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1화. 그 이름만은 새겨 주지. (1)
“오, 옵니다!”
“이, 이런, 빌어먹을! 쏴라! 쏴서 죽여 버리라고!”
화포의 방향을 잡고 있던 포수가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물론 외치면서도 그는 자신이 하는 소리가 말도 안 된단 걸 알았다. 애초에 포는 대인 병기가 아니다. 밀집해 있는 이들에게 날린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병기지만, 한 사람을 정확하게 맞힐 수는 없는 게 화포다.
더구나 쇄도해 오는 게 평범한 이가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던 이들을 모조리 썰어 버린 악귀 같은 화산의 고수라면 더더욱 화포 따위가 통할 리 없다.
“쏘란 말이다, 어서!”
콰아아아아아아앙!
이를 악물고 돌진하는 조걸을 향해 화포가 불을 뿜는다. 시커먼 포탄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졌다.
하지만 조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포탄은 이내 그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며 뒤쪽에 있던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쿠우우우우웅!
사람 몸통보다 더 굵은 나무가 단번에 쩌저적 부러져 나갔다. 화포에 실린 위력을 확실히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대한 공격이라 해도 닿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다, 다시! 빨리!”
다시 벼락같이 화포를 재장전하는 손길들이 바빴다.
하지만 그게 무색하게, 심지에 다시 불이 붙은 순간에 조걸은 이미 그들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
콰앙!
진각을 밟은 조걸이 강하게 검을 떨쳤다.
“개자식들아아아아아!”
파아아아아아앙!
공기를 찢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허공에 붉은 선이 선명히 그어졌다. 화포에 붙어 있던 이들의 몸이 단숨에 반으로 갈라지며 허물어졌다.
“사, 살려⋯⋯.”
푸욱!
검격이 채 닿지 않았던 이의 심장에도 주저 없이 검을 박아 넣은 조걸은 그 검 끝에 심장 박동이 채 전해지기도 전에 세차게 뽑아냈다.
촤아아아악!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화포에 튀었다.
“후욱! 후욱! 후욱!”
조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야에 살아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남은 건 그저 피투성이로 식어 가는 시신들뿐.
으득.
입술을 질끈 깨물며, 여전히 심지가 타들어 가고 있는 화포를 내리밟았다. 포구가 하늘을 향해 번쩍 들렸다.
콰아아아아아앙!
곧 하늘 위로 포탄이 드높게 치솟아 올랐다.
콰아아아아아앙!
위쪽으로 솟구친 포탄을 본 백천은 즉각 상황을 알아채고 크게 소리쳤다.
“모두 갑시다! 당장!”
상황이 처참했다. 장로들은 절반 이상이 중독과 부상으로 쓰러졌고, 해남의 제자들도 숱하게 상처를 입었다.
제대로 달리기도 힘든 부상자들과 체력을 완전히 소모해 버린 이들만이 겨우겨우 가까스로 검을 부여잡고 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상황 속에서도 모두가 백천의 말에 반응했다. 해남도 해안에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들었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이제 해남의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이쪽으로!”
백천이 외치며 앞장서서 달렸다.
지친 이들에겐 말을 이해하는 것보다 행동을 단순히 인식하고 따라하는 게 훨씬 편하다.
“장문대리를 따라가십시오!”
“움직이라지 않습니까! 여기서 죽고 싶습니까?”
남궁도위와 혜연이 매섭게 닦달하자, 금양백이 우렁우렁하게 소리쳤다.
“뭐 하느냐! 당장 장문대리를 따라라! 장로들은 부상 입은 제자들을 둘러업어라! 어서!”
해남의 장로들 역시 서 있는 것이 신기한 상황이지만, 자신들의 본분을 잊진 않았다. 거동이 힘든 부상자들을 어떻게든 둘러업은 장로들은 금양백을 필두로 하여 백천의 뒤에 따라붙었다.
거동 가능한 해남의 제자들 역시 반사적으로 그 뒤를 따라 전력으로 땅을 박찼다.
“빌어먹을! 뭐 하는 거야!”
한편 임소병은 분통을 터트리며 당소소를 뒤에서 잡아끌었다. 그녀는 다 죽어 가는 해남 제자 하나에 매달려 있었다.
