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3화. 그 이름만은 새겨 주지. (3)
일순 세상이 짓눌려 뭉개진 것만 같다.
그 와중에도 오직 하나 선명한 것은 그녀가 익히 알던 이의 등을 뚫고 나온 폭이 좁고 예리한 금속이었다.
등에 삐죽이 솟은 검을 타고 천천히 검붉은 피가 흘렀다.
등을 뚫고 나온 검을 타고 천천히 붉은 피가 흘렀다. 검신을 붉게 물들이며 그 끝에 다다른 피는 길게 늘어지며 아래로 점점이 떨어졌다.
얼굴에 튄 피의 열기, 눈에 보이는 모든 광경, 그리고 무엇보다 힘없이 늘어진 청명의 어깨가 너무도 생생했다.
하지만 유이설은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감각은 부정할 여지 없이 느껴지나, 그 어느 것 하나도 곧이곧대로 이해의 영역에 들어서질 않았다.
보고 있음에도 볼 수 없는 듯했고, 듣고 있음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발을 멈췄다.
이미 늦어 버렸기 때문에?
아니다. 그녀가 빠르게 달려들어 청명을 구하려는 순간, 청명의 등을 뚫고 나온 검 끝에서 새파란 검기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이상 접근한다면 당장 청명을 두 쪽으로 갈라 버리겠다는 위협이었다.
그러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연이어 날아든 혈검단원들의 검이 청명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옆구리에 박히는 모습을 보면서도 말이다.
콰득! 콰득!
순간 유이설의 몸도 같이 칼에 찔린 듯 움찔 떨렸다.
크게 부릅뜬 그녀의 눈엔 분노도, 안타까움도 아닌 공포가 어려 있었다.
실감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었다면 쳐 내지 못할 이유가 없는 공격을, 지금의 청명은 막아 낼 수 없었던 거니까.
어쩌면 영원히 볼 일 없을 거라 여겼던 화산검협 청명의 한계가 지금 이렇게 드러났다. 그것도 그녀가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방식으로 말이다.
벌어진 그녀의 입에선 어떠한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새어 나올 수 없다고 해야 옳았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순간, 무슨 희미한 소리라도 내는 순간 저 작은 몸에 틀어박힌 검이 비틀려 그 심장을 갈라 버릴까 봐.
그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걸음. 그 몇 걸음의 거리가 영원의 벽처럼 멀었다.
손을 파고드는 확실한 감각.
상대의 육체를 꿰뚫고 그 생명을 끊어 낼 때만 느낄 수 있는, 뿌듯할 정도의 충족감.
희열이 들어차기 시작한 괴량의 눈이 청명의 가슴 중앙에 파고든 제 검을 바라보았다. 검날의 절반 이상이 가슴에 박혀 있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검에 뚫린 상처는 생각처럼 쉽사리 출혈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냥감에게 아직 기운이 남아 근육을 조여 대고 있으면 얼마 되지 않는 피가 방울져 흘러내릴 뿐이다.
하지만 지금 청명의 상처에서는 가슴팍을 모두 적실 만큼의 피가 빠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는, 박혀 든 검을 힘주어 조일 만큼의 여력도 청명에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검을 막으려다 같이 꿰뚫린 청명의 손이 천천히 오므려져 검신을 건드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괴량의 검엔 어떠한 타격도 없었다.
그 대신 괴량이 잡은 검에 묵직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상대가 제 육체조차 지탱하지 못하고 제 목숨을 끊어 내는 검에 몸을 내맡기고 말 때 실리는 무게.
괴량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죽음의 무게였다.
‘⋯⋯잡았다.’
해내고도 믿기지 않는 결과다. 하지만 그 결과가 지금 분명 그의 손안에 있다. 화산검협 청명. 세상에 퍼진 명성조차도 초라하게 만드는 엄청난 괴물을 마침내 잡은 것이다.
이건 쾌거라는 말로도 다 표현 안 될 쾌거다.
