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5화. 그 이름만은 새겨 주지. (5)
“옵니다!”
그 말에 윤종이 곧장 땅을 박찼다. 사파 무리가 좌우를 점하고 새까맣게 달려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끝이 없어!’
그토록 치열하게 협곡을 빠져나왔는데 어째 적의 수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물론 지금 달려들고 있는 건 사패련의 정예가 아니라 대충 긁어모은 이들이다. 강호에서는 겨우 이류나 되면 다행일 어중이떠중이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저만한 수가 모이면 부담이 된다. 특히 협곡에서 내력과 체력을 모두 소진해 버린 이들에겐 부담을 넘어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윤종! 중앙으로!”
“예!”
윤종은 백천의 지시에 따라 방향을 틀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적들의 포위망에 파고들었다.
적들의 강점은 그 수가 더럽게 많다는 것. 하지만 적의 약점 역시 그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윤종은 양쪽 병력이 합류하는 지점을 노려 검을 떨쳤다. 그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순간, 검에서 뿜어져 나간 검기가 마치 바다를 가르듯 달려오던 이들을 좌우로 갈랐다.
강제로 갈라서 생겨난 틈을 향해 달려 나간 윤종이 검을 다시 한번 휘둘렀다. 검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쇄애애액!
“아아아악!”
적들은 손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쾌속하지도, 강렬하지도 않으나 시의적절한 검이 이 순간 확실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백천의 두 눈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
‘단단하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데다 한 줌 남은 내력을 겨우겨우 쥐어짜야 하는 상황임에도, 윤종의 검에는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 평정심이야말로 백천과 차별화되는 윤종의 가장 대단한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윤종 역시 한계에 몰려 있단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타아아아압!”
백천은 비호처럼 날아들어 윤종이 만들어 낸 틈으로 낙하했다. 동시에 그의 매화검이 횡으로 휘둘러지며 달려드는 사파인들을 대번에 양단했다.
“으, 으으!”
사파인들의 두 눈에 공포가 어렸다. 어차피 이들이야 단련된 만인방의 무인도 아니며, 갑작스러운 명령만 아니었다면 화산의 제자들을 상대할 일도 없었다. 그저 후환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키다 막아선 것뿐이다.
백천은 이런 이들을 기세로 제압하고, 전장의 흐름을 이끌어 오는 방법을 이미 지겹도록 보고 배웠다.
쾅!
진각을 강하게 밟은 백천이 사방으로 검기를 뿜었다. 보기에야 더없이 화려하지만, 딱히 큰 내력이 실리지 않은 허초로 가득한 검기였다.
정파에서는 이런 속 빈 강정 같은 검기를 추구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변칙이 위력을 크게 발휘할 때도 있는 법.
“으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내력이 실리지 않은 허초가 날아드는 것임에도, 이미 엉덩이를 빼고 있던 놈들은 냅다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뒤에서 달려들던 이들 역시 기겁하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백천이 눈이 빛났다.
이들은 지금 차마 달려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이들과 검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겁에 질려 휘두르는 검격조차 위협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최대한 충돌하지 않고 빠르게 돌파하는 것.
“그대로 달려라, 윤종!”
“예!”
윤종과 백천이 연 길을 따라 해남의 제자들이 내달렸다.
한번 고여 버린 호수를 움직이는 건 쉽지 않다. 길을 열어 줘 버린 사파인들은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못하고 엉덩이를 뺀 채, 검을 휘둘러 댔다.
“이 개자식들!”
하지만 그런 어정쩡한 공격에 당할 해남 제자들이 아니었다.
쇄애애애액!
“아아아아아아악!”
상대가 너무도 나빴을 뿐, 해남 역시 강호 어디에 내어놔도 그 실력을 인정받을 구파일방이다.
더구나 해남의 제자들은 해남도에서 이곳까지 오며 부족했던 경험과 독기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니 대충 긁어모은 사파인들의 공격이 먹힐 리 만무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파의 무서운 점은 무위의 고강함에서 오는 게 아니다.
“또 옵니다, 앞에!”
“으⋯⋯.”
백천의 눈이 순간 일그러졌다. 우전방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들을 봤기 때문이다.
달려오는 속도로 보아, 실력이야 여전히 변변찮은 듯했지만 순간의 기세만큼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압도적인 수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법이니까.
승부는 기세가 반이다. 어영부영 대처하다간 순식간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그리되면 조금 전 겁을 집어먹었던 이들조차도 다시 힘을 얻어 달려들고 말 테고.
“우측으로!”
“사숙! 그럼 다른 곳이 위험합니다!”
순간 백천이 멈칫했다. 저 말인즉, 그들이 아닌 해남이 고스란히 공격에 노출될 거란 의미이므로.
그 순간, 뒤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멈추지 말고 계속 달리라고!”
“녹림왕?”
“멈추지 마십시오! 멈추면 바로 포위당합니다! 그럼 어떻게 될지 모르시겠습니까? 뒤쪽은 제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어서!”
“알겠습니다! 윤종, 우측이다!”
“예!”
임소병의 말이 백번 옳았다. 이곳은 개활지다. 협곡과는 달리 수의 부족함을 무위로 덮을 수 없다.
