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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34화 (1,335/1,567)

1334화. 그 이름만은 새겨 주지. (4)

“놓치지 마라!”

“반드시 죽여야 한다!”

만인방도들이 필사적으로 유이설을 쫓았다.

목이 터지도록 지르는 괴성과 두 눈에 찬 독기는 협곡 안에서 치렀던 전투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나 기세는 분명 달라졌다.

더 절박하다. 더 필사적이다. 얼굴에 떠오른 빛은 절박과 필사라는 표현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

파아아앗!

만인방도들은 땅을 힘차게 박찼다. 어떻게든 청명을 뒤쫓고 따라잡아 그 목에 검을 꽂아 넣기 위해서. 그 숨을 완전하게 끊어 놓기 위해서.

“잡아아아아아!”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본디 만인방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만인방이다. 이는 만인방에 소속된 이들이 저마다 가슴에 품고 있는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협곡 안에서 청명이 보였던 모습 앞에서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는 모두가 알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저놈을 놓치는 순간, 언젠가는 저놈과 다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먼 훗날.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운 시기에.

이들은 청명이 혈검단을 괴멸시키는 걸 두 눈으로 지켜봤다. 그런데 부상을 입지 않은 청명과 대면하게 될 거란 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죽여야 한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서로 말을 나누고 의견을 모을 필요도 없다. 청명이 유이설의 등에 업힌 순간, 이곳 모두의 의지는 자연히 한곳으로 모였다.

무슨 수를 쓰든, 어떤 희생을 치르든, 무조건 저놈을 죽여야 한다!

“으아아아아앗!”

만인방도들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유이설에게로 쇄도했다. 사람이 사람을 추격하는 광경이라기보다는 밀어닥친 태풍에 불어난 급류가 계곡을 뒤덮는 듯한 모양새였다.

타악!

유이설은 필사적으로 땅을 박찼다.

그녀의 신법이 화산제일임은 논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그녀의 내력 역시 오랜 전투로 소진될 만큼 소진되어 버렸다. 게다가 의식을 잃어 늘어진 청명까지 등에 업고 있으니 발이 평소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죽어라아아아아!”

유이설을 따라잡은 만인방도는 악을 쓰며 검을 휘둘러 댔다.

바로 그 순간, 유이설은 지금부터 그녀가 겪어야 할 전투가 이제까지와는 확연히 다를 거란 사실을 알았다.

도가 허공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가르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가 아닌, 그녀의 등을 향해서.

파앗!

카아아앙!

빠르게 뻗어진 그녀의 검이 날아드는 도를 쳐 냈다.

으득.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혼자였다면 굳이 막아 내지 않아도 됐을 도격이다.

아니, 막아 내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라, 막지 않아야 했다.

몸의 중심에서 벗어난 도를 억지로 튕겨 내기 위해서는 배 이상의 힘이 필요한 법이니까. 손목에 가해지는 충격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쇄애애애액!

옆에서 날아드는 도 역시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최소한의 동작으로 낭비를 줄이며 피했을 도격이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그녀의 육신이 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이설은 몸을 최대한 비틀고 움직이며 찔러 오는 도를 피했다. 평소와는 다른 움직임에 몸 중심이 어긋났고, 완벽히 유지되던 신체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녀의 움직임은 늘 유연하고 유려했다.

하지만 이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지독하게 반복해 온 수련으로 한 올 한 올 실을 직조하듯 만들어 낸 것. 그 토대에는 당연히 ‘균형’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그 균형이 무너진 이상 유이설은 더 이상 완전하게 유이설일 수가 없었다.

“하앗!”

그녀의 입에서 드물게 기합이 터져 나왔다. 이내 검이 빛살처럼 허공을 내질렀다.

피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방법은 하나, 공격을 받기 전에 공격하는 것뿐이다.

“크아악!”

유이설이 내지른 검은 만인방도의 심장에 여지없이 박혔다.

평소와는 달라진 검로(劍路)지만, 그 뒤틀린 검로로도 유이설의 검은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적들은 그녀만큼⋯⋯. 아니, 어쩌면 그녀 이상으로 필사적이었다. 심장이 꿰뚫린 이를 발판 삼아 뛰어오른 이들은 산사태 때문에 쏟아지는 토사처럼 유이설을 덮쳐왔다.

“죽어라아아아아아아!”

서걱!

청명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던 도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어깨 바로 앞을 가르고 지나갔다. 도 자체는 피했으나 흘러나온 예기가 여지없이 유이설의 피부를 갈랐다.

그녀에겐 고통을 느낄 틈조차 없었다. 몸을 거의 눕히듯 뒤로 날린 유이설은 땅에 손을 짚으며 빠르게 회전했다.

콰앙! 콰앙!

이내 그녀가 벗어난 곳에서 폭음이 울리며 땅거죽이 뒤집어지고 솟구쳤다. 몸을 날리는 게 한순간만 늦었어도 그녀의 몸은 지금쯤 잘 다진 고깃덩어리 꼴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날아든 돌이며 파편이 몸에 박히거나 생채기를 남겼다. 그러나 유이설은 몸에 상처가 난 줄도 모르고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기에 바빴다.

타아아앙!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위로 쏟아지던 만인방도 셋의 허리가 단숨에 양단되었다. 뜨거운 피와 내장 조각이 쏟아져 내렸다.

유이설은 땅을 힘껏 손으로 꽉 움켜쥐고 단번에 몸을 끌어 올렸다. 손톱이 뒤집히고 부러졌지만 알 틈도 없었다.

그녀의 몸이 위로 쑥 당겨진 순간, 다리가 있었던 자리로 곧장 두 개의 도가 날아들었다.

타앗!

