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340화 (1,341/1,567)

1340화.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3)

또옥. 또옥.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퍼져나갔다.

임소병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에서 튀어나온 바위 끝으로 모인 물이 방울 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여긴 대체⋯⋯.’

그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향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다. 무학을 익혀 기감이 발달한 무인이 아니라면, 걸음을 뗄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이 주변을 잠식하고 있다. 희미하게 보이는 거라고는 저 멀리로 좁고 길게 이어진 길뿐이었다.

‘동굴⋯⋯. 아니, 토굴인가?’

그들이 지나온 토굴이 등 뒤로 길게 이어져 있다.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쿨럭.”

그때, 그의 앞에서 걸어가던 청명이 잔기침을 쏟으며 몸을 구부렸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말라붙은 피 부스러기가 파스스 떨어졌다.

임소병이 얼굴을 굳히며 입을 뗐다.

“도장⋯⋯.”

“괜찮아.”

하지만 청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들고 다시 나아갔다.

임소병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업어 준다는데도 굳이 내려 저렇게 제 발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저 고집을 누가 꺾겠는가?

한동안 말없이 뒤를 따르던 임소병이 결국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장⋯⋯. 여긴 어딥니까?”

“동굴.”

“예?”

“보면 몰라? 동굴이잖아.”

임소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건 대체 무슨 동굴입니까?”

말을 하면서도 이 질문 자체가 무척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굴이 동굴이지, 그 용도가 따로 있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사실 이 질문은 매우 타당했다.

임소병은 동굴의 벽면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동굴 같지 않았다. 거칠기는 하지만 분명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 같았다.

‘이만한 동굴을 사람이 파냈다고?’

어째서? 무슨 이유로?

그때 청명의 목소리가 나직이 퍼졌다.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글쎄요.”

“십만대산 끝자락.”

임소병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의미⋯⋯.

“대부분 마교와의 전쟁을 봉우리 하나를 두고 벌인 쟁탈전처럼 느끼는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중원의 남부에서 수천 번의 전쟁이 벌어졌어. 몇 년에 걸쳐서.”

“⋯⋯.”

“가장 많은 전쟁이 벌어진 곳은 십만대산의 중심부가 아니야. 그곳까지 가는 길목이지.”

“그럼 여기가⋯⋯.”

“그래.”

청명이 서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놈들이 파 놓았던 은신처 중 하나다.”

임소병이 굳은 얼굴로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런 곳이⋯⋯.’

십만대산은 그 자체로 천혜의 지형을 가진 은신처다. 그런데 그런 산에 굳이 이런 토굴까지 만들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임소병이 정말로 충격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책사의 입장으로 보자면 이 토굴만큼 소름이 돋는 것이 없다. 안 그래도 적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헤아리기 힘든 산이다.

그런데 이런 굴이 있다는 건, 적이 땅을 뚫고 튀어 오를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대체 그런 놈들을 어떻게 상대했던 거지?’

항주에서 보았던 마교도들과 이 지형이 머리 안에서 합쳐진 순간,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막연하게 처절했겠거니 짐작만 했던 과거의 전쟁이 앞에 생생하게 펼쳐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이 서늘한 토굴 안에는 여전히 피비린내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그중 하나라는 건, 이곳 말고도 더 있다는 겁니까?”

“수도 없겠지.”

임소병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생각이 길게 이어지기도 전에 그들의 앞에는 세 갈래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어⋯⋯.”

사람이란 누구나 마찬가지다. 길을 전혀 모르는 곳에서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면 응당 그 자리에 서서 고민에 잠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청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좌측 길로 진입했다. 이미 이곳을 알고 있다는 듯 말이다.

임소병이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의문을 표했다.

“왜 이쪽으로⋯⋯.”

“벽.”

“⋯⋯벽?”

간명한 대답에 임소병은 청명이 말한 벽을 살폈다.

“아⋯⋯.”

그리고 머지않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좌측 길 벽에는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자국들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어 댄 것 같은 흔적.

이는 분명 전투 중 병장기들이 숱하게 벽을 스친 흔적이었다.

‘여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건가?’

이 깊은 토굴 속에서까지?

투둑!

문득 무언가가 밟히는 느낌에 임소병이 움찔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임소병은 살짝 핏기가 가셨다. 그가 밟은 것은 누렇게 색이 바랜 사람의 뼈였다.

“⋯⋯시신들이⋯⋯.”

그의 등 뒤에서도 연신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좁디좁은 토굴 바닥에 시신이 잔뜩 널려 있었다. 오랜 시간 썩어 문드러진 끝에 뼈밖에 남지 않은 시신들. 일전에 십만대산을 뚫고 남하하며 보았던 것과 비슷한 광경이다.

“⋯⋯송문고검입니다.”

“무당인가⋯⋯.”

누군가의 대화를 끝으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깊은 지하에 난 좁은 토굴. 이 안에서도 마교도와 정파 간의 죽고 죽이는 혈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적들의 유격전을 버티지 못한 정파가 이 위험한 지형까지 목숨을 걸고 돌입한 것이 분명했다.

“도장.”

