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330화 (1,331/1,567)

1330화. 벗어난 건 아무것도 없다. (5)

쾅!

발을 내디딜 때마다 폭음이 터져 나온다.

언제나 한 마리의 제비처럼 조용하고 날렵하던 유이설이 아니다. 지금 그녀에게선 숨기지 못한 다급함이 묻어났다.

‘더 빨리!’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역시 초조함이 커질수록 일그러졌다.

파아아아앗!

주위를 스쳐 가는 풍경이 일그러져 보이도록 가속하며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사파인의 목을 단숨에 쳐 날리며 달렸다.

지금 그녀가 날린 검격에는 청명의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더 빨리!’

연신 땅을 박찼다.

그녀의 검에 달린 건 그녀 혼자만의 목숨이 아니다. 그녀의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 비 속에 고전하는 해남파 문도들의 목숨뿐만이 아니다.

그녀를 보내고 홀로 버티고 섰던 청명의 외로운 뒷모습이 계속 어른거렸다. 만약 제때 이곳을 수습하고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 뒷모습은 어쩌면 그녀가 본 청명의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느려!’

조급증이 인 유이설이 다시 한번 세게 땅을 박찼다.

콰앙!

본디 부드러움과 고요함은 화산의 누구도 가지지 못한, 유이설만의 강점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선천적으로 힘을 타고난 이들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선택했던 길이었다.

물리적 힘에 좌우되지 않으며, 타고나지 않아도 뼈를 깎는 노력만 따르면 쌓아 올릴 수 있는 검.

그것이 검귀 유이설의 검이었다.

패애애애애앵!

내력을 실은 강전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왔다. 그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몸을 한껏 낮추었다. 거의 땅 위로 비행한다고 표현해야 할 신기였다.

맹렬히 날아든 화살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파아아아앙! 파아아아앙!

연이어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유이설의 신법은 감히 화살이 몸에 닿도록 허락하는 일이 없었다.

유이설은 활시위를 먹이는 궁수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서걱!

유려한 곡선을 그린 검은 궁수가 엉겁결에 치켜든 활을 단숨에 잘라 내며 경동맥을 함께 갈랐다. 누구라도 탄성을 내뱉고 말 환상적인 일검이었다.

그러나 유이설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고 있었다.

‘느려!’

이게 아니다. 더 빨라야 한다. 더 효율적이어야 한다.

알 것 같다.

어째서 청명의 검이 그렇게나 자주 다급했는지. 어째서 그의 검에서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는지 말이다.

‘더 빨리!’

그녀는 입 안 살을 꾹 깨물며 화살이 쏘아진 또 다른 곳을 향해 달렸다.

물론 알고 있다. 저기에는 그녀가 찾는 이들은 없다. 강전을 쏘아 대는 이들은 여전히 제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은신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런 이들을 일일이 찾을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녀가 저들을 찾는 대신에, 저들이 그녀를 찾게 만드는 것.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서 최대한 요란하게 검을 휘둘러 많은 적을 격살하면 참지 못한 놈들이 그녀를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럼 위험에 노출되는 대가로 적을 찾아낼 수 있고, 본대에 쏘아지는 공격도 유인해 낼 수 있⋯⋯.

으득!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유이설은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왜 무리해? 그렇게까지?

언젠가 그녀가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이다. 청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생각도 하질 않아서 무심하게 뱉었던 말은 이제야 그녀의 가슴에 박혔다.

사형제들이 미덥지 않은 게 아니다. 실력을 의심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무리해야 한다.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무리해야만 한다.

그래야 적들이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을 노릴 테니까.

가장 앞에서 가장 화려하게 싸워 대는 것이 최선이었을 뿐이다. 적진의 한중간에 뛰어들어 이목을 끌고 검을 휘두를수록 다른 이들은 그만큼 안전해지므로.

저 앞으로 포진한 적들이 보였다.

앞뒤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달려드는 그녀의 모습에, 궁수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쏴! 쏴라!”

궁수들이 높게 치켜들었던 활을 급격히 틀며 유이설을 겨누었다. 활 하나당 몇 개씩 먹여져 있던 화살이 그녀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유이설은 속도를 줄이는 대신 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탄성 높은 매화검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가 단번에 튕겼다. 유이설은 그 힘으로 허공에 뛰어올랐다.

찌이익!

속도가 잔뜩 붙었던 화살이 그녀의 바짓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맹금처럼 솟구친 유이설은 허공을 다시 한번 박차며 적들의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매화검이 평소 그녀가 그려 내던 궤적보다 훨씬 더 거친 원을 세차게 그렸다.

콰가가가각!

강철로 만든 활이 몸뚱이와 함께 잘려 나간다. 동강 나 버린 활과 몸뚱이가 튕겨 나감과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로 피가 흩뿌려졌다.

쾅!

땅에 발이 닿기 무섭게 치고 나간 그녀는 당황해 주춤하는 궁수의 목을 빠르게 찔렀다. 콰득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목이 꿰뚫렸다. 뒷덜미로 삐죽이 튀어나온 검신이 붉었다.

“주, 죽여!”

“어차피 혼자다! 죽여 버려!”

궁수는 거리가 좁혀진 순간부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는 세간에 상식처럼 통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말이라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활줄을 풀어낸 궁은 그 자체로 단봉(短棒)과 다를 바 없는 위력적인 무기이고,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활을 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그 거리가 줄어든 만큼 화살은 더욱 위력적으로 돌변하기 마련이다.

궁수들은 일제히 달려들며 줄을 풀어낸 철궁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들의 뒤쪽에 있는 이들은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채, 언제고 틈이 생기면 활을 쏠 준비를 마쳤다.

카아아앙!

