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8화.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1)
임소병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당했다.”
세 개의 산이 서로 맞닿은 지형. 길은 당연히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열려 있다.
하지만 어느 쪽 길이든 끝에 놓인 건 동일했다.
까마득한 절벽.
‘절망’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가파른 암석 벽이 산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온전한 상태라고 해도 타 넘는 게 마냥 쉬워 보이진 않는 절벽이었다. 그러니 내력이 고갈되고 지칠 대로 지친 지금이야 논할 의미도 없다.
무리해서 절벽을 오르는 선택을 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는 뻔하다. 등 뒤에서 추격해 온 만인방도들에게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참살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산을 오르는 것도 다를 게 없다. 경사가 가파른 데다 험준하고 숲이 빽빽하니 체력 소모가 지나치게 커서 오히려 공격당할 위험도 커진다.
그러니 결국 이곳은 사방이 절벽으로 막힌 항아리 속이나 마찬가지다. 임소병은 모두를 이끌고 제 발로 사방이 막힌 지형 속에 뛰어든 것이다.
“어째서⋯⋯.”
십만대산은 산과 산이 겹겹이 중첩되어 그 지형을 파악하기가 무척 힘들다. 산의 뒤에 무엇이 있을지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런 것쯤은 이미 해남도로 향하는 길에 확인했고, 오히려 그렇기에 임소병도 이쪽을 도주로로 잡았다.
하지만 임소병조차도 산 뒤에 이토록 깎아지른 절벽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호가명⋯⋯.”
으드드득.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포위망을 뚫었다고 생각했다. 노림수를 모조리 격파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수 싸움에서는 그가 반수 이상 앞서 있다고 여겼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절감하게 되었다. 그 협곡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호가명의 손 위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을.
‘어설픈 게 아니었어⋯⋯.’
급조된 병력이라 마구 들려드는 것 외에는 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밖에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길을 열어 주며 유도할 심산이었으니까.
협곡을 우회했다면 달랐을까?
아니,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는 길이 달라진다고 해서 목적지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엔 이 십만대산에 도달했을 것이다.
왜 의심하지 않았는가? 왜 독심나찰 호가명을 경계하지 않았을까? 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한발 앞서갈 수 있다고 여겼나?
호가명은 사실 임소병이 녹림을 이끌며 해냈던 것 이상의 일을 해냈던 이인데 말이다.
“노, 녹림왕.”
금양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소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제게 말을 걸어오는 게 두려울 수 있단 걸 알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오?”
임소병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오히려 그가 묻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가려던 길은 높은 절벽으로 막혀 있고, 뒤에선 몇천 대군이 밀려들고 있다.
그리고 악에 받친 적들을 맞이해야 할 아군은 모두 한계에 맞닥뜨린 지 오래다. 싸울 힘 따윈 진즉에 고갈됐다.
“녹림왕!”
금양백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지만, 임소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 어떤 말도 이 상황에선 되레 사기를 떨어뜨리게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임소병은 보았다. 아니, 느꼈다.
그가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순간, 그만 바라보던 해남 제자들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던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허망하게 스러지는 것을.
‘아, 안 돼⋯⋯.’
한계에 달한 육체를 어떻게든 움직이게끔 하던 건 살 수 있단 희망과, 적과 싸워야 한다는 의지였다.
그 희망과 의지를 잃어버리는 순간, 한낱 독 안에 든 쥐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의욕을 완전히 잃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최선을 다해 싸워서 한 놈이라도 더 저승길로 데려가자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차피 죽겠지만 그 죽음을 엄숙하고 장렬하게 맞이하자고 해야 할까?
임소병이 익혀 온 어떤 병법도, 그가 해 온 어떤 경험도 이 질문에는 답을 내주지 못했다. 그러니 닥쳐온 절망에 하릴없이 허우적댈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
추격하는 놈들을 뒤에서 틀어막다가 피투성이로 마지막에 이곳에 도달한 백천이었다.
그는 딱히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이 솟은 절벽이나 주변의 지형 등을 꼼꼼히 확인한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어렵겠군.”
임소병의 몸에서 순간 힘이 쭉 빠졌다.
임소병은 자신이 그간 알게 모르게 저 장문대리에게 어느 정도 심적으로 의지해 왔음을 깨달았다.
