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9화.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2)
호가명은 연신 주먹을 꽉 쥐었다 느슨하게 풀기를 반복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그는 잠시 후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변수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검토해 봐도 더 이상 남은 변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지치지도 않고 연신 남은 변수가 존재할 가능성을 살폈다.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젠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저 안에 갇힌 게 화산이 아니라 소림이라 해도 빠져나갈 방도가 없을 것이다.
“마침내⋯⋯.”
호가명의 입에서 긴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해남에서부터 이곳까지 길고 긴 몰이 끝에 마침내 저들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야 말이다.
“군사!”
부관들의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도 마침내 저들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음을 아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더는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에 떨어뜨렸으니 이젠 도륙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행한 호가명의 안색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냉정한 눈으로 산 사이에 난 길을 바라볼 뿐.
‘녹림왕.’
녹림왕은 분명 상황을 쥐락펴락하며 농락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으니까. 여력이 받쳐 주지 않아 병력의 차이로 패한 적은 있어도, 머리싸움에서는 결코 지지 않는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호가명이 파고든 건 바로 그 임소병의 오만이었다.
‘적지에서 싸운다는 건 이런 거지.’
녹림은 산에 익숙하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임소병은 기이할 정도로 산이라는 지형에 밝았다. 천하 모든 산의 지형을 그 머리에 담아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이 십만대산의 지형만은 머릿속에 없었을 것이다. 녹림이 발을 들이지 않는 곳이니까.
녹림은 산에 거하는 이들이 아니다. 사람이 오가는 곳에 거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인적이 없는 십만대산에 관심을 둘 이유가 조금도 없다.
하지만 호가명은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광동이고, 만인방이 수없이 격전을 펼쳐 왔던 곳이다. 십만대산의 내부까지는 몰라도, 광동의 땅에서 대산으로 접어드는 길이야 손에 잡힐 듯 꿰뚫고 있다.
그러니 호가명이 해야 했던 일은 오직 하나였다.
저들이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
“군사!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기다려라.”
“⋯⋯어찌⋯⋯?”
호가명은 무감정한 눈으로 앞을 주시하며 말했다.
“모두가 함정에 빠진 걸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사실을 모르면 그저 정면 돌파하여 싸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호가명이 느리고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저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사람은 대개 그럴 때 절망에 빠지니까.”
“하, 하지만 배수진을 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절벽을 등지고 싸우는 것과 절벽에 뜻하지 않게 내몰린 것은 완전히 다르다. 결국 밀려오는 절망감을 어찌하지 못하게 되지. 억지로 끌어 올린 열기 따위야 조그만 바람만 불어도 빠르게 식는 법이지.”
“아⋯⋯.”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길지 않은 시간만.”
부관의 손끝이 살짝 떨려 왔다.
쥐새끼처럼 그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적을 마침내 저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호가명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할 침착함. 이게 독심나찰 호가명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된 이유이리라.
“달아나려 들면 그것도 좋겠군요.”
“그렇다.”
그럼 절벽을 반쯤 오른 이들의 등을 찔러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혹⋯⋯ 군사께서는 처음부터 이곳을 염두에 두신 겁니까?”
호가명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부관은 기분이 고양되어 있어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호가명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답했다.
“⋯⋯내가 련주님이라면 그랬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련주님이라면 가능하다. 해남에서부터 이곳까지 저들을 몰아넣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
“하지만 나는 련주님이 아니다. 아니, 련주님이 될 수 없지. 나는 한낱 범인일 뿐이니까. 그러니 같은 과정이 아니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뿐이다.”
부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호가명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과정이 다른데 어찌 결과가 같을 수 있는가?
“같은 결과라 하시면?”
“광동을 벗어나는 길에 놈들을 몰아넣을 만한 지형이 열은 넘는다.”
“⋯⋯.”
“이곳은 그중 하나일 뿐. 놈들이 다른 길을 택했다면 그곳으로 몰아넣었겠지.”
부관이 호가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가명은 자신이 장일소에 미치지 못하기에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부관이 보기에는 대체 어느 쪽이 더 대단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사실 이는 호가명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범인이 ‘천하(天下)’라는 거대한 이름을 건 다툼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손톱이 부러지도록 발버둥 치고 발악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감히 장일소의 곁을 지킬 자격이 없는 인간이 되고 말 테니까.
‘임소병, 아직 어려.’
물론 녹림왕은 대단하다. 하지만 그런 임소병 역시 결국엔 ‘수재’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호가명은 진즉에 자신이 범인이라는 걸 인정했지만, 임소병은 여전히 머리 하나만은 천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 차이가 지금의 결과를 낳았다. 확신하는 자는 자신의 승리를 스스로 의심하지 않으므로.
“시간이 됐군.”
호가명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공격해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야 한다.”