유이설은 머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철궁을 단번에 쳐 냈다. 하지만 재차 검을 떨치기도 전에 위로 솟아오른 또 다른 궁수가 근접거리에서 내력 실은 화살을 단박에 쏘아 냈다.

유이설이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뒤로 젖혔다. 어깨 바로 위로 화살이 맹렬하게 스쳤다. 휘날린 머리카락이 몇 가닥 끊겼고, 화살은 곧 뒤쪽에서 달려들던 사패련도의 배에 사정없이 박혔다.

“끄아아아악!”

날린 화살이 아군을 상하게 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뒤따르듯 쇄도하며 위로 몸을 띄운 궁수들이 유이설을 향해 연이어 속사를 갈겼다.

근거리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화살 앞에, 유이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몸을 굴려 피하는 것밖에 없었다.

파파파파팟!

그녀가 몸을 굴려 벗어난 자리는 순식간에 화살로 빽빽해졌다. 조금만 늦었다면 지금쯤 어떤 몰골이 되었을지 자명했다.

‘달라.’

유이설은 벼락처럼 몸을 일으켜 눈에 보이는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생각보다도 몸이 앞섰다.

“어, 어엇!”

서걱!

당황한 적의 배에 검을 박은 유이설이 고통으로 입을 쩍 벌린 이의 멱살을 잡아 세게 당기며 돌렸다. 순간 그는 빙글 돌며 금세 유이설과 위치가 바뀌었다.

“아, 안⋯⋯.”

강제로 위치가 뒤바뀌자 그는 다가올 제 운명을 직감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콰득! 콰드드득!

고개가 채 다 돌아가기도 전에 등판에 화살이 빽빽이 날아와 꽂혔다. 적의 몸뚱이를 방패 삼아 화살을 막은 유이설은 곧바로 검을 뽑고 휘둘러 다른 적들을 베었다.

늑대 무리 안에 뛰어든 순간부터는 그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아무리 범이라 해도 그 한가운데서 완전히 무사하게 나올 수는 없으니 말이다.

유이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다급하다는 이유로 불가능한 일을 저지르면 그건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늑대 무리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이유는 단 하나.

“아아아아아아악!”

유이설의 포위한 무리 중 몇이 비명을 내질렀다. 등 뒤에서 날아든 검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벤 이가 누구인지 확인조차 못 하고 절명해 버렸다.

“사고!”

윤종이었다. 그는 외곽에서부터 적의 진영을 침착하게, 하지만 신속하게 무너뜨렸다.

포위망 밖에서 처절한 비명이 연신 들려오자 궁수들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활은 창이나 도와 다르게 오직 한곳만을 겨눌 수 있다. 앞뒤를 포위한 적을 상대로 쏠 수 있는 활 같은 건 없다.

궁수가 가장 약해질 때는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가 아니라 시위가 향하는 방향이 뒤섞일 때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안과 밖에서 화산의 두 사람이 동시에 검기를 흩뿌렸다.

화려하게 피어오른 매화검기가 유이설을 포위하느라 모여들었던 이들을 휩쓸었다.

“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악!”

전신에 바람구멍이 숭숭 뚫린 적들은 낡은 헝겊 인형처럼 힘없이 픽픽 고꾸라졌다.

기세는 이제 유이설에게로 넘어왔다. 그녀는 이를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적을 격살해 나가려 했다.

휘이이이이잉!

하지만 그때, 휘파람 같은 소리가 높게 울렸다. 유이설과 윤종을 향해 가공할 속도의 강전이 날아들었다. 이곳에 있는 궁수들이 쏘던 화살과는 딱 보아도 격이 달랐다.

마침내 쫓아야 할 이들의 종적을 찾아내자 유이설의 눈이 살기로 파랗게 빛났다.

그런데 그녀가 땅을 박차기도 전에 그 방향으로 달리는 이가 있었다.

“걸?”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을 차게 굳힌 조걸이 비호처럼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명백히 조걸의 것이 아닌 단말마가 들려왔다.

한 번. 또 한 번.

도합 세 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전이 쏘아진 순간 그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억한 조걸이 그들을 색출하여 모조리 고혼으로 만든 것이다.

평소에 모두가 알고 지내던 조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침착한 판단력이었다.

지원해 주던 고수들마저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궁수들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자연히 공세가 느슨해진 순간, 유이설이 휘청이며 배를 움켜잡았다.

“사, 사고!”

놀란 윤종이 급히 그녀를 붙들었다.

배를 움켜쥔 그녀의 손 틈으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적을 방패 삼아 화살을 막았을 때, 그 몸뚱이를 꿰뚫었던 화살이 유이설의 배에 상처를 남긴 것이다.

“이 개새끼들아!”

윤종의 입에서 격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는 검을 거칠게 휘둘러 궁수들을 양단해 버렸다.

“아아아아악!”

이미 무너진 기세는 돌이킬 방법이 없다. 명령이고 뭐고 사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궁수들은 동료들을 내버린 채 뒤도 보지 않고 달아났다.

“사고! 괜찮으십니까?”

윤종은 그 뒤를 쫓지 않고 유이설을 부축했다. 저런 놈들을 마저 베는 것보다 유이설을 살피는 게 몇 배는 더 중했다.

“윤종.”

“사고, 사, 상처가! 당장 치료를⋯⋯.”

“아직 화포가 있다.”

“예?”

“믿어!”

유이설이 윤종을 밀어 냄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사고! 안 됩니다! 사고! 사고!”

윤종이 애타게 불렀지만 유이설은 그저 전력으로 후방을 향해 달렸다. 윤종과 조걸에게 앞을 맡긴 채로.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청명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며.

초조함에 목이 바짝 타들었다.

밟고 지나는 곳마다 그녀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