백천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나온 순간 그가 붙들고 있던 희망의 끈도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백천이 몸을 돌려 그들이 진입해 온 길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럼 별수 없지. 다시 뚫고 나가 다른 길을 찾는 수밖에.”
임소병은 순간적으로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 작자가 뭐라고 한 건가?
백천은 담담히 말했다.
“녹림왕.”
“예?”
“이곳에 비슷한 지형이 많습니까?”
조금 뜬금없이 들릴 수 있는 질문이지만, 임소병은 그 와중에도 백천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곳이 많았다면 마교가 이곳에서 유격전을 벌일 수는 없었겠지요⋯⋯.”
“그럼 됐습니다.”
백천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럼 이곳을 뚫고 나가 옆길로 다시 진입만 하면 된다는 거로군요.”
“⋯⋯.”
“맞습니까?”
임소병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야 당연히 맞다. 당연히 옳은 말이다.
여길 다시 나가 다른 길을 찾기 위해선 독이 오른 만인방의 본대를 뚫어야 한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자, 장문대리. 그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백천의 차분한 질문이 임소병의 말문을 다시 틀어막았다.
다른 방법?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벌써 임소병이 써먹었을 것이다.
백천의 말에는 틀린 게 없다. 지금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 길을 다시 여는 것뿐이다. 아니면 차라리⋯⋯.
“길만 열면 되는 겁니까?”
뒤쪽에서 들려온 윤종의 물음에 백천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이다.”
“복잡하지 않아서 좋군요. 그럼, 녹림왕.”
“예?”
“이놈 좀 맡아 주십시오.”
윤종이 둘러업고 있던 청명을 임소병에게 내밀었다.
“그⋯⋯.”
“목숨 걸고 지키십시오.”
임소병은 얼떨떨한 얼굴로 청명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윤종이 두말없이 백천의 옆에 섰다.
“스님. 우리 사형 좀 맡아 주세요.”
“도장⋯⋯.”
“빨리요.”
당소소도 혜연에게 조걸을 넘기고 앞으로 가려 했다. 조걸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당소소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나, 나도⋯⋯.”
“응?”
“나도⋯⋯ 나도 아직 싸울⋯⋯. 악!”
옷자락을 잡았던 조걸의 손에 당소소의 대침이 가차 없이 박혔다. 화들짝 놀란 조걸을 보며 당소소는 피식 웃었다.
“출혈이 좀 멎을 거예요.”
“⋯⋯.”
“몸이나 잘 추슬러요. 진짜 골로 갈 판이니까. 하여튼 답도 없는 사형 같으니라고.”
당소소는 빠르게 대침을 회수하더니 윤종의 옆으로 가 섰다.
세 사람의 뒷모습을 모두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녹림왕.”
“⋯⋯예?”
“밀려오는 놈들은 우리가 막겠습니다. 열어 준 길로 모두를 이끄십시오. 남궁 소가주와 당 소가주께서 도울 겁니다.”
“⋯⋯.”
“믿습니다.”
임소병의 두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조차 저리 담백하게 나설 수 있다는 말인가?
알 것이다. 이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무리 악을 써 봐야 전멸이라는 결과를 면하기 힘들단 것을.
그럼에도 저들은 기꺼이 앞으로 나섰다. 절망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와는 달리 말이다.
임소병은 이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본디 상식적으로 이곳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짐 같은 해남을 버리고 그들만이라도 절벽을 타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래에서 따라오는 해남의 제자들이 방패막이가 되어 줄 테니 산에 오르는 나머지는 살 수 있다.
이 사실을 저들이 모를까?
아니, 안다. 저들도 분명 알 것이다. 절벽을 타오르는 것에 화산만큼 익숙한 이들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모두가 그런 방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굴고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해남을 지켜 낼 생각인 것이다.
어리석고 멍청하다.
하지만 사파인으로서 평생을 이득을 위해 살아온 임소병조차도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가 아닌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숙. 적이 좀 많은 것 같은데요?”
“고생 좀 하겠구나.”
“⋯⋯말은 잘해요, 말은.”
“사숙한테 건방지게.”
백천과 웃으며 대화하는 당소소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임소병은 그 손을 보며 알았다.
무섭지 않아서 담담한 게 아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그 사실이 임소병을 더 못 견디게 했다. 다른 이들이 모른다고 해도 임소병은 알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게 자신의 오만이라는 것을.
호가명을 압도하면서 한 번이라도 의심을 품었다면 제 발로 이 함정에 걸어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게 아닌가.
