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9화. 벗어난 건 아무것도 없다. (4)
푸우욱!
“아아아아아악!”
화살이 가슴에 박혀 들었다. 해남의 제자가 고통을 못 이기고 비명을 질렀다.
그냥 떨어지는 화살이야 당연히 쳐 낼 수 있다. 그들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수련을 허투루 해 온 건 아니니까.
하지만 장로들이 펼친 검막과 충돌해 부러지며 튕겨 나온 화살촉이 사방으로 박히는 데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끄, 끄으으⋯⋯.”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주저앉으며 가슴께를 움켜잡았다.
“놔요!”
그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부리나케 달려온 당소소가 그의 손을 잡아채듯이 떼어 내고는 상처를 살폈다.
“소, 소저⋯⋯. 뒤⋯⋯.”
또다시 날아든 부러진 화살 파편이 쓰러진 이 앞에 앉은 당소소의 등에 박혔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쓰러진 이의 상처를 헤집었다.
“버텨요!”
당소소가 이를 악물며 부상자의 상처에 대침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한 치의 주저도 없이 푹 찔러 넣었다.
콰득!
그와 동시에 박혔던 화살촉이 등판을 뚫고 나왔다.
“으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당소소는 발버둥 치는 이를 꽉 누르며 벌어진 상처에 해독약과 지혈제를 쑤셔 박았다. 그녀의 손이 금세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과격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두면 화살촉이 점점 더 파고들고 몸을 돌다 심장까지 도달할지도 모르니까.
시간을 두고 상처를 갈라 화살촉을 빼내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이편이 안전하다.
번개 같은 손길로 상처를 동여맨 당소소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를 내버려 두고 다시 옆으로 몸을 날렸다. 목에 틀어박힌 화살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가 도달하기도 전에 그가 제 목에 박힌 화살을 뽑아 버렸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아, 안 돼!”
비명을 내지른 당소소는 다급하게 상처를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끄, 끄륵⋯⋯.”
입으로 피거품이 역류하며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버텨! 조금만 더 버티라고! 내가 살려 줄 테니까 버티라고요!”
하지만 그 외침이 무색하게, 사내의 눈에선 빠르게 생기가 빠져나갔다. 생의 빛이 꺼져 갔다.
당소소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손에 닿는 피는 아직도 이렇게나 뜨거운데, 이미 산 사람이 아니라니.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또 하나 쓰러지는 이를 향해 달려갔다.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지만, 틈만 나면 자꾸 눈물이 흘렀다. 앞도 잘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눈물을 닦을 새도, 슬퍼할 새도 없다.
무력했다. 비참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도, 죽어 가는 이들을 구할 수가 없다. 살려 달라는 간절함을 담아 필사적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서 빛이 꺼져 가는 걸 막을 방법이 없다.
의원이 이토록 고통스럽다는 걸 진즉에 알았다면 의술에는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망을 외면하고 꿋꿋하게 움직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모두를 통틀어 의원은 그녀 하나뿐이니까.
파아아아앙!
그 순간, 막대한 내력을 실은 강전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를 눈치챈 당소소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대처하기도 전에, 벼락처럼 날아온 누군가가 단번에 강전을 후려쳐 날렸다.
“사숙!”
백천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강전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저쪽으로 달려가 저 빌어먹을 놈들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 그가 이곳을 떠날 방법이 없었다.
‘윤종, 조걸! 빨리⋯⋯!’
그저 달려간 이들을 믿고 버티는 수밖에.
“또 옵니다!”
백천의 시선이 격하게 하늘로 향했다. 조금 전 포격을 막아 낸 해남 장로들이 아직 자세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건만 다시 화살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안 돼!’
백천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도와주는 이가 없다고 해도 어떻게든 해 봐야 한다. 아니면 또다시 눈 뜬 채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꼴을 봐야 하니까.