“예!”
호가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관들이 공격을 명했다. 주인의 명만을 기다리던 사냥개처럼 이를 드러내고 있던 만인방도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흡사 산사태에 쏟아지는 토사 같았다.
호가명은 어느새 바싹 말라 버린 제 입술을 매만졌다.
분명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은 하나 남아 있다.
천우맹에서 온 놈들이 해남을 버리고 저들끼리 절벽을 올라 도주할 가능성.
놈들이 그 선택을 한다면 이곳에서 놈들의 숨통을 끊어 내는 건 어려울 것이다.
본래 천우맹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고려할 가치도 없는 변수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민해 볼 수밖에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화산검협이 의식을 잃고 있으니까.
화산검협은 분명 물러서지 않겠지만, 다른 놈들은 알 수 없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몰린 순간 사람은 제 본성을 드러내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놈들은 더는 천우맹일 수 없겠지.’
호가명은 안다. 때로 인간이 지니는 가치는 정량으로 측정되지 않는 다른 무언가에서 나온다는 걸.
그건 저들뿐만 아니라 장일소 역시 마찬가지다.
패도를 잃은 장일소가 장일소일 수 있을까? 야망은 잊고 현실에 만족하기로 한 장일소가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가진 힘이 동일하다 해도⋯⋯. 아니, 객관적인 전력이 더 늘어난다 해도 장일소는 결코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이가 될 것이다.
장일소의 가치란 그의 패도 그 자체니까.
저들 역시 마찬가지다.
최후의 순간에 지키려 했던 것을 버리고 제 목숨만 간신히 붙든 채 달아난다면, 그걸 두고 과연 지금까지의 천우맹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놈들은 죽는다.
목숨은 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파일방과 대등한 위세를 쌓아 가며 사패련조차 압박했던 천우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설사 그게 화산검협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길이라도, 그 책임은 화산검협에게로 돌아갈 터. 그 순간 정파 놈들은 구심점을 잃게 될 것이다.
‘궁금하군.’
놈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매번 잘난 듯 떠들어 대던 협의를 지켜서 이름만은 남기고 산화할 것인가? 아니면 구차한 목숨을 살리고 그 이름을 두엄 더미에 처박을 것인가.
호가명이 차가운 눈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만인방도들이 질러 대는 괴성과 발소리가 음악처럼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저기에 이제 곧 누군가의 비명이 뒤섞이기 시작할 것이다.
‘남은 것은 수습인가?’
어찌 되었건 그가 장일소의 명을 거역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리고 소수의 적에게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도 변치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터.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해도 호가명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었다.
제 목숨을 대가로 장일소가 대업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면, 기꺼이 저승에서라도 웃을 수 있다.
호가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놈들과 조우한 이후로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째 기대했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십만대산의 협곡 안으로 달려들었던 만인방도들 중 몇이 밖으로 돌아 나와 달려오고 있었다.
‘뭐지?’
상황 보고? 아니, 그런 게 필요한 상황이 아닐 텐데?
“구, 군사!”
사색이 된 이들이 그의 앞에 부복했다.
“무슨 일이냐?”
“사, 사라졌습니다.”
호가명은 순간적으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모든 수를 넣어 두고 고려했는데 이들이 보고한 상황은 그 안에 없었으니 혼란이 온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노, 놈들이 사라졌습니다!”
호가명은 부복한 이들을 멍하니 보며 되물었다.
“사라져?”
“예!”
“사라졌다고?”
부복한 이들이 숨을 죽였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지 그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절벽을 올랐단 말이냐?”
“흐, 흔적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마치 시, 신기루처럼⋯⋯.”
“그걸 말이라고 지껄여!”
호가명이 벼락처럼 고함쳤다. 모두가 화들짝 놀라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맹세컨대 그들은 호가명이 이토록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비켜라!”
아예 부복한 이들을 걷어차듯 밀어 낸 호가명은 직접 달려 그곳으로 향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해남을 남기고 천우맹도 놈들만 사라졌다면 이해라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남의 제자들마저 모조리 사라졌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말 신선이라도 되어 조화를 부리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잠시 후 호가명이 맞닥뜨린 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 만인방도들의 멍청한 낯짝뿐이었다.
정말로 없었다.
드높은 절벽과 가파른 산은 그대로건만, 해남 놈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하늘로 솟은 것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호가명의 손이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어떻게?
언제나 차갑고 냉정하기만 했던 호가명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황망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으⋯⋯. 으으⋯⋯.”
잠시 후 그는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칼이 산발이 되어 흘러내렸다.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면, 이런 일을 벌인 이야 정해져 있다.
“화⋯산검⋯⋯협⋯⋯.”
호가명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화산검혀어어어어어어업!”
그의 절규가 절벽을 타고 하늘로 솟구쳐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