어려운 사냥감을 온갖 고난 끝에 마침내 잡았을 때,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런 전율과는 전혀 달랐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더없는 황홀함과 어찌할 수 없는 비애가 동시에 그를 지배했다.
괴량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고 싶어서였다.
지독하게 괴량을 괴롭히고,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신위(神威)를 증명한 괴물이 과연 어떤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할까?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을까? 아니면 담담할까? 그것도 아니면⋯⋯ 허무한 웃음을 짓고 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청명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본 것은 모든 힘이 다한 듯 고개를 떨군 청명의 정수리뿐이었다.
그 순간, 괴량의 두 눈엔 미미한 허무감이 스쳤다.
아마 그조차도 믿었던 모양이다.
이자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조차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으리라고. 전신에 수십 개의 검이 꽂힌 채 무참히 죽는다 해도 끝까지 당당하게 하늘을 보며 죽을 것이라고 말이다.
옅은 허무함이 지나고, 현실감이 서서히 찾아왔다.
괴량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사람은⋯⋯ 사람이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대답할 기력 같은 게 남아 있을 리 없으니까. 사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이젠 확실하지 않다.
괴량이 검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사냥감에게 한마디를 건넨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세운 원칙을 어긴 것이나 다름없다.
원래 사냥을 망치는 것은 마지막에 이르러 찾아오는 방심이다. 완전하게 심장을 가르고, 목을 끊어 내는 순간까지는 결코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가 마침내 움켜잡은 검을 그어 청명의 심장을 갈라 버리려 하는 순간이었다.
“⋯⋯워⋯⋯.”
청명의 입가에서 미약한 소음이 새어 나왔다. 그건 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에 흘린 작은 단말마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괴량은 문득 검을 멈추었다. 스스로 설명하기에도 어려운 이유로 말이다.
“⋯⋯뭐라 했지?”
굳이 되물을 이유 따윈 없다. 그저 무시하고 베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청명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낡고 녹슨 수레바퀴가 삐걱거리고 한껏 덜컥대며 돌아가듯,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린 청명은 괴량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피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은 아무런 빛도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텅 비어 보였다.
“⋯⋯움직⋯⋯이지⋯⋯.”
열린 것인지 닫힌 것인지 모호한 입술 사이로 알아듣기 힘든 말이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않⋯⋯ 않거든⋯⋯.”
그 순간 괴량은 보았다.
피가 검게 말라붙은 청명의 입술, 그 끝이 섬뜩하게 올라가는 모습을 말이다. 그 미소를 본 순간, 괴량의 피는 빙굴에라도 들어온 듯 싸늘하게 식었다.
“⋯⋯다리가.”
괴량이 다급하게 전력을 다해 검을 내리그었다.
하지만 남은 모든 힘을 다했음에도 청명의 가슴에 박힌 그의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암석 사이에 끼이기라도 한 듯, 아무리 힘을 가해 내리눌러도 미동조차 없었다.
‘뭐?’
상처에서 보랏빛의 기운이 흘러나와 괴량의 검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청명은 검에 꿰뚫린 손을 괴량 쪽으로 밀었다.
그그극!
쇠붙이에 뼈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손이 검환(劍環)까지 쭉 나아갔다. 그대로 검환을 잡은 청명이 괴량을 불시에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전력으로 검을 누르느라 중심이 앞쪽으로 쏠려 있던 괴량은 그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윽고 괴량은 보았다. 아래로 축 늘어져 있던 청명의 검에 검기가 맺히는 광경을 말이다.
피처럼 붉고, 새벽처럼 날카로운 화산의 검기였다.
‘아, 안⋯⋯.’
파아아아아아아앙!
익숙하고도 낯선 파공음이 협곡을 울렸다.
괴량은 멍하니 청명의 가슴에 파고들어 있는 제 검을 바라보았다. 강제로 당겨졌던 제 검은 거의 끝까지 청명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너⋯⋯.”
