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4화. 그게 사람이라면 말이야. (4)
유이설의 동공이 흔들렸다.
‘피?’
뒤로 튕긴 청명의 다리가 젖은 게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물론 피가 묻은 건 이상할 게 없다.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쓰지 않을 방법 따윈 없으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젖어 드는 게 보일 정도다.
적들의 피를 뒤집어썼다면 서서히 굳어 가야 할 터.
저건 명백히 청명의 다리에서 뿜어져 나온 피다.
‘상처!’
해남도의 해안에서 입었던 상처일 것이다.
무리만 하지 않으면 아물 거라고 했던 바로 그 상처.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밖에 없었다.
청명은 항상 그런 말을 듣고도 싸워 왔고, 언제나 별문제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여겼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다.
청명이 순간적으로 몸을 뒤집으며 땅으로 발을 내뻗었다.
상처 입은 쪽 다리가 몸을 지탱하며 팽팽히 선 순간, 순간 바짓자락이 훅 부풀어 올랐다.
상처에서 솟구친 피가 안에서부터 옷자락을 때린 게 분명했다.
유이설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청명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괴량에게로 마주 달려들었다.
“안……!”
카아아아아앙!
또 한 번 강한 충돌이 일었다.
그 여파가 유이설을 휩쓸었다.
얼굴을 갈라 버릴 듯 일어난 강풍 속에서 그녀는 청명의 등을 보았다.
등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새삼 깨달았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도 청명은 지금까지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웠다.
저 다리로 절벽을 타고 적을 막아 냈다.
멀쩡할 리 없다. 멀쩡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멀쩡하리라 믿었을까.
그때, 붉은 그림자 같은 혈검단원들이 연이어 청명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사질!”
유이설이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질렀다.
쾅!
다급하게 땅을 박찼지만, 이미 늦었다.
평소 감정의 동요가 극히 적은 그녀라 오히려 지금 자신을 덮친 이 격정을 어쩌지 못한 것이다.
“하압!”
오히려 청명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당패의 반응이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쇄애애애액!
비도가 청명에게로 쇄도하는 혈검단원들을 향해 광속으로 쏘아졌다.
한없이 쾌속한 비도였지만, 그것은 적의 몸에 닿지 못하고 검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한순간 적들의 기세를 주춤하게 하는 정도로 그쳤다.
평소였다면 그 정도로도 충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명에겐 아니었다.
파아앗!
혈검단원들의 세검이 청명의 상반신을 향해 독사처럼 뻗쳐 왔다.
청명이 획 상체를 젖혀 그 검들을 피해 냈다.
하지만 그 순간, 연검처럼 휘어진 괴량의 검이 암향매화검을 휘감고 단번에 앞으로 당겼다.
쿠웅!
끌려가지 않기 위해 청명은 무심코 땅을 콱 내밟았다.
하지만 충분한 힘이 실리지 못해 몸이 조금 앞으로 딸려가 버렸다.
서걱!
연신 날아든 세검들이 청명의 몸을 할퀴고 지나간다.
옷자락이 잘리고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파아아아앗!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유이설이 매처럼 솟아올랐다.
혈검단원들에게 연이어 검격이 쏟아졌다.
카앙! 카앙!
하지만 상대는 지금까지 그녀가 상대해 오던 이들과는 달랐다.
평범한 만인방도였으면 목숨을 끊어 놓기에 충분했겠으나, 혈검단원들은 뒤로 