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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37화 (1,338/1,567)

1337화. 그 이름만은 새겨 주지. (7)

“녹림왕! 뒤쪽에!”

“압니다!”

뒤를 획 돌아보았던 임소병이 다시 재빨리 시선을 되돌렸다.

‘여하튼 저 독한 인간들!’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정말 해냈다. 이게 바로 그가 화산 놈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돼!”

앞에서 빌어먹을 사파 놈들이 연이어 달려들고 있지만, 저놈들이야 딱히 대단할 게 없다. 볼 것도 없이 오합지졸이다.

‘아무리 만인방이고 사패련이라 해도 끝도 없이 사람을 동원할 수는 없었겠지.’

물론 머릿수야 채울 수 있겠지만, 질적 차이는 채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장일소가 직접 나섰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이곳에 있는 건 호가명이다.

그러니 문제는 앞이 아니라 뒤다. 저 만인방 놈들의 추격을 어떻게든 따돌려야 한다.

그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임소병의 역할이다.

“우측으로! 망할 소가주야! 무조건 정면으로만 뚫지 말고 빈틈을 노리라고, 이 머리에 근육만 찬 인간아!”

“그럼 빨리 말을 하시든가!”

남궁도위는 악을 쓰면서도 임소병의 지시대로 얼른 방향을 틀었다.

상황을 지켜보며 임소병이 눈을 파랗게 빛냈다.

‘수가 많다는 게 꼭 이점은 아니지!’

특히나 지금처럼 명령이 제대로 닿지 않고, 사방팔방에서 인원을 동원했을 때는 반드시 명령 체계에 혼란이 생긴다.

이걸 적당히 이용하면 놈들끼리 서로 얽히게 만들 수 있다.

‘아니,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

“너무 갔습니다! 오른쪽으로 좀 더!”

“이게 뭔⋯⋯.”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임소병이 평소보다도 살벌한 기세로 외치니 남궁도위가 움찔하며 방향을 더 틀었다. 그러자 덮쳐 오던 이들이 마치 일부러 그를 피해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길이 열렸다.

남궁도위는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지체 없이 땅을 박찼다. 그의 검이 휘둘러지는 곳으로 점차 드넓은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임소병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마음이 급했군, 호가명.”

부관이 눈치를 살피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그럴 만도 했다.

기껏 거의 다 잡았던 화산검협은 결국 목숨을 붙인 채 본진으로 합류했고,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이들마저 모조리 살아남았으니까.

그 과정에서 해남 놈들을 몇 더 잡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조무래기 목을 벤 것에 불과하다.

실패. 지금까지의 과정을 통틀어서 고려해 봤을 땐 그리 평하는 수밖에 없다.

이 협곡에 투입되었던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다고 말이다.

단 하나와 수많은 인원, 거기에 동원한 문파들까지 수없이 멸문했으니 말이다.

“적확한 평가지.”

“⋯⋯구, 군사?”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호가명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녹림왕의 재능은 확실히 남다르다. 그가 도주만을 목표로 하여 군을 운용하니 그 속도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군사! 점차 벌어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앞에 있는 놈들은 저들의 도주를 전혀 저지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한번 뚫린 뒤로는 추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여지없이 돌파당한 뒤, 벽으로 돌변해 추적하는 만인방의 앞을 가로막는 것뿐이었다.

과한 욕심이 빚어낸 운용의 실패.

병법가로서 이 상황을 해석하라 하면 그리 평했을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이들을 무작정 한꺼번에 전장에 밀어 넣은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분명 녹림왕은 뛰어난 인재다. 두뇌만 따지면 나보다 낫지.”

“⋯⋯군사?”

“하지만 경험이 부족해.”

호가명을 바라보는 부관들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그들이 듣기에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저 임소병은 녹림을 이끌고 만인방과 수없이 전투를 치렀던 이다. 그런 이를 두고 경험이 부족하다니.

물론 호가명의 입장에서야 그리 평하는 게 틀리지 않을지 모르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녹림왕은 오히려 나이에 비해 노장에 속하지 않는가.

“얼마나 싸워 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끔은 너무 많은 경험이 독이 되기도 하지.”

부관들은 무언가 질문하지 않고 오히려 숨을 죽였다. 묻지 않았음에도 대답이 나오고 있다는 건, 지금 호가명이 그들과 대화하는 게 아니라 제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이럴 땐 절대 호가명을 방해해선 안 된다.

“그 확신이 절망이 되지 않아야 할 텐데.”

호가명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드리웠다.

“녹림왕!”