괴량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마차 말을 잇지 못하고 벙긋거리던 입은 잠시 후에야 재차 열렸다. 복잡한 감정이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일부러⋯⋯.”
순간 넋을 놓은 괴량의 눈과 힘없이 풀려 가는 청명의 눈이 마주쳤다.
아까보다는 조금 선명해진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못⋯⋯ 가면⋯⋯.”
쇳소리 섞인 목소리를 내면서도 청명은 웃었다. 피에 젖은 이가 드러났다.
“⋯⋯네가 와⋯⋯야지. 안 그래?”
괴량의 눈이 뒤흔들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내 괴량의 입술에서 붉은 선지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괴량은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이 잠시 주저했던 이유를.
짐승은 미끼를 물기 전 본능적인 거리낌을 느낀다. 그게 화산검협의 목숨이라는, 절대 외면할 수 없는 미끼라 해도 말이다.
사냥을 당하는 쪽은 처음부터 청명이 아니라 바로 괴량이었던 것이다.
“너⋯⋯.”
입을 꾸역꾸역 피를 토한 괴량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마지막 의지로 잡아당긴 검이 청명의 몸에서 뽑혀 나온다.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무릎 꿇은 괴량의 얼굴을 뒤덮었다.
“너 정말⋯⋯.”
털썩.
내뱉던 말을 채 완성하지 못한 괴량의 몸은 함께 달려들었던 혈검단원들과 같이 땅에 널브러졌다.
동시에 청명의 몸 역시 앞으로 휘청했다.
“청명아!”
유이설이 황급히 앞으로 달려들어 쓰러지는 청명을 뒤에서 잡아채고 부축했다.
“사질! 청명아!”
“흐⋯⋯.”
단단히 붙든 유이설의 악력을 느끼며, 청명은 힘없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늦⋯⋯었잖아⋯⋯.”
“너⋯⋯.”
“하…여튼⋯⋯.”
간신히 이어져 있던 모든 신경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청명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궈졌다.
유이설의 손이 본능적으로 청명의 목으로 향했다. 손끝에 미약한 박동이 느껴졌다. 청명의 맥이 아직 뛰고 있는 걸 확인한 유이설은 급히 제 장포를 찢어 내어 청명의 상처를 동여맸다.
‘살아 있어.’
언제 목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중한 상처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다.
아직은 살아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로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의식을 잃은 청명의 얼굴을 한번 바라본 그녀는 청명을 업고, 찢어 내고 남은 장포를 벗어 그와 제 몸을 단단히 묶었다.
등으로 심장 박동이 희미하고 느리게 느껴졌다. 손이 떨릴 정도로 차게 식어 버린 체온 역시도.
겁이 났다. 이 심장이 서서히 멎게 될까 봐.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마지막 온기가 꺼져 버릴까 봐.
유이설이 고개를 들었다.
상황을 파악하며 다시 다가오는 만인방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표정이 더없이 비장했다. 아마 이들은 절대 순순히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화산검협 청명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지 모를 리 없을 테니까.
특히나 저 뒤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호가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청명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걸로 이 모든 일에 종지부를 찍으려 들 것이다.
유이설은 손을 뻗어 땅에 떨어져 있던 청명의 암향매화검을 움켜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손잡이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오히려 그 온기가 유이설을 침착하고 냉정하게 했다. 연신 흔들렸던 두 눈이 서늘해졌다.
슬슬 기세를 올리며 거리를 좁혀 오는 만인방도를 노려보던 유이설은 지체하지 않고 땅을 세게 박찼다.
‘지킨다.’
쾅!
그렇게 몸을 뒤로 훌쩍 빼내는 순간, 만인방도들은 터진 둑에서 쏟아지는 급류처럼 유이설을 덮쳐 왔다.
‘반드시!’
그녀는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는 만인방도의 목을 단숨에 쳐 날렸다. 그 검엔 결연한 의지가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