는⋯⋯.
“가주님.”
“⋯⋯예?”
현종이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상황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질문에 당군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현종이 고요한 눈길을 당군악에게 보내며 말했다.
“맹주로서 내리는 명입니다. 천우맹 소속 모든 문파의 수장들을 지금 당장 맹주전으로 소집해 주십시오.”
경악한 당군악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무, 무엇을 하시려고⋯⋯.”
강 너머로 다시 시선을 주는 화산 장문 현종의 눈은 이때까지와는 달리 한없이 서늘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아이들을 구하러 갈 것입니다.”
그 순간 당군악은 깨달았다. 풀벌레 소리가 이미 한참 전에 멎어 있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