혜연에게서 청명을 넘겨받은 윤종이 그를 등에 업고는 임소병의 바로 뒤까지 달려왔다.

청명을 본 임소병의 얼굴이 굳어졌다.

“살아는 있는 겁니까?”

“당연한 말을⋯⋯!”

“⋯⋯그 꼴로 잘도.”

임소병이 이를 악물었다. 처참한 청명의 몰골을 보고 있으니 별안간 뭐라 표현하기 힘든 울화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었다.

“빌어먹을!”

“녹림왕! 이제 어디로 갑니까!”

날아든 질문에 임소병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천은 그들을 두고 훌쩍 후방으로 날아가 등 뒤를 추적하는 만인방을 막아 내고 있다. 앞에서 공격해 오는 놈들은 오합지졸이고, 뒤에서는 만인방이 쫓아오고 있으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이 말인즉, 앞에서 모두를 이끌고 위험에서 구해 내야 할 건 온전히 임소병의 역할이란 뜻이었다.

“어디로 가냐고 물었습니까?”

“예!”

“뻔한 걸 묻고!”

그들이 향해야 할 곳의 조건은 정해져 있다.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지형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곳.

그리고 도주하는 소수가 몸을 숨기기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곳.

이 주변에 그런 곳은 한 곳밖에 없다. 역사가 증명했고, 수많은 이들이 피 흘리며 그 가치를 증명한 곳. 그렇기에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으려 하는 저주받은 땅이 된 곳.

“대산(大山)!”

윤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른 평원과 이어진 지평선, 그리고 그 위로 꽂힌 칼처럼 삐죽삐죽 솟은 산봉우리들이 보였다.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타고 올랐다.

광동과 광서에 걸쳐 수천 리에 달하는 저 산맥을, 세상은 십만대산이라 부른다.

“이리로!”

임소병이 청명을 덥석 잡아 제 어깨에 둘러업었다.

“소가주를 도와주십시오! 일각! 일각이면 도착합니다! 그럼 저들을 따돌릴 수 있습니다!”

“예!”

윤종도 가타부타 말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지금 화산의 제자 중 가장 상태가 좋은 건 그와 백천이다. 그가 제 역할을 해내야 했다.

“좌측에 매복이 있습니다! 우측으로!”

“예!”

“그 뒤에는 앞에서 덮쳐올 겁니다! 매복을 지나는 즉시 좌측으로 방향을 트십시오! 절대 속도를 과하게 높이면 안 됩니다! 허리가 끊기면 큰일 나니까!”

“알겠습니다!”

윤종이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다르다!’

적을 상대하는 게 쉬워진 건 아니다. 하지만 똑같이 한 명을 베어 내도 확연히 더 많이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게 병법인가?’

적의 흐름을 알고 그 결을 찌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몸으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영역. 무인이 아닌 책사들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 이제야 어설프게나마 알 것 같았다.

“생각하지 말고 가십시오!”

“예!”

임소병이 이를 악물었다.

‘한 번이면 된다!’

십만대산에 몸을 숨겨 수습할 시간을 한 번만 벌면 된다. 그럼 상황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나아질 것이다. 그러니 대산까지 도착만 할 수 있으면 된다.

“직진! 전력으로 뚫으십시오!”

“예!”

앞쪽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금양백도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뒤처지지 마라! 기필코 따라가야 한다!”

그와 동시에, 땅으로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장로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금양백은 눈을 질끈 감고 외면했다. 지금은 하나하나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달려라, 어서!”

임소병은 후방 쪽을 확인했다.

화아아아악!

후미에서 붉은 매화가 폭발적으로 피어나고 있다. 아무리 만인방이라고 해도, 저 말도 안 되는 검기를 뚫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터.

이번 추격전에서 화산의 제자들이 보여 준 신위는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다.

하지만 지금 백천이 보여 주고 있는 검기는 그런 화산의 제자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적으로 안 만나서 다행이군.’

후방은 백천이 반드시 막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앞만 생각하고 달리면 된다.

“그대로!”

임소병이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부채를 현란하게 휘둘렀다. 옆쪽에서 짓쳐 달려오던 이들이 그가 뿜어낸 선기에 잘려 나가며 우르르 허물어졌다.

“몰아쳐라!”

주춤한 사파인들에게 달려든 곽환소가 힘껏 검을 박아 넣었다. 용기백배한 해남의 제자들 역시 마지막 힘을 짜내며 검을 휘두르고 앞으로 달렸다.

