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5화. 그게 사람이라면 말이야. (5)
“으라차아아아아아!”
조걸이 달려드는 적들을 연이어 찔렀다. 기세는 조금도 죽지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 날카로워졌지만, 그의 표정은 점차 굳어 가고 있었다.
“허억! 허억!”
거의 다 됐다.
이 망할 협곡의 끝이 드디어 눈에 보인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달려드는 이의 목을 꿰뚫은 조걸은 가쁜 숨을 토했다. 얼굴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검을 잡은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벌써⋯⋯.’
내력이 바닥난 듯했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검은 기본적으로 찌르기를 중점으로 한다. 그 특성상, 조걸의 검은 내력의 소모가 크지 않은 편이었다. 이런 싸움쯤은 사흘 밤낮 반복해도 지치지 않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이미 벌어져 버렸으니 부정할 수도 없다.
내력뿐만이 아니다. 그를 채우고 있던 것들이 급속도로 바닥나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싸우기 시작한 지 불과 일각도 되지 않았는데.
‘이게 이렇게나⋯⋯.’
모든 것이 급격하게 소모되고 있다.
체력도, 내력도, 심지어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있었던 정신력마저도.
조걸이 지친 기색을 보이기 무섭게 윤종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윤종의 등판 역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보던 조걸이 허공에 검을 가볍게 던져 올리며 손에 축축하게 배어난 땀을 세차게 털었다.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선두에서 싸운다는 게, 누구보다 앞에서 길을 연다는 게 얼마나 지독한 압박을 동반하는 일인지.
‘우는소리 하지 마! 이쪽은 셋이라고!’
그만큼이나 윤종이나 백천도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리고 압박을 받는다면 그보다는 백천이⋯⋯.
반사적으로 백천을 돌아본 조걸은 순간 움찔했다. 선두로 치고 나올 기회를 노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백천은 의외로 뒤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숙?”
조걸이 의아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백천은 그 말도 듣지 못한 듯 그저 뒤만 하염없이 주시할 뿐이었다.
“퉷!”
입에 고인 피를 아무렇게나 뱉은 청명은 눈앞의 괴량을 노려보았다.
‘엉망이군.’
몸 상태가 엉망진창이다 못해 제멋대로일 지경이다.
- 빌어먹을! 몸뚱이가 뭔 망가져도 부품 갈아 끼우면 되는 수레인 줄 아나? 형님은 그따위로 굴다간 곧 뒈질 거요.
‘그때고 지금이고 당가 놈들은⋯⋯.’
의원이란 것들은 똑같다. 같은 소리만 해 댄다.
다치면 쉬어야 한다. 사람의 몸은 편의 좋게 알아서 회복되는 게 아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쉴 수 있다면 쉬었겠지. 쉴 수가 없으니 문제다.
청명은 강해졌다. 불과 몇 해 만에 과거 그의 경지를 절반 이상 따라잡았다.
개미 눈물만큼 모이는 내력도 쌓고 또 쌓아 이제는 딱히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모았고, 검술도 이 육체에 거의 익숙해져 완연(完然)에 가까운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그게 과거의 경지를 완벽하게 회복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장 부족한 건 내력.
지난 생에서 그는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내력을 쌓았다. 하지만 이번 생에 그가 내력을 쌓을 수 있었던 시간은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새로 만들어 낸 자소단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영단으로 그만한 세월을 이겨 낼 수 있다면 누가 내력 따위에 집중하겠는가?
해남에서 여기까지를 선두에 서 뚫는 이번 여정은 과거의 그라 해도 숨이 가쁠 정도의 험로였다. 그런데 그걸 완숙하지 않은 육체와 내력으로 버텨 냈으니 몸뚱이가 맛이 가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오직 적만을 쓰러뜨린다. 그 하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신경을 끊어냈음에도 이 꼴이다.
물론 부상을 다스리고 숨을 고르기 위해 뒤로 빠진다는 선택지도 있기는 했다.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해도 여기까지 도달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오검은 이제 예전 화산의 망할 놈들에게도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천우맹의 소가주 놈들도 제 몫은 충분히 하니까.
그러니 청명이 무리하지 않아도 그놈들이 이들을 잘 이끌어 이곳까지는 도달했을 것이다.
그 대신 적어도 해남의 제자들이 서른은 더 죽었겠지.
‘서른이라.’
청명의 입가에서 문득 실소가 새어 나왔다.
우습지도 않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 몇몇 목숨을 살리겠다고 악쓰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청명보다 잘 아는 이가 있을까?
과거의 청명이었다면, 그깟 서른을 살린다고 무리하느니 본인의 몸을 철저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무너지면 서른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죽을 테니까. 이건 냉정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래. 분명 그렇다. 하지만⋯⋯.
-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게 지금이 아니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장문사형.’
자꾸만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해남 따위 알 게 뭐라고.’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화산을 바꿨다. 무너지고 있는 화산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렸고, 패배감에 젖어 있던 화산의 제자들에게 웅심(雄心)을 심어 주었다.
이는 청명에게 있어 철저한 과거로의 회귀였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직도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그리운 화산을 재현해 내는 일이었다.
그가 청명이기 위해서. 화산의 매화검존이기 위해서.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바뀐 사람은 화산도, 저 오검 놈들도 아니라 바로 청명이었음을.
저놈들을 가르치고 닦달하며 비로소 청명도 알게 되었다.
인간의 가치는 무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더없이 우둔하다며 청명이 비웃던 이들조차도 모두 제 삶을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전쟁에서 소모품으로 쓰인 후 버려지는 이들조차 말이다.
하찮은 목숨. 한낱 숫자로만 끝나는 목숨.