단전에 남은 내력을 모조리 쥐어짜 냈다. 하지만, 검에 밀어 넣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더 높이 솟구쳤다.
“사매!”
그 익숙한 뒷모습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비조처럼 날아오른 유이설이 쏟아지는 화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사아아아악!
벼려진 날붙이로 비단을 긁어 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유이설의 검이 허공에 마치 보름의 달과도 같은 커다란 원을 그려 내었다.
절정에 달한 월녀검(月女劍).
그 궤적이 만들어 낸 검기는 폭우 속에서 펼쳐진 커다란 우산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 냈다.
“사매, 조심해! 포격이 온다!”
백천이 다급히 외쳤다. 그 순간, 그의 옆으로 무언가가 가공할 속도로 스쳐 갔다.
‘비도?’
공기를 헤집듯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날아가는 건 비도였다.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간 비도는 앞쪽에 펼쳐진 숲속으로 단번에 쏘아졌다.
“아아아아아악!”
멀어서 희미하긴 했지만, 비명이 확실히 들려왔다.
저 비도가 분명 무언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제가 쏘았던 비도보다 조금 늦게 달려온 당패는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몸을 굴리며 외쳤다.
“포는 제가 견제할 수 있습니다! 화살만 막아 주십시오, 장문대리!”
“예!”
땅에 사뿐히 내려선 백천은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겨우 두 사람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순식간에 숨통이 트였다. 강호에서 단 한 사람의 고수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확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빌어먹을! 자꾸 앞으로 나가지 말고 절벽 면에 들러붙으라고!”
임소병이 악을 쓰며 지시를 내렸다.
“화산 분들과 소가주는 쓸데없이 화살에 힘 빼지 말고 포탄만 처리하십시오! 장로들은 화살 막으면서 뒷사람 가슴이 등에 닿도록 달라붙으라고! 그럼 머리 위만 막으면 되잖아, 이 머저리들아!”
혼전 중에서 떨어지는 지시란 그 존재만으로도 이정표가 된다. 지금 지시를 내리는 게 사파의 수괴건 말건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살길을 찾기 위해 모두가 본능적으로 그 지시대로 몸을 붙였다.
파아아아앗!
유이설은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속도로 치고 나갔다.
“사매!”
백천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유이설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파아아아아아앙!
유이설의 행동을 위협으로 느꼈는지, 가공할 속도의 강전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유이설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검을 날려 쏘아진 강전을 후려쳤다.
타앙!
쇠와 쇠가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향이 뒤틀린 강전은 유이설의 어깨를 길게 베고 지나갔다.
하지만 유이설은 상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아니, 상처가 난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내달렸다. 너무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백천은 저도 모르게 발을 내디뎠다가 이내 다시 멈추었다. 그리고 입 안 살을 꾹 깨물었다.
땅에 시체가 쌓여 가고 있다. 해남의 제자들과 장로들의 시신은 화살이 박혀 흡사 고슴도치 같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이곳에서 모두를 지키는 것이다. 저 꼴이 되는 이를 한 사람이라도 더 줄이는 것.
내력이 거의 다해 검을 잡은 손이 점점 떨려 왔지만, 약한 소리를 늘어놓을 여유 따윈 없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다시 귓가를 찔러 오는 포격 소리에 백천이 발악하듯 날아드는 포탄을 향해 쏘아졌다.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하지만 조걸은 조금의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저 앞에 화살을 비처럼 쏘는 궁수 놈들이 있다. 그곳으로 달려가 한바탕 살풀이를 벌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조걸은 허벅지에 칼을 쑤셔 박는 심정으로 그 충동을 억눌렀다.
‘어디냐!’
분명 이 근처에 있다. 저 지독한 강전을 쏘아 대는 궁수 중 하나가! 그놈을 처리하지 못하면 본대가 움직이질 못한다.
‘어디냐고!’
조걸은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바짝 날이 선 기감이 쾌속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찾았다!”