이미 수는 절반 이상 줄었다. 이곳까지 오며 치른 희생이 너무도 크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일어나 버린 희생을 돌아볼 때가 아니다. 봐야 하는 건 오직 앞. 지금 그들이 나아가야 할 곳이다.

“으, 으으으⋯⋯.”

“피, 피해!”

전신에 피칠을 한 채, 마귀처럼 달려드는 윤종과 남궁도위를 보며 사파인들이 기겁하여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겁을 집어먹은 이들을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폭발적인 남궁도위의 검과 완벽하게 절제된 윤종의 검이 어긋남 속에 조화를 이루어 적을 유린했다.

파아아아앗!

베고! 베고! 또 베어 내고!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검을 휘두르던 윤종이 막 눈앞의 적을 베어 냈을 때였다.

“커억!”

목이 베인 이가 상처를 부여잡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 순간 윤종은 알아챘다. 더는 그를 막아서는 이가 없음을.

어느새 구릉 같은 산이 성큼 그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까마득하게 솟은 산봉우리 사이로 확연한 길이 보였다.

“녹림왕!”

“뒤쪽! 쫓아오는 이들을 막으십시오! 해남 놈들을 먼저 보내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율이 이는 걸 느꼈다.

도달했다.

저 바다를 건너, 광동을 넘어, 지옥 같은 협곡을 뚫어 낸 끝에 마침내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대로 가십시오! 뒤는 저희가 막겠습니다!”

“하지만⋯⋯!”

“가십시오, 어서!”

윤종의 고함에 해남의 제자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갔다. 좌우로 솟아오른 그리 높지 않은 산. 하지만 너무도 가팔라 차라리 절벽으로까지 보이는 산 사이로 해남의 제자들이 질주했다.

“아아아악!”

누군가는 아예 날아온 도에 쓰러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곳에 도착하고도 기진하여 허물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남 제자들은 그 와중에도 저 약속의 땅 십만대산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진입하고 있었다.

“스님!”

“예!”

유이설을 업은 혜연도 그들의 뒤를 바삐 따랐다. 조걸을 업은 당소소 역시 전력으로 달려 선두에 자리했다.

“사, 사형⋯⋯.”

“먼저 가라, 걸아!”

조걸과 눈을 마주친 윤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종은 빠르게 뒤를 살폈다. 그때 이 강남 땅을 수놓는 매화 잎이 숱하게 보였다.

어느 한 곳도 나무랄 데 없는 절정의 검기!

달라붙는 적들을 단번에 떼어 낸 백천이 달려오고 있었다.

“사숙!”

백천의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적의 피인 줄로만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백천이 흘리는 피가 적지 않았다. 이를 알아챈 윤종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달려라!”

하지만 백천은 오히려 그런 윤종을 재촉하기만 했다.

윤종과 임소병, 남궁도위와 당패가 그런 백천을 지나쳐 십만대산으로 접어들었다.

“사숙!”

“놈들이 따라오기 전에 떼어 낸다! 가자!”

“예!”

윤종의 목소리는 살짝 고양되어 있었다.

아직 추격을 완전히 따돌린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많이 다를 것이다. 이 대지를 뚫고 솟아난 가시 같은 산들은 그들이 은신할 곳을 만들어 주고, 적의 추격을 힘들게 할 테니까.

일단 매복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양상은 완전히 달라질 터. 그건 이미 해남으로 가는 와중 십만대산을 보며 생각했던 바가 아니던가?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며 치른 희생이, 그 대가가 그저 헛된 건 아니었다.

윤종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던 그때, 저 앞쪽에 몰려 있는 이들이 보였다.

“기다리지 말고 계속 가십시오, 어느 쪽으로든!”

그러자 앞서가던 해남의 제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들을 본 순간, 뒤에 있던 화산의 제자들은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단 걸 알았다.

해남 제자들의 얼굴은 마치 귀신이라도 맞닥뜨린 듯 희게 질려 있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습니다.”

“예?”

곽환소의 입에서 절망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앞이⋯⋯ 앞이 막혔습니다, 도장.”

순간 모두가 입을 잃기라도 한 듯 침묵했다. 정적이 내려앉은 그 공간을 을씨년한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임소병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서, 설마⋯⋯.”

임소병이 황급히 산골짜기의 밖을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저벅.호가명은 느릿하게 화산과 해남이 진입한 골짜기를 향해 다가섰다. 입가에 맺힌 회심의 미소가 그의 심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적이지만 훌륭했다. 그러니⋯⋯.”

무감정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이름만은 새겨 주지. 모두가 똑똑히 그 최후를 알 수 있도록.”

긴 추격의 끝을 선언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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