“놔요! 이것만 마저 감으면!”
“이미 죽었어! 이미!!”
“아직⋯⋯ 아직 안 죽었어요!”
“정신 차려! 네가 죽으면 다른 놈들도 다 죽어!”
그 말에 당소소의 눈이 뒤흔들렸다. 그 눈만 보아도 얼마나 감정적으로 한계까지 몰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임소병은 그녀의 심정 따위는 신경도 써 주지 않고 강제로 붙들어 땅을 박찼다.
그렇게 모두가 달려 나가는 와중에도 발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로 곽환소가 달려왔다.
“뭐 하는 거야! 당장 따라가!”
“대, 대사형!”
어찌할 바를 모르던 이들이 두 눈에 절망을 가득 실은 채 곽환소를 보았다.
“사, 사형들의 상처가⋯⋯.”
곽환소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한 사제가 심장께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채 앓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한 곽환소는 순간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른 부상자들은 어떻게든 옮길 수 있다. 죽어도 같이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아니다. 업고 갈 수도 없다. 상처가 너무 위중해 함부로 움직이는 순간 곧바로 상처가 벌어질 테고, 그럼 오히려 명을 재촉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당소소가 어떻게든 응급처치를 해 목숨을 붙여 놓았지만, 강행군을 이어 갈 체력이 더는 남지 않은 이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곽환소는 이를 악물었다. 턱의 힘줄이 불거졌다.
“가라!”
“예?”
“알았으니 가라고!”
“가, 가라니요? 사형!”
곽환소가 하는 말의 의미를 눈치챈 이가 다급히 외쳤다.
“아직 살아 있다고요, 아직!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사형들을 이대로 여기에 내버려 두란 말입니까? 그건⋯⋯!”
“닥치고 가라지 않느냐!”
“대사형!”
사제가 절규하듯 외치자 곽환소가 그 멱살을 움켜잡고 콱 끌어당겼다. 핏발이 선 그의 눈이 눈물로 젖은 사제의 두 눈을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럼? 여기서 같이 죽을 테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잡고 있던 사제를 내팽개치듯 떠밀었다.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여유조차 없다.
후방에서 막고 있는 청명이 밀려서 협곡이 다시 뚫린다면 만인방의 무리들이 저기서부터 급류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토록 지친 이들로는 저항조차 해 볼 수 없을 터. 제대로 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모조리 죽을 것이다.
지옥 같은 곳을 이제 가까스로 벗어났는데 그런 개죽음을 당할 순 없다!
“가라, 당장! 내 손에 죽기 싫으면!”
곽환소의 기세에 질렸는지, 아니면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단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엎어진 제자는 이내 비통한 절규를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마지막까지 주저하며 발을 떼지 못하던 이들 역시 결국 그를 따라 달렸다.
눈물을 꾹 누르는 듯 고개를 젖히고 있던 곽환소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곽환소는 무서웠다.
부상을 입었지만 의식을 잃진 않았으니 그가 했던 말을 모두 들었을 것이다. 원독에 차 있을 그들의 시선이, 날카로운 비수 같은 말이 너무도 무서웠다.
하지만 곽환소가 보게 된 것은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사⋯형⋯⋯.”
파리한 안색으로 쓰러져 있던 몇몇 제자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곽환소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순간, 무겁던 어깨가 끝내 처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부⋯⋯탁⋯⋯.”
“어으⋯⋯.”
귀를 틀어막고 싶다. 차라리 칼을 물고 엎어지고 싶었다. 어디로든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사⋯⋯형⋯⋯.”
“으아아아아아아아!”
곽환소는 괴성을 내지르며 벼락처럼 검을 휘둘렀다. 짓깨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났다.
해남을 상징하는 파도 문양이 또렷하게 새겨진 그의 애검은 이내 사형제들의 목을 단번에 가르고 지나갔다.
푸우우웃!
베인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두 눈의 빛이 흐려져 가는 해남 제자들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고⋯⋯맙⋯⋯.”
“사, 살아남아⋯⋯.”
곽환소는 그 말을 마저 듣지 않고 내달렸다. 아니, 차마 듣지 못하고 달아났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멀리, 더 멀리.