해남의 제자들이 그 끔찍함에 전율하고 있을 때, 화산의 제자들과 임소병의 시선은 오직 청명에게로 꽂혀 있었다.

“도장⋯⋯. 그럼 도장은 아까 그곳에 이 토굴로 통하는 입구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겁니까?”

“어.”

“⋯⋯그, 그럼 호가명이 그 입구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몰아 갈 것이라는 사실 역시 미리 알았던 겁니까?”

청명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놈이니까.”

임소병은 잠깐 넋을 놓고 말았다.

“그럼 설마 제가 호가명의 손에 놀아나 그 막다른 곳에 들어가게 될 것도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

“⋯⋯예? 그럼⋯⋯?”

“그냥 만약을 대비한 거야.”

청명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굳이 시선을 맞출 필요도 없는 건지,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말려들지 않는다면 그걸로 좋은 거잖아. 하지만 만약 말려든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찾아 놔야지.”

“⋯⋯.”

“협곡을 돌파한 순간 이미 길은 열린 거였어.”

임소병은 할 말을 잃고 청명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호가명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오만에 대한 대가를 치른 건지도 모른다.

자신과 계책을 겨룰 상대가 장일소이지, 호가명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러니 사실상 호가명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건, 그가 호가명에게 수 싸움에서 완벽하게 패했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애초에 누가 승리하는가는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싸움은 청명의 손바닥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대체 이 인간은⋯⋯.’

임소병은 이제야 호가명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어째서 호가명이 장일소란 인간을 자신의 계략이 닿는 범위 안에 포함해 두지 않는지 말이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 짜낸 전략이 애초에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결과밖에 내놓지 못한다면 누구나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임소병이 밀려오는 무력감과 황망함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백천이 입을 열었다.

“청명아.”

청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은 주저 없이 질문했다.

“그럼 너는 거기에 이곳으로 진입하는 입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

그 말에 몇몇 화산의 제자들이 움찔하며 백천과 청명을 번갈아 보았다.

한두 번이 아니다. 청명이 지금처럼 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정보를 꺼내며 모두를 놀라게 한 게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굳이 집어서 묻지 않았다. 저놈이라면 무얼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 굳이 묻지 않았다. 그게 화산의 청명에 대한 암묵의 규칙이었다.

그런데 지금 백천이 더는 그 규칙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가장 민감한 질문을 주저 없이 꺼낸 것이다.

“대답해 봐라.”

백천이 재촉했다. 이번엔 청명의 침묵에도 적당히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잠시 후 청명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그 말의 시작은 조금은 뜬금없었다.

“녹림왕이 왜 호가명에게 말려든 줄 알아?”

“⋯⋯갑자기 뭔 소리냐?”

“몰랐기 때문이야.”

백천이 의문 어린 눈으로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임소병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웃음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서늘해 보였다.

“거기에 그런 지형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제 발로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겠지. 안방에서 싸운다는 건 그런 거야. 겪어 보지 않으면 짐작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이점이 존재하지.”

청명의 말에 백천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인가는 접어 둔다 해도, 그의 말 자체는 이번 여정 내내 절절하게 실감했다.

입장을 바꿔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화산에 처음 온 누군가가 화산을 공격하기 위해 산을 오른다? 백천의 머리에 떠오르는 지형만 다섯이 넘는다. 그들을 지옥으로 몰고 갈 천혜의 험지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인즉 그거야. 알고만 있으면 놈들의 노림수도 짐작할 수 있다는 거지. 특히나 저들이 내가 그 지형을 알지 못한다고 여긴다면 더더욱.”

“⋯⋯.”

“녹림왕은 이곳에 이런 지형이 있다는 걸 몰랐고, 호가명은 내가 이곳을 알고 있다는 걸 몰랐어. 그러니 당한 거야. 모르니까.”

백천이 굳은 눈으로 청명의 등을 응시했다.

“전쟁이란 힘으로만 결과가 결정되는 게 아니야. 아니, 정확히는 칼을 휘둘러 대는 것만이 힘은 아닌 거지. 상대를 몰아넣을 수 있는 모든 게 힘이니까.”

청명이 천천히 백천을 돌아보았다. 피가 엉겨 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서늘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

“안 게 아니야. 알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거기로 간 거야. 놈이 아무리 광동을 손에 잡힐 듯 알고 있다 해도, 그곳에서만큼은 내가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그건⋯⋯.”

“어떻게 더 많이 알고 있냐고?”

청명이 입가를 비틀었다.

“어떻게 알았을 것 같은데?”

백천은 순간 뭔가 울컥 치미는 느낌에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옷자락을 잡아 왔다.

돌아보니 이제 겨우 의식을 차린 유이설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이상은 묻지 말라는 듯.

백천은 무어라 다시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청명의 발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좁고 긴 토굴이 끝난 것이다. 그러자 이런 지하에 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너른 공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이 입구를 찾는 데는 못해도 이틀은 걸릴 거야. 그때까지 전력으로 쉬어 둬.”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 말을 남긴 청명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처⋯⋯.”

누군가가 소리를 내기도 전에 백천이 섬전처럼 이동해 쓰러지는 청명을 받아 들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청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새끼.”

그의 목소리가 너른 공동에 느릿하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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