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2화. 그 이름만은 새겨 주지. (2)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괴량의 얼굴은 핼쑥하게 질렸다.
그는 분명 피에 익숙한 사람이다. 손에 처음 검을 잡던 날 이후로, 피를 본 날이 보지 않은 날보다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조차도 지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낯설게 느꼈다.
협곡 좌우로 솟아 있던 흰빛의 절벽은 일부러 칠하기라도 한 듯 벌겋게 물들었고, 한때 그 피의 주인이었던 건 다름 아닌 그가 공들여 키워 냈던 단원들이다.
참혹하게 남겨진 시신들을 보며, 괴량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백에 달하는 혈검단원 중 절반이 넘는 수가 이 협곡에서 고혼이 되어 사라졌다. 아니, 사실 살아남은 이들 중에서도 반수에 가까운 이들은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황이다. 그저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을 이르는 말은 단순하다.
괴멸(壞滅).
만인방의 단 중 하나인 혈검단이 이곳에서 무너진 것이다. 남은 인원이라고는 겨우 서른 남짓. 이제 단(團)이라 부르기에는 우스울 지경이다.
키워 낸 이들을 마음으로 아끼는 등의 따뜻한 감정은 없으나, 수하들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있자니 표현하기 힘든 마음이 들기는 했다.
협곡의 출구를 빠져나가 드넓은 땅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있는 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혈검단은 물론이고, 만인방의 일천군세를 홀로 막아 내고 있는 이.
화산검협의 모습이 말이다.
어쩌면⋯⋯ 지금의 이 광경은 훗날 전설이 되고, 더 나아가 신화가 되어 강호에 오래도록 회자될지 모른다.
후인 중 누군가가 화산검협을 논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꺼내 드는 일화가 될지도 모른다.
설사 저 화산검협이 이곳에서 뼈를 묻고 한 줌 고혼으로 화한다고 해도 그 영웅적인 위상은 조금도 빛바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살아 돌아가는 것 이상으로 위대한 위명을 쌓게 될지도 모른다.
때로 영웅이란 그 죽음으로 완성되는 법이니까.
괴량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적이지만, 어쨌든 분명 청명이 벌이고 있는 일과 행보는 위대하기 때문이다.
적진에 고립된 해남을 구하기 위해 이 먼 땅까지 단숨에 달려왔고, 심지어는 해남을 추격하는 일천 만인방의 군세를 홀로 막아선 이.
과장 하나 보태지 않은 담백한 사실만으로도 영웅적 행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지금 괴량은 강호에 대대로 전해질 전설이 탄생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지금 눈앞에 두고 있는 이의 모습에선 영웅다운 위상이나 신화의 주인공다운 패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높게 올려 묵었던 머리칼은 봉두난발이 되었고, 앳되던 얼굴은 제 피와 사패련의 피로 검붉게 얼룩져 있었다.
왼쪽 허벅지는 뼈가 드러나도록 쩍 갈라져 있고, 명치 바로 왼쪽에는 검이 뚫고 들어갔던 자국이 선명하다.
임시로 지혈했던 옆구리는 다시 쩍 벌어져 검붉은 피를 울컥울컥 쏟고 있고, 왼쪽 목부터 겨드랑이까지도 긴 자상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오른쪽 다리의 상처, 눈에는 보이지도 않게 등판을 가로지르는 검상, 그 외 자잘한 상처들은 헤아릴 수도 없다.
당장 숨이 넘어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몰골로 땅에 박아 넣은 제 검으로 겨우 몸 지탱하고 있는 놈의 어디에서 영웅적인 위상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저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에 신화를 장식할 위대한 풍모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저건 영웅 같은 게 아니다.
저건, 그저 인간이다.
발버둥 치고 발악하고 악을 쓰는 인간 그 자체였다.
일 검으로 산을 가르고, 그 포효만으로 하늘을 떨게 하는 영웅 따위는 이곳에 없다. 존재하는 건,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한 인간뿐.
또옥.
청명의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연신 방울방울 떨어졌다. 살짝 벌어진 입에선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한 숨이 새어 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이미 한계를 넘은 상황이다.
상처를 입을 대로 입어 저항조차 불가능한 짐승의 모습. 혈검단이 아닌 평범한 만인방의 무인이라 해도 지금 저자의 숨통을 끊어 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냥감의 숨통을 끊어 내는 데에 세상 그 무엇보다도 큰 즐거움을 느끼는 혈검단원들은 지금 차마 그 상처 입은 짐승에게 다가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하지만 괴량은 그들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탓할 수가 없다.
그 순간이었다.
뿌득.
청명이 검을 힘껏 꽉 움켜쥐는 순간, 마찰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땅에 박아 넣은 검을 잡아 누르며 청명이 굽힌 몸을 천천히 세웠다. 마치 낡은 수레가 삐걱대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괴량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보았다.
기어코 몸을 편 청명의 몸에선 피가 연신 흘러내렸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무어라 말을 하고 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애를 써도 목소리가 쉽사리 나오지 않는 듯했다. 청명은 결국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입술이 맞닿았다가 다시 떨어진 순간, 형편없이 말라붙었던 입술이 갈라지며 피가 배어났다.
“⋯⋯속⋯⋯.”
갈라져 있던 보랏빛 입술이 피로 붉게 젖어 들었다. 잠시 후, 벌어진 입술 새로 잔뜩 쉬고 갈라진 음성이 금방이라도 끊길 듯 아슬아슬하게 흘러나왔다.
“계속⋯⋯해야지?”
