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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27화 (1,328/1,567)

1327화. 벗어난 건 아무것도 없다. (2)

협곡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이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했다.

제 발로 협곡에 진입하여 독 안에 뛰어든 쥐새끼 신세나 다름없던 적들이 그 미끄러운 독을 악착같이 기어올라 빠져나오고 있다.

저들을 막기 위해 협곡 안으로 배치된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저놈들은 그 모든 이들을 고혼으로 만들고 마침내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마, 막아라아아아!”

누군가가 다급한 마음에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건 고함을 치는 당사자도 알고 있었다. 이곳에 도달할 때까지도 막아 내지 못한 이들을 그들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그때 가장 먼저 앞으로 박차고 나선 이가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아 주었다.

“으라차아아아아아!”

독 오른 담비처럼 뛰어오른 조걸이 수십 개의 검영을 만들어 내며 다급하게 튀어오는 이들을 단번에 꿰뚫었다.

탁!

착지한 조걸의 두 눈에 드넓게 펼쳐진 세상이 쏟아져 들어왔다.

“왔다! 빌어먹을! 뚫었다고!”

온몸으로 환희가 차올랐다. 그런 그의 뒤를 따른 이들 역시 연이어 협곡 밖으로 뛰쳐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빌어먹을!”

“살았다! 살았다고!”

이 상황에 특히 흥분하고 있는 건 해남의 제자들이었다.

좁은 협곡, 아무리 뚫어도 여전히 앞을 막고 있는 적들, 거기에 꼬리까지 따라붙은 만인방까지.

희망이라곤 없는 듯한 상황이었다. 이들 중 반 이상은 이 협곡이 제 무덤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살아서 다시 드넓은 땅을 밟게 되었으니 그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밖으로, 또 밖으로.

빛을 되찾은 이들이 환희에 젖어 달렸다.

“군사.”

부관들이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눈으로 옆에 선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흠.”

협곡 안으로 들어와 앞쪽의 상황을 지켜보던 호가명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뚫렸군.”

다르게 생각할 여지조차 없다. 협곡을 봉쇄해서 적을 괴멸시키겠단 그의 계획이 완벽하게 무너진 것이다.

적을 칭찬해야 할지, 그의 모자람을 탓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호가명의 선택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멈추지 말고 계속 가! 적은 여전히 뒤에 있다!”

“예, 사숙!”

등 뒤에서 들려온 백천의 고함에 조걸은 목이 터지도록 크게 대답하고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아무튼 대단하다니까!’

그는 순간 흥분해서 상황을 잊었지만, 백천은 여전히 이 모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저런 사람이 지휘하고 있으니 사패련이라 해도 화산 일행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강남을 빠져나가는 일조차도 그들의 생각처럼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디! 어디로 갑니까, 사형!”

“말이라고 하냐? 북쪽으로 달려!”

“북쪽이 어디냐고!”

“젠장! 내가 가는 쪽으로 와!”

“예!”

조걸은 앞서 달리는 윤종의 뒤로 잽싸게 따라붙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해남의 제자들에게 방향을 알려야 했다.

“다들 이쪽으로⋯⋯.”

하지만 그때였다.

무언가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지독한 협곡과 대비되듯 저 앞에 펼쳐진 드넓은 숲 곳곳에서 무언가가 들썩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

설마 매복?

당혹한 와중에도 빠르게 머리를 굴려 분석했다.

사람이 가장 안심하고 있을 때의 허점을 노리는 매복이 아니겠는가. 식은땀 나는 한 수이기는 하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게다가 저놈들이 너무 일찍 모습을 드러내어 벌써 그 위치를 들켰으니 얼마든지 대비 가능했다.

조걸은 앞에 매복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무언가가 눈에 걸렸다.

숲의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들의 손에 들린, 각궁(角弓).

순간 조걸의 입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우레처럼 터져 나왔다.

“엎드려어어어어어어!”

하지만 내력을 실은 강전(强箭)이 그 목소리보다도 빠르게 무차별적으로 날아들었다.

콰드드드득!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든 강전은 환희에 젖어 환호성을 지르던 해남 제자들의 몸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끄윽⋯⋯.”

“아아아아아아악!”

얼굴이 꿰뚫린 이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고, 몸에 강전이 박힌 이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차오르는 울분을 이기지 못한 조걸이 욕지거리를 했다.

저 지옥 같은 협곡을 뚫어 낸 이들이 이리도 허무하게!

“사형!”

“아직 괜찮아! 그래 봐야 몇 명 안 된다!”

활이란 본디 무인이 사용하기 어려운 무기다.

머릿수가 많다 못해 넘쳐나는 사패련이라 해도, 무학을 익힌 이들이 반응조차 하지 못할 속도로 내력 담긴 화살을 쏘아 낼 수 있는 이가 많을 리 없다.

갑작스레 동원했다는 걸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마 많아 봐야 열을 넘지 않을 것이다. 당황하지 않고 대응한다면⋯⋯.

그때 윤종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협곡을 뚫고 나와 마침내 마주한 드넓은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어 오고 있다.

먹구름이 아니다. 저건 숲에서 날아드는 수백, 수천 발의 화살이었다.

윤종의 입에서 절망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피, 피해! 지금 당장!”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지금 해남의 제자들은 모두 빠져나오질 못해 협곡의 출구에 반쯤 걸쳐 있었다. 좁은 협곡에 아직 갇혀 있는 이들은 몸을 빼려 해도 뺄 수 없다. 그리고 저 화살비는 철저하게 그들을 노리며 날아들고 있다.