유이설은 땅을 박차는 동시에 다시 뒤를 보고 섰다. 나아가야 할 앞을 보며 달리기만 하면 훨씬 빠르겠지만, 결코 그럴 순 없었다. 등 뒤에서 날아드는 도기에서 청명을 보호할 방법 따위는 없으니까.

달아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적을 마주해야 한다. 그 지독한 상황을 전신으로 버텨 내는 그녀의 눈앞으로 도기가 빽빽하게 날아들었다.

유이설은 섬전처럼 검을 휘둘러 공격을 쳐 냈지만, 아무리 그녀라 해도 동시에 날아드는 도기를 모두 막아 내긴 힘들었다.

서걱!

상완을 스쳐 간 도기가 그녀의 근육을 단숨에 끊고, 뼈가 보일 정도로 큰 상처를 새겼다.

서걱!

옆구리를 스치고 간 도기 역시 피부를 가르며 깊은 자상을 남겼다.

콰아아앙!

정면에서 맞받았던 도기는 그녀의 몸을 가르지는 못했지만, 검을 잡은 손목을 강제로 뒤틀었다. 손목 혈관이 터졌고, 뼈가 으스러질 듯 욱신거렸다.

지금 운신의 자유를 얻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좁은 협곡에서는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이들의 수가 한정된다. 하지만 협곡을 벗어난 순간, 도기가 닿는 거리라면 어디서고 공격이 날아들 수 있다.

등에 사람을 업은 채 그 공격을 모두 피하고 막아 낸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이설은 절망하는 대신 청명을 등에 고정하고 있는 장포를 더 단단히 묶었다.

‘지켜.’

할 수 있어서 하는 게 아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다.

화산에서 청명의 그 말을 가장 잘 이해할 사람은 어쩌면 유이설일지도 모른다.

이건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다.

유이설은 그 생각에 한 치의 의심조차 없었다. 설사 그녀의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청명만은 반드시 살려 보내야 한다.

파아아앗!

흙투성이가 된 유이설이 잠시 앞을 향해 돌아서서 있는 내력을 다해 땅을 박찼다. 청명을 업은 그녀의 몸은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쏘아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아든 도기가 그녀의 종아리를 베었다. 허공에 핏방울이 흩날렸다.

하지만 대신 만인방도와 유이설의 거리는 훌쩍 벌어졌다.

“추격해라!”

“여자는 신경 쓰지 마라! 화산검협을 노려! 기필코 죽여야 한다!”

“절대 놓쳐서는 안 돼!”

연신 악에 받친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화산검협 청명을 죽여야 한다고. 반드시 그 목숨을 빼앗고야 말겠다고.

호가명은 쓰러져 식어 가는 괴량의 시신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괴량의 두 눈에는 죽기 직전 품었던 공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잠깐의 시선을 주었던 호가명은 말 한마디 없이 그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단주라.’

대와 단은 다르다. 그리고 대주와 단주는 더더욱 다르다.

대주가 적의 손에 죽거나, 작전에 투입되었던 대가 괴멸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다. 모든 일에는 희생과 대가가 필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단을 잃고, 단주를 잃은 건 경우가 다르다.

만인방의 단은 만인방 전력의 핵심이고, 호가명이 통제할 수 있는 이들로 한정한다면 그 가치가 더더욱 올라간다.

그런 단이 괴멸되었고, 그런 단을 이끌던 괴량이 죽었다. 큰 사건이 아닐 리 없다.

하지만 이번에도 호가명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도 스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제 달아나고 있는 유이설에게, 정확히는 그녀의 등에 업힌 화산검협에게 꽂혀 있었다. 의식을 잃고 늘어진 화산검협을 주시하는 호가명의 눈빛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괴량과 혈검단을 제물로 바쳐 화산검협을 의식불명으로 만들었다.

다른 이들이 듣는다면 미친 짓거리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가명은 이 희생으로 예상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여겼다.

물론 괴량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겠지만, 애초에 호가명은 괴량 따위가 청명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리 따위에게 물리는 용이 있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다행히도 괴량은 제 역량 이상을 해 주었다. 아니, 어쩌면 청명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다를 바 없다.

죽은 괴량이 듣는다면 지옥에서 뛰쳐나올 것이다. 하지만 호가명이 생각하는 괴량의 가치는 딱 그 정도였다. 그나마 조금은 말이 통하던 단주 하나를 잃은 건 아쉽지만 말이다.

‘혈검단 따위⋯⋯.’

청명을 죽일 수만 있다면, 몇이라도 제물로 바칠 수 있다.

이제 남은 건 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저들을 그가 원하는 대로 집어삼키는 것뿐이다.

화산검협이 이끄는 저들은 호가명조차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강군이지만, 화산검협이 없는 저들은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으니까.

“준비는?”

“명하신 대로 배치했습니다!”

“단 하나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네 목숨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싸늘한 목소리에 부관이 핏기 가신 얼굴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호가명의 두 눈엔 은밀하지만 선명한 살기가 번득였다.

‘두 수, 아니⋯⋯. 세 수인가?’

이제 불과 세 수 정도. 시간으로 따지자면 불과 일각.

그 일각 내에 화산검협의 운명이 결정 난다. 그가 정해 놓은 수순대로 말이다.

호가명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침착해라.’

마지막까지 일말의 변수도 허용할 수 없다.

이건 그의 모든 것을 건 전략이다. 해남에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화산검협 하나의 목숨만을 목표로 했고, 그 전략의 결실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가 없는 짐승은 몰아넣으면 그만이지.”

호가명은 문득 궁금해졌다. 화산검협의 목을 들고 마주한 장일소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다.

‘어쩌면 이건 나의 소심한 반항일지도 모르겠군.’

머릿속에 잠시 피어올랐던 저열한 상상을 지운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반해 눈빛은 점차 어둡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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