눈물도 더는 나지 않는다.
이럴 수밖에 없었단 걸 안다. 저들은 이제 싸울 수 없고, 그렇다고 쉽사리 죽어 버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고 가면 분노한 만인방의 손에 붙잡혀 온갖 치욕이란 치욕은 다 당하다 고통스레 죽어 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의 손으로 그 목숨을 직접 끊어 주는 게 낫다.
그러니 이건 저들을 돕는 길이었다. 곽환소도 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안다고 해서 가슴 저미는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안다고 해서 평생을 같이해 온 사형제들의 목을 베었단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살아남는다.’
명예로운 죽음 같은 건 이제 머릿속에 털끝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반드시 이 복수를 해야 한다. 이곳에서 죽어 간 이들의 수만큼⋯⋯. 아니, 백 배, 천 배의 피를 흘려 저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는다!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 땅을 박차는 그의 두 눈에선 지독한 독기가 피어올랐다.
“사숙!”
“앞은!”
“궁수들의 위치를 모두 파악하진 못했습니다! 앞에 매복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윤종은 고함치듯 답하며 백천의 옆으로 빠르게 합류했다.
잠시 후 저 앞쪽에서 조걸도 전력으로 달려왔다.
“화포는 모두 처리했습니다!”
“선두에 서라! 매복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
“사고! 사고가 후방으로 향했습니다! 부상을 입었는데!”
백천이 저도 모르게 조걸이 말한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숲길로 들어와 있고, 저 멀리 수풀 사이로 천신이 검으로 갈라 낸 듯한 깊은 협곡이 보인다.
설명을 더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청명이 놈도 한계일 겁니다! 부상을 입은 사고 혼자서는 안 됩니다! 도와야 해요!”
순간 백천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가야 한다.
조걸의 말만 들어도 상황은 극명하다. 그리고 지금 뒤쪽으로 갈 여력이 있는 이는 백천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몸을 빼냈다가 남겨진 이들이 전방의 매복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럼 이들만으로 돌파 가능한가?
“⋯⋯조걸.”
“예, 사숙!”
“앞을 맡아라. 이대로 저들을 따돌린다.”
“그럼 사숙이 가십니까?”
“⋯⋯.”
“사숙?”
백천은 말이 없었다. 순간 조걸의 눈이 뒤흔들렸다.
“사숙! 사, 사고의 부상이 심하다니까요! 평소의 사고가 아니라고요!”
“앞을 맡으라니까!”
백천이 벌컥 격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조걸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조걸은 핏발 선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주먹을 날릴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두고 간다고요?”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할 놈들이 아니다! 반드시 올 거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이들을 다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달아난다고 했잖습니까!”
백천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닫았다. 그의 단정한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말했잖습니까! 분명 저한테 그렇게 말했잖습니까, 사숙!”
“⋯⋯.”
“청명이가 죽는다고요! 사고가 죽는다고! 무슨 상황인지 모르시겠습니까!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했냐고!”
“그 입 닥쳐!”
그 고함은 백천이 아닌 윤종에게서 터져 나왔다. 윤종은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조걸을 노려보았다.
“사형. 하지만⋯⋯.”
“닥치라지 않느냐!”
윤종이 재차 외치자 검을 쥔 조걸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조걸의 시선은 필사적으로 따라오고 있는 해남파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눈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이것들이 뭐라고⋯⋯.”
“조걸!”
“빌어먹을 해남이 뭐라고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너희 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이 개자식들아!”
“이 망할 놈이!”
윤종이 멱살을 틀어쥐어 오려는 순간, 조걸은 참지 않고 그 손을 후려쳐 버렸다. 그리고 당황한 윤종을 남겨둔 채 협곡 방향으로 달려갔다.
“걸아! 조걸, 이 자식아!”
“놔둬라.”
백천의 말에 윤종이 돌아보았다. 백천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두 눈으로 무시무시한 광망을 흘리고 있었다.
“⋯⋯네가 선두에서 길을 열어라. 살아서 강북에 도착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예, 사숙.”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어쩌면 파국의 징조는 아닐까.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소매 안으로 감춘 백천의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