백천과 남궁도위가 반사적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리고 다급하게 검을 휘두르며 화살들을 쳐 냈다.

처음 날아들었던 것과 같은 강전은 아니나, 고작 둘이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을 모두 쳐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날아온 화살의 거의 절반가량이 속도를 잃지 않고 해남 제자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으헉!”

“아아아악!”

독이 발린 화살은 자비라고는 없이 그들의 몸을 뚫었다.

처절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한번 마음을 놓았던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쏟아진 공격인지라 피해가 더욱 극심했다.

화살에 꿰뚫린 이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다른 해남 제자들의 눈에는 공포가 빠르게 번졌다.

“사, 사형! 괜찮습⋯⋯.”

콰드드득.

“⋯⋯끄윽.”

당황하여 주변을 살피던 이의 관자놀이에 횡으로 날아온 화살이 꽂혔다. 위쪽에서 쏟아진 일반 화살과 격이 다른 강전이다. 해남의 제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 이가 고꾸라졌다.

적의 온갖 공격을 막으면서도 막대한 피해는 입지 않았던 이들이 한순간의 공격에 당해 십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만 것이다.

지옥과도 같았던 협곡을 가까스로 뚫었건만!

모두의 가슴에 더할 나위 없는 절망이 피어올랐다.

“빠, 빠져나가야 한다!”

“뭐 하는 거야, 앞쪽! 계속 달리라고!”

“멈추지 마! 뒤쪽에서 만인방이 온다! 빨리 가!”

협곡의 출구에서 해남의 제자들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앞이 막혀 있거나 강전이 언제 날아들지 몰라 달려 나갈 수 없는 이들과, 어떻게든 협곡을 빠져나가야 하는 이들. 어느 하나 서로 양보할 수 없었다.

결국 해남의 제자들이 서로를 밀치고 당기는 혼란이 벌어졌다.

“뭐 하는 거야, 이 자식들아!”

해남의 대제자 곽환소가 외쳤다.

“당황하지 마라! 그래 봐야 화살이야! 침착하게 쳐 내면 못 쳐 낼 게 아니다! 너희는 해남의 제자다!”

하늘 위로 또 한 번의 화살비가 솟구쳤다.

곽환소는 이를 악물고 위로 도약했다. 백천이나 남궁도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라도 나서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천과 남궁도위가 그런 그를 따라 재차 몸을 띄워 올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머리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장문인!”

어느새 앞으로 달려 나온 금양백과 장로들이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화살비를 막아선 것이다.

타타탕! 타타타타타탕!

화살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성치 않은 몸이라 순간순간 놓친 화살이 곳곳에 박혀 들었지만, 해남의 장로들은 신음 한 번을 흘리지 않았다.

해남의 제자들도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떨어지는 화살들을 쳐 냈다. 완전히 막아 낸 건 아니지만, 전에 비하면 피해가 확연하게 줄었다.

피이이이잉!

금양백이 격하게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강전을 쳐 냈다. 손목이 욱신거릴 정도의 충격이 밀려들었다. 이 화살은 앞선 화살들과 확실히 격이 달랐다.

“장문인!”

“장문대리! 여기는 맡기시오!”

“예!”

백천은 고개를 끄덕일 틈도 없이 앞으로 짓쳐 달려 나갔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저 강전을 쏘아 대는 놈들을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그놈들을 죽이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더 전진할 수가 없다.

“윤종! 조걸! 흩어져서 화살 쏘는 놈들을 잡아라!”

“예, 사숙!”

조걸과 윤종 역시 예상했다는 듯 곧장 답했다. 둘은 득달같이 강전이 쏘아졌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우렛소리와도 같은 폭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무언가 시커먼 것들이 해남의 제자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포탄?’

해남의 장로 하나가 반사적으로 날아드는 포탄을 검으로 후려쳤다. 하지만 검 따위로 포탄을 막아 낼 수 있었다면, 화포라는 무기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있겠는가?

쿠웅!

검이 두 동강 나며 시커먼 포탄이 장로의 몸에 거세게 박혔다. 비명을 내지를 틈조차 없었다. 절명한 장로는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가고 말았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연이어 폭음이 울렸다.

물론 그 수야 몇 되지 않는다. 아무리 사패련이라고 하나, 이곳이 광동 땅이라고 하나, 관에서 금지한 화포를 수십 문씩 동원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불을 뿜는 화포는 불과 몇 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몇 문 되지 않는 화포와, 동시에 쏟아지는 화살비, 거기에 지시를 내리는 주요 인물을 저격하듯 날아드는 강전이 조합되니 지옥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살은 조걸의 머리 위를 넘어 해남의 제자들에게로 연신 날아든다.

그가 앞으로 달려 나가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사이 뒤쪽에 있는 이들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공격해야 한다. 하지만 공격을 위해선 제 살을 뜯어 내야 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대체 뭘 하란 말인가?

“조걸!”

혼란에 빠진 조걸의 귀에 백천의 호통이 내리꽂혔다.

“망설이지 마라!”

“하, 하지만⋯⋯!”

“뒤에는 내가 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백천의 눈엔 완고한 확신이 가득했다. 이를 확인한 순간, 조걸의 발은 이미 땅을 힘껏 박차고 있었다.

조걸의 눈에도 점점 확신이 깃들었다.

그는 화산의 돌격대장이다. 막아 내는 것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저들을 돕는 길은 한시라도 빨리 저들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이 개자식들아!”

노기를 실어 힘껏 외친 조걸이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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