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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28화 (1,329/1,567)

1328화. 벗어난 건 아무것도 없다. (3)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포탄이 쏘아지는 소리가 협곡 안까지 쩌렁쩌렁 울려 왔다. 시야가 무척 좁은데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

중독되어 내력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는 몸으로도 어떻게든 날아드는 포탄을 막아 내려 애를 쓰던 해남의 장로 중 하나가 허공에서 포탄에 정면으로 얻어맞아 협곡 안으로 튕겨 들어왔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보며 호가명의 부관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

그의 시선이 옆에 있는 호가명에게로 향했다. 책사라면 전율이 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호가명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조금의 흥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이럴 때마다 그는 호가명이라는 이에 대해 거듭 감탄하게 되었다.

그가 대단한 기책을 선보였기 때문에?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 전략 자체는 딱히 대단할 게 없다. 좁은 곳에서 빠져나오는 이들에게 화력을 투사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딱히 병법이라 부를 만한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대단한 건, 상대가 협곡이라는 독 안에 제 발로 들어갔음에도 그 뒤의 뒤를 대비해 두는 치밀함이었다.

호가명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저 화포와 궁수들을⋯⋯. 아니, 어쩌면 가용한 모든 병력을 모조리 협곡으로 투입했을 것이다.

저 좁은 협곡 안에서 하나라도 더 많은 이를 고혼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곡선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협곡에서 활이 제 위력을 발휘할 리도 없고, 화포를 쏠 수도 없다. 되레 아군으로 가득 찬 좁은 지형에 발목 잡혀 방해만 되었을 것이다.

설령 협곡의 위에 포진을 시킨다 해도, 저 높이에서 화포를 아래로 쏘는 건 불가능하다. 활을 쏘아 대어도 땅에 도착할 때쯤엔 그 위력이 줄어들어 결국 낭비에 지나지 않았을 테고.

협곡을 통과하는 이들이 평범한 군사라면 내력이 실리지 않은 화살로도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단련된 무인이라면 내력이 담기지 않은 화살 따위야 무용지물 아니던가?

그런 쓸모없는 병력이 협곡 밖에 진을 친 덕분에 지금 적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물론 그렇지야 않겠으나, 얼핏 보기에는 협곡 안에서 저들이 입은 피해보다 한 번의 화살비와 포격으로 입은 피해가 더 커 보일 지경이다.

“구, 군사.”

그때 또 다른 부관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시고 저들을 배치하신 겁니까?”

호가명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질문했던 부관이 사색이 되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은 한가로이 문답 따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궁금증을 참지 못했으니 이는 명백한 실수였다.

하지만 그때 호가명이 말했다.

“상대의 약한 곳을 친다.”

“⋯⋯예?”

“그게 기본이지.”

호가명의 눈은 여전히 적들에게 향해 있었다.

유리한 지형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도 병법의 기본이고, 상대의 약한 점을 노리는 것 역시 병법의 기본이다.

다른 이들은 눈앞에만 집중했지만, 그는 그저 그 뒤에 집중했을 뿐이다.

“약한 곳이라 하시면⋯⋯?”

하지만 부관들은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약점이라니, 이 상황과 상대의 약점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상대의 약점은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과 머릿수가 적다는 것인데.

“놈들이 협곡에 진입했을 때 생기는 문제가 뭐였지?”

“그야 겪어 보지 못한⋯⋯.”

“아니다.”

호가명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포진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그, 그럼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수가 줄어들 테니, 힘을 온전히 활용하기 어려워지겠군요.”

호가명의 눈가가 다시 꿈틀했다.

생각 없이 대답했던 이는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는 생각하라고 달린 것이다. 소수와 소수가 맞붙어서 유리한 쪽이 누구인지는 협곡 안에서 이미 증명이 되었을 텐데? 이 협곡은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이 아니다.”

“⋯⋯제가 우둔했습니다.”

“놈들의 포진이 길어져서 우리가 얻는 이점은 하나밖에 없지.”

호가명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유이설과 함께 괴량의 추적을 저지하고 있는 화산검협에게로.

“놈이 두 곳에 존재할 수는 없게 된다는 점이다.”

“아⋯⋯.”

“강점이란 약점의 부재. 거꾸로 생각하면 약점이란 강점의 부재인 것이다. 화산검협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 놈들의 약점이 드러난다.”

“⋯⋯.”

“철저하게 적의 약점을 노리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지.”

“그럼 저놈이 후방에 있을 줄 미리 아시고⋯⋯?”

“아니다.”

“예?”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놈이 앞에 있었다면 저딴 화살과 포탄 따위로 피해를 주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대신 후미는 괴량이 철저하게 농락했겠지.”

“아⋯⋯.”

“지금은 거꾸로 된 것일 뿐. 놈이 뒤에 있으니 혈검단조차 힘을 써 보지 못하고 있지만, 덕분에 앞을 부술 수 있지.”

그제야 호가명의 생각을 이해한 이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당연한 일인데, 이곳의 누구도 그 당연한 걸 생각하지 못했다. 호가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호가명은 살짝 눈을 감았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들려준 이유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입 밖으로 내어 스스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기책 같은 건 필요 없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그는 기책 따위는 부릴 줄 모른다.

만일 장일소가 이곳에 있었다면 호가명과는 전혀 다른 수를 썼을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절벽을 무너뜨려 저놈들을 단숨에 파묻어 버리거나, 땅을 뒤집어 놈들을 짓뭉개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장일소라 할 수 있는 일이다. 호가명은 그런 방법은 떠올릴 수 없다. 그러니 철저하게, 더 악착같이 기본에 충실하여 파고들 뿐이다.