입꼬리가 가까스로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 웃음을 본 괴량은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게 그저 허세 어린 말뿐만은 아니었다는 듯 청명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극.
땅에 꽂혀 있던 검이 뽑혀 나왔다.
덜덜 떠는 손으로도 청명은 용케 검을 들어 올렸고, 짧게 한번 휘청이기는 했으나 끝내 두 손으로 검을 쥐었다.
괴량의 두 눈이 흔들렸다.
검수가 제 검의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이는 없다. 적어도 이곳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놈은 싸울 생각이다. 그리고 이제는 괴량도 안다. 저건 허세도 발악도 아니라는 것을.
검을 들 수 있다면 싸운다. 목숨이 끊기지 않았다면 저항한다.
누군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그 방식이, 저자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욱신.
괴량은 밀려드는 통증에 아랫배를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화산검협에게 찔려 흉물스러운 구멍이 뚫렸던 자리가 새삼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상처들도 마찬가지다. 괴량도 청명의 검에 숱하게 다쳤다.
하지만 괴량 역시 물러나는 대신 검을 더 굳건히 쥐며 앞으로 나섰다.
화산검협의 숨통을 끊는다.
이 일만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괴량이 취해야 할 권리이자, 그가 잃은 것에 대한 배상이니까.
“⋯⋯화산검협.”
괴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너는 정말 대단했다.”
일말의 비아냥도 섞이지 않았다. 오롯이 순수한 감탄이었다.
가는 길이 다르다고 해도,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고 해도 괴량 역시 검을 든 한 사람의 검수. 그러니 경외를 표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네게는 쓸데없는 것이 너무도 많다.”
만일 저 화산검협이 혼자였다면, 그래서 물러나고 싶을 때 물러나고 싸우고 싶을 때 싸울 수 있었다면?
그럼 혈검단은 과연 화산검협을 잡을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만일 화산검협이 혼자였다면, 혈검단은 오히려 철저히 그에게 사냥당했을 것이다.
절망적인 격차를 좁힐 길이 없어 절규하다 비참히 죽어 갔겠지.
이 말인즉, 지금 화산검협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건 그가 지키려 하던 것들이란 뜻이다. 모두 합쳐 봐야 화산검협의 가치에 미치지도 못할 하찮은 것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게 아쉬울 따름이로군. 어쩌면⋯⋯ 너 역시 련주처럼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거늘.”
청명은 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육체는 이미 한차례 타고 남은 재나 마찬가지니까.
그를 지탱해 주고 있는 건 아직 꺼지지 않은 정신뿐이다.
괴량은 발을 슬쩍 앞으로 내밀고 턱짓으로 신호를 내렸다. 그러자 혈검단원 두 사람이 긴장한 얼굴로 괴량의 뒤쪽으로 붙어 자세를 취했다.
물론 화산검협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단 것은 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방심하기엔 지금까지 본 게 너무도 많았다.
우우우우웅.
괴량은 검에 남은 내력을 모조리 밀어 넣었다.
“적어도 고통 없이 죽여 주지.”
파아아아아아앗!
그 순간 청명의 뒤쪽에서 높은 파공음이 들려왔다. 괴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전방을 살폈다.
협곡을 빠져나갔던 화산의 여검수 하나가 필사적으로 협곡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얼굴에 어린 간절함이 이 거리에서도 확연하게 보이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괴량은 그 간절함에 응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작은 변수 하나조차 섣불리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쳐라!”
콰앙!
괴량과 혈검단원들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청명을 향해 쇄도했다. 유이설이 남은 모든 내력을 짜내 땅을 박찼지만, 적들이 청명에게 닿는 게 훨씬 더 빨랐다.
“아, 안⋯⋯.”
그녀의 눈에 절망이 차올랐다. 그 뒤로 이어진 건, 희망.
아니, 어쩌면 막연한 기대. 청명이 이대로 당할 리 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었다.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으려는 듯 청명의 검이 휘둘러졌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강렬하지도, 폭발적이지도 않았다. 화산검협 청명의 검격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맥없는 검이 허공을 힘없이 가르며 날아드는 괴량의 검과 맞부딪혔다.
카앙!
짧고 높은 금속음과 함께, 암향매화검이 괴량의 검에 밀려 튕겨 나갔다.
이윽고 괴량의 검이 정확히 청명의 심장을 향해 내질러졌다.
‘아⋯⋯.’
마치 뿌연 물속을 부유하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먹먹해졌다.
유이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청명에게도, 청명에게 날아드는 세검에도 닿지 못했다. 그저 허공만을 할퀴고 움켜쥐었을 뿐.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세상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평소와 다르게 굽어진 청명의 등과 그에게로 달려들고 있는 괴량의 모습뿐이었다.
청명의 왼쪽 어깨가 그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늘어져 있던 왼손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유이설은 알 수 있었다. 그 손에 짜내고 짜낸 죽엽수의 공력이 담겨 있음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조차 청명은 포기하지 않았음을.
푸우우욱!
하지만 그때 무언가 뜨거운 것이 유이설의 얼굴에 튀었다.
시야가 일순 붉어졌다. 그 속에서 그녀는 보고 말았다. 평소와 달리 힘없이 굽은 청명의 등에 무언가 있어선 안 될 것이 보였다.
그건, 괴량이 찔러 낸 세검이었다.
청명의 등 뒤로 세검의 끄트머리가 삐죽이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코끝으로 피비린내가 파고들고, 피부로 끈적한 것이 흘러내리는 감각과 뜨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그 모든 것이 더해지고야 유이설은 현실을 완전히 깨달았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청명아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