허리를 굽힌 조걸이 쏜살같이 쇄도했다.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었음을 알아챈 궁수는 조걸을 향해 연이어 활을 쏘았다. 무시무시한 속사. 수십 개의 강전이 동시에 조걸에게로 쏟아진다.
하지만 빠르기로는 조걸이 절대 뒤질 리 없다. 그의 검이 빛을 쪼갤 듯한 속도로 움직이며 날아드는 화살을 모조리 쳐 냈다.
“이 개자식아아아아아아!”
쏟아지는 공격에도 조걸의 속도가 조금도 줄지 않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궁수의 두 눈에도 당혹감이 어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속사에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그는 우수에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려 화살에 밀어 넣었다.
우우우우우웅!
검에 내력을 넣으면 공명한다. 그가 쥔 화살 역시 살아 있는 잉어 펄떡이기 시작했다. 시위를 먹인 그는 이내 강철을 꼬아 만든 활줄을 끊어지기 직전까지 힘껏 당겼다.
끼기기긱!
한계까지 당겨진 활로 조걸을 겨냥했다.
하지만 조걸은 어마어마한 내력이 실린 화살이 제게로 겨눠진 걸 알면서도 피하지 않고 직선으로 달렸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도록 간격이 좁혀진 순간.
패앵!
궁수가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맹렬히 회전하며 조걸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공기가 화살촉을 향해 말려 들어가며 허공에 와류가 생성됐다. 그 모습은 흡사 진노한 용과도 같았다.
조걸은 이에 맞서 검을 쥔 오른손을 왼쪽 어깨 너머까지 끌어당겼다.
“하압!”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힘을 다해 휘두른 매화검의 검면이 날아드는 화살과 충돌했다.
카아아아아아아앙!
폭음에 가까운 금속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검에 모든 힘을 다 실었음에도 내력을 가득 실은 화살은 튕겨 나가는 대신 조걸의 검을 파고들듯 전진해 왔다. 화살촉이 회전하며 검면을 갉아 대는 소리가 섬뜩했다.
평범한 철검이었다면 단번에 부러지고도 남았을 충격이다. 그러나 당가의 정수가 담긴 매화검은 회전하며 파고드는 화살을 끈질기게도 버텼다.
그리고 그 순간.
“타아아아아아압!”
강하게 기합을 내지른 조걸은 왼손을 검을 향해 뻗었다. 화산의 죽엽수 공력을 가득 담아 녹빛으로 물든 손은 화살이 닿은 검의 반대쪽 검면을 힘껏 쳤다.
콰아아아아앙!
검에 충격이 더해지자 화살의 궤도가 뒤틀렸다. 하지만 여력이 남은 화살은 끝내 조걸의 옆구리를 스쳤다.
조걸의 옆구리에는 파낸 듯한 반원 형태의 상흔이 새겨졌고, 검면을 쳤던 좌수엔 뼈가 드러날 만큼 깊이 베인 상처가 남았다.
그 대가로 얻은 건 이제 삼 장 정도밖에 남지 않은 적과의 거리였다.
“큭!”
궁수는 빠르게 몸을 뒤쪽으로 날리며 화살통에서 또 하나의 화살을 뽑아 시위를 먹였다.
활을 들어 상대에게 겨누려는 그 순간, 그의 시야로 한 줄기의 빛살이 날아들었다.
파아아아아앗!
쾌검이 순식간에 궁수의 목을 꿰뚫는다.
“컥⋯⋯.”
억눌린 듯한 신음을 흘린 궁수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허물어졌다.
‘보이지도 않았⋯⋯.’
털썩.
궁수의 목에서 검을 뽑은 조걸은 피가 줄줄 흐르는 왼손을 꽉 쥐며 곧장 땅을 박찼다.
‘다음은 어디냐!’
언제나 장난기 많고 활기차던 얼굴에 어느새 냉막한 검수의 표정이 덧씌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