‘이 전쟁은 소모전이다.’

화산검협 놈이 이 전쟁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호가명의 판단으로는 철저한 소모전이었다.

그러니 굳이 무리수를 두는 대신 철저하게 갉아먹기로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꾸준히 줄여 나가다 보면 결국에는 화산검협이라는 월척마저도 그가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들게 될 테니까.

호가명의 시선이 화산검협에게로 향했다.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호가명은 자신을 과신하지 않는다. 그가 노리는 바를 청명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가명이 주저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에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어도 막을 수 없는 게 있다. 눈치를 챈다 해도 손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렇기에 전쟁이란 시작하기 전에 그 결과가 나와 있다 말하곤 하는 것이다.

승리할 수 없는 전쟁.

거기에 스스로 뛰어든 것이 저 화산검협이 지닌 한계이고, 정(正)이라 자칭하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 할 약점이었다.

호가명은 힐끗 청명을 일별했다. 검게 일렁이던 두 눈이 순식간에 차게 가라앉았다.

지금은 승리감에 도취될 때가 아니다. 저놈이 움직이기 전에 다음 수를 놓아야 한다.

“벗어난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여전히 그의 인식 내에 순조로이 존재했다.

청명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호가명.’

멀리 있는 호가명의 모습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뚫고 들어가 저놈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노회한 여우 같은 놈은 결코 그에게 그 정도 거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청명이 호가명에게 느꼈던 불길함이 이 순간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본디 청명이 가진 폭발력과 허를 찌르는 발상의 전환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철저히 제 할 일을 하는 이들과 상성이 최악이었다.

‘제길!’

청명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해남이 필사적으로 저항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저 버티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발을 빼기도 어렵다. 저기서 저들이 적을 쫓아 뛰쳐나가는 순간, 미처 협곡을 빠져나가지 못한 이들이 쏟아지는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말 것이다.

‘칼이 모자라!’

그저 버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단독으로 움직여 적을 베어 낼 수 있는 칼이⋯⋯!

청명은 곧장 유이설의 어깨를 획 끌어당겼다.

유이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청명은 후미 쪽으로 다시 치고 나가며 고함 쳤다.

“빨리 가서 저쪽을 도와, 사고!”

“사질!”

“가!”

그제야 유이설에게도 상황이 제대로 보였다. 청명이 왜 밀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도움이 필요한 쪽은⋯⋯ 청명보다도 바로 저곳이다.

하지만⋯⋯.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청명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완전히 숨길 수도 없는 것이다.

둘 다 위험하다. 둘 다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럼 대체⋯⋯.

“가라니까!”

혼란에 빠진 유이설을 노려보며 청명이 크게 윽박질렀다. 괴량이 언제 재차 달려들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말이다.

핏발이 선 사질의 눈을 본 순간, 그녀는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알고 있다.

배웠으니까.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되새겨 왔으니까.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검을 든 이가 어디로 달려가야 하는지 유이설을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사문이 그녀에게 준 가르침이 지금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느껴졌다. 그 배움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 괴로웠다.

이를 악문 유이설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남은 미련을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쏘아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청명은 당패에게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같이 가서 도와!”

“예!”

당패 역시 군말 없이 뒤로 달려갔다.

두 사람을 먼저 보낸 청명이 괴량을 응시했다. 괴량은 손에 든 검을 까딱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오히려 내가 들을 말이겠지.”

“큭큭큭큭.”

괴량의 두 눈에 득의에 찬 빛이 번뜩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저들이 상황을 정리할 시간을 준 건 사실이지만, 이는 괴량에게 딱히 불리한 일이 아니었다.

부상당한 사냥감이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남기로 했다는데 만류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른 놈들의 상황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다. 그의 관심을 끄는 건 오직 앞에 있는 청명뿐이었다.

보인다. 상처 입은 다리가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이. 기껏 지혈해 놓은 옆구리가 다시 벌어져 피를 흘리는 모습이.

그뿐이랴. 온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셀 수 없이 가득하고, 내상까지 입었는지 낯빛이 파리했다.

이미 흘린 피가 몇 되는 될 터.

이런 상황에서는 천하제일의 고수라 해도 제 실력의 반의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청명의 입에서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솔직히 이젠 조금 버겁다.

피를 너무 흘렸는지 세상이 흐렸다. 검을 쥔 손에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고통에는 익숙하지만, 지치고 지친 끝에 찾아오는 이 무력감만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싸워야 한다.

“피곤한 일이지.”

괴량이 비웃음을 흘리며 거리를 좁혀 왔다.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물러나지 못한다는 건 말이야.”

“⋯⋯.”

“그게⋯⋯ 죽는 길인 걸 뻔히 알면서도.”

노골적인 조롱이 쏟아졌지만, 청명은 되레 가볍게 웃었다.

“네가 왜 약한지 알아?”

“뭐?”

뜬금없는 질문에 괴량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그를 비웃으며 청명이 말했다.

“도망가고 싶을 때 도망갔으니까.”

“⋯⋯.”

“내가 강한 이유도 간단하지. 도망치고 싶을 때, 도망치지 못했거든.”

그게 언제든 말이다.

저놈들은 모른다. 강하다는 게 무엇인지. 그가 진정으로 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도.

심지어 청명은 여전히 좇고 있다.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던 이를. 세상 누구보다 강했던 이를.

“⋯⋯헛소리는 지옥에서나 해라.”

괴량이 혈검단원들을 대동하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물러서지 않고 마주 달려드는 청명의 눈앞에, 언제나 바라봤던 이의 등이 아스라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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