임소병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였다.
“이제 그만하십시다, 장문대리.”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중독과 부상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금양백이 백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는 저희를 부끄럽게 하지 마십시오.”
“⋯⋯장문인.”
“이미 해남을 위해 보여 주신 여러분의 협의는 충분합니다. 이 이상을 바라는 것은 그저 수치일 뿐입니다.”
“장문인, 아직⋯⋯.”
“부상 입은 분들을 데리고 절벽을 오르십시오. 뒤는 저희 해남이 막겠습니다.”
“자, 장문인!”
해남의 제자들이 놀라 금양백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금양백은 그저 담담히 대답했다.
“처음부터 그러기로 한 것이 아닙니까?”
금양백의 시선이 임소병의 등에 업힌 청명에게로 향했다.
“화산검협은 우리에게 적어도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죽으라고.”
“⋯⋯.”
“제가 생각하기에, 이곳이 바로 그곳인 것 같습니다.”
“장문인. 아직 저희는 더⋯⋯.”
“장문대리.”
금양백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적진으로 뛰어들어 싸우다 죽는 것이 뭐 그리 명예로운 일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요.”
“⋯⋯.”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만인방과 싸우다 맞이한 멸문에서는 명예를 찾기 어렵지만⋯⋯.”
금양백이 청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명예가 무엇인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게 무엇인지.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백천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해남의 제자들 역시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금양백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저희를 지켜 주었습니다. 우리가 흘릴 피를 대신 흘렸고, 우리가 떠안아야 할 짐을 짊어져 주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제는 우리가 그 빚을 갚게 해 주십시오.”
금양백이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해남 제자들의 두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들이라 해서 이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마지막 각오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금양백의 말은 그 마지막 각오를 위한 용기를 주고 있다.
“마지막만큼은 해남답자꾸나. 해남의 바닷사람들이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도움만 받다가 죽는 건 너무 창피한 일 아니더냐?”
“맞습니다, 장문인!”
“저희가 해야 합니다!”
“사실 달아나는 것도 지치지 않았습니까!”
해남의 제자들이 악을 쓰듯 목소리를 높였다.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달아나기만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달아나다 등에 칼을 맞고 죽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사실은 그들의 마지막마저 더럽힐 테니까.
“저승에 가더라도 먼저 죽은 사형들에게 할 말은 있어야죠.”
그 말에 금양백이 나직하게 웃었다.
“맞는 말이구나.”
그들은 오히려 지금까지 중 가장 평온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를 보는 백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필사의 각오는 보이지 않는다. 끓어오르는 사기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결심이 견고하단 것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리는 것은 이들에 대한 모욕이다. 그 정도는 백천이라도 알 수 있었다.
“환소, 자양!”
“예, 장문인.”
두 눈에 확고한 각오를 다진 곽환소와 이자양이 금양백의 말에 뛰쳐나왔다.
“너희는 이분들을 따라가거라.”
“⋯⋯예?”
“자, 장문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희만 살아남는다면 해남은 멸문해도 멸문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살아남아 언젠가는 해남의 이름을 다시 천하에 떨쳐 주거라.”
“장문인!”
곽환소가 강하게 항명하려 하는데, 순간 금양백이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부탁한다.”
“⋯⋯.”
곽환소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부탁합니다, 사형.”
“자양 사제, 부탁한다. 우리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마라.”
“살아남거라.”
쏟아지는 목소리와 시선에, 결국 두 사람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마 거부할 수가 없다. 가지 않겠다고 시간을 끌 상황이 아니다.
그렇기에 짧은 거부의 말조차도 할 수가 없다. 이 사실이 더욱더 곽환소와 이자양을 참을 수 없게 했다.
“장문대리. 이들을 부탁합니다.”
“⋯⋯장문인.”
금양백이 빙그레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백천을 스쳐 지나가며 그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였다.
“화산검협은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
백천이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을 짓깨물 때였다.
“⋯⋯쿨럭.”
“처, 청명아!”
“화산검협!”
임소병의 등에 업혀 있던 청명이 피 섞인 기침을 토하며 눈을 떴다. 반쯤 감긴 흐릿한 그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여기는⋯⋯.”
청명의 눈빛이 점점 또렷해졌다.
“놀아났군.”
임소병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뒷말이 이어졌다.
“⋯⋯예상대로 말이야.”
임소병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청명의 표정은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게끔 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