그 하찮은 이들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삶이 있다. 쓸모없다고 무시했던 이들조차도 누군가에게는 더없는 의미이고, 더없는 가치이다.
청명은 장문사형을 지키고 싶었다.
망할 당보 놈을 살리고 싶었고, 빌어먹을 청진이 놈이 멀쩡히 살아 화산으로 돌아가는 꼴을 보고 싶었다.
화산의 모든 놈들을 어떻게든 화산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알게 되었다.
강호라는 거대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하찮기 그지없는,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한 이들이⋯⋯ 누군가에게는 청문이고, 당보며, 청진이라는 것을.
누군가는 그때의 청명처럼 필사적으로 이들을 지키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서른. 하찮은 숫자이나, 이제 더 이상 청명은 이를 하찮게 여길 수 없다.
차라리 몰랐으면 나았을 텐데.
‘비웃을 거냐?’
청명은 문득 궁금했다.
청진이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비웃을까? 아니면, 이제 드디어 청명도 도인이 되었다고 놀라워하며 웃을까?
알 수 없다.
청진은 이미 죽었으니까.
“사질⋯⋯.”
등 뒤에서 유이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근히 걱정이 녹아 있다. 아니, 굳이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확연한 걱정이 녹아 있었다.
유이설의 목소리로 걱정이라니.
‘안 어울리네.’
하지만 더 어울리지 않는 건 저 유이설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게 한 그 자신이었다.
청명은 들고 있던 암향매화검을 가볍게 돌려 잡았다.
욱신.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끔찍했다. 내력은 이미 한참 전에 바닥을 드러냈다. 중간중간 달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내력을 끌어모아 봤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져서 겨우겨우 지혈해 놓은 상처도 격하게 움직이는 순간 다시 벌어지고 말 것이다.
유일하게 다행인 건 내상을 입지는 않았다는 점이지만, 그게 딱히 위안이 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청명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먼저 갈까?”
청명이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인 순간, 괴량이 저도 모르게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의 기세는 처음에 비해 확연히 꺾여 있었다.
괴량은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청명의 상태를 몇 번이고 살폈다.
‘뭐지?’
놈은 이미 한계다. 아니, 벌써 한계였어야 한다. 전신에 입은 상처는 절정의 고수라 해도 이미 운신이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실제로는 보이는 것보다 더 심할 것이다. 그의 검에 발라 놓은 독은 미량이나마 저 몸에 남아 내부를 계속해서 헤집어 놓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청명의 기세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 무시무시해졌다. 이제는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혈이 뒤틀리고, 피부가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저건 허세다.’
괴량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미 호가명이 말했었다. 놈은 한계에 가까워질수록 허세를 부려 자신의 상태를 감추려 든다고. 그러니 저 말과 행동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고.
상처 입은 맹수를 농락하듯, 느긋하⋯⋯.
파아아아앗!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의 모습이 퍽 꺼지더니 괴량의 눈앞에 불쑥 환영처럼 나타났다.
괴량이 기겁하여 검을 치켜올렸다.
카아아아앙!
엉겁결에 치켜올린 검이 날아드는 얌향매화검을 용케 막아 내었다. 하지만 검과 검이 충돌하는 순간 청명의 검은 튕겨 나가기는커녕 배는 더 빠른 속도로 괴량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검이 이미 거의 목에 닿아 있음을 느낀 괴량은 혼신의 힘을 다해 목을 뒤틀었다.
콰득.
목이 꿰뚫릴 뻔한 걸 가까스로 면했지만 베이는 건 면치 못했다. 목의 중앙에서 반 치 정도 옆을 파고든 검은 경동맥을 아슬아슬하게 지나며 목 옆을 베고 지나갔다.
괴량은 그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정신없이 물러났다.
한순간. 정말 한순간만 반응이 늦었다면 목이 여지없을 꿰뚫렸을 것이다. 지옥문에 발을 담갔다가 빠져나왔다는 걸 인지한 괴량의 얼굴이 순간 핼쑥해졌다.
하지만 괴량 역시 수많은 전투를 치러 왔다.
그 와중에서도 그의 눈은 청명을 정확하게 쫓고 있었다. 청명의 다리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검을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온다!’
괴량이 정신을 깨우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맹수는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칠 이가 아니다. 이미 괴량이 약세를 보인 이상 반드시 이번엔 그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괴량이 있는 내력을 모두 끌어 올리며 땅에 발을 박아 넣은 순간.
파아아아앗!
청명이 땅을 박찼다. 검을 쥔 괴량의 양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막기만 하면⋯⋯.’
하지만 이윽고 괴량의 머릿속은 희게 질리고 말았다.
땅을 박찬 청명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괴량이 있는 정면이 아닌, 뒤쪽으로.
‘뭐⋯⋯?’
뒤쪽으로 몸을 날린 청명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괴량은 그제야 자신이 철저하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청명은 유이설과 당패를 대동해 뻥 뚫린 협곡을 따라 질주하고 있었다.
“이⋯⋯!”
우두둑!
검을 움켜쥔 손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며 뼈마디가 어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괴량은 그 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크게 외쳤다.
“뒤쫓아라! 당장!”
“예!”
생각지 못한 상황에 망연히 청명을 보던 혈검단원들은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흘끗 본 괴량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개 같은⋯⋯.”
순간적이었지만, 어쨌든 상대의 손바닥 안에서 철저하게 농락당하며 놀아났다는 사실이 괴량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으아아아아악!”
마치 발작처럼 괴성을 내지른 그는 이내 협곡을 끝을 향해 나아가는 청명을 전력으로 뒤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