협곡에 진입하기 전의 상태였다면 포위당했다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진맥진한 지금은 불가능하다. 체력은 떨어질대로 떨어졌고, 부상자를 업은 터라 기동력은 처음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위당하는 순간, 포위를 돌파해 낼 방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백천과 윤종은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사숙! 좌측에서도 옵니다!”
“신경 쓰지 마라! 앞으로 가!”
“하, 하지만 지금 후미와 간격이 너무 벌어졌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양단됩니다!”
“녹림왕이 막아 낸다!”
“하지만 지금⋯⋯!”
“가라! 내가 지켜보고 있어!”
“예!”
윤종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안한 생각을 강제로 지워 냈다.
돌아가는 전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윤종이 백천보다 나을지 모른다. 백천은 때때로 감정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윤종이 감히 따라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백천의 능력은 다름 아닌 결단력이다. 윤종은 그 결단력을 신뢰했다. 그리고 더없이 믿었다. 백천이 반드시 올바른 판단을 내려 줄 것이라고.
그러나 모두가 윤종처럼 백천을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장문대리!”
뒤쪽에서 달려온 남궁도위가 백천을 향해 고함을 쳤다.
“뒤쪽의 도장들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속도를 늦춰야 합니다!”
백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힘주어 말했다.
“여력이 생겼으면 윤종을 도와서 앞을 뚫으십시오, 소가주.”
대답 대신 명령이 돌아오자 남궁도위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장문대리! 청명 도장이 낙오됐단 말입니다!”
“압니다.”
“안다고요? 그게 알면서도 할 말입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청명 도장을 미끼로 내어 주고 달아나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제정신입니까?”
순간 백천이 벼락같이 손을 뻗어 남궁도위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살기까지 어린 백천의 두 눈이 남궁도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남궁도위가 당황하여 그런 백천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천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뒤로 달려가서 놈을 구해 내고 나면?”
“⋯⋯장문대리?”
“그 뒤는 어떻게 할 건데?”
백천의 악물린 턱에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사이좋게 여기서 같이 죽자는 겁니까? 최선을 다해 놈을 구해 냈다고 만족하며 다 같이 뒈지면 됩니까?”
남궁도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백천은 그의 멱살을 콱 밀치듯 놓았다.
지독히도 무례한 행동이지만, 남궁도위는 화를 내는 대신 차가운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우리만 살겠다는 겁니까? 같이 죽기는 싫으니까?”
백천은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지껄일 여력이 있으면 검이나 휘두르십시오.”
“장문대리!”
남궁도위의 고함에 백천이 다시 획 돌아보았다. 이제껏 꾹 누르며 참고 또 참았던 울분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당장 뒤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야 내가 더해, 이 개자식아!”
백천의 고함에 남궁도위가 흠칫했다.
그 어마어마한 기세가 아닌,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남궁도위를 크게 때리고 지나갔다.
백천은 일시에 터져 나온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운 듯 손을 떨었다.
“⋯⋯앞을 도우십시오, 소가주.”
백천은 힘겹게 말하며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꽉 깨문 입술에서 배어나던 피가 결국 한 줄기 흘러내렸다.
저곳에 있다.
청명이 놈도, 사매도, 그리고 조걸 놈까지.
당장 땅을 박차고 달려가고 싶다. 당장이라도 이들의 방향을 돌려 그들을 구하러 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 선택을 가장 경멸할 이가 청명일 테니까. 그놈은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 때문에 다른 이들이 전멸하는 꼴은 보지 않을 테니까.
‘사이좋게 죽는 길 따윈 없어. 그렇지?’
닿지 못할 물음을 속으로 던진 백천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목에 칼이 박힌 상황에서도 포기 같은 건 없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이곳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다.
그가 지금까지 청명에게 배운 것이 그거니까.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였다.
“⋯⋯반드시 올 겁니다!”
백천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 외침에, 검을 휘두르던 윤종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백천은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망할 조걸 놈이 저 대신 갔으니까.”
백천은 확신을 담아⋯⋯. 아니, 더없는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뒤에 있는 놈들 중에 나보다 모자란 놈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놈들이라면 반드시 올 겁니다!”
이를 갈아붙인 그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니 우리는 길을 열지 못해 놈들이 죽는 결과만은 만들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파아아아앗!
윤종은 그 말에 호응하듯 달려드는 이들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자신 역시 그 말을 믿는다는 듯이.
다소 마음이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백천을 빤히 보던 남궁도위 역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검을 움켜쥔 채 앞으로 나섰다.
백천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망할 새끼.’
돌아갈 수 없다. 설령 이곳 모두가 청명을 구하러 간다고 해도, 그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 청명이 놈이 그 선택을 용인할 리 없으니까.
설사 이 모든 선택이 잘못되어 지옥에서 놈과 마주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멍청하다는 욕은 기꺼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왜 자신을 믿지 못했냐는 힐난만큼은 받고 싶지 않다.
백천은 자꾸만 뒤로 옮겨붙으려는 시선을 억지로 막았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믿는 것이다.
우둔하고 멍청하게.
벌어졌던 길을 다시 좁히며 파도처럼 밀려드는 사파 무리가 보였다. 남궁도위와 윤종만으로는 대처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지기 무섭게, 백천의 발이 땅을 박찼다.
붉은 검기가 사파 무리를 향해 폭포처럼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비산하는 검기 속에서 백천의 안광이 무시무시하게 빛났다.
‘반드시 와야 한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욕은 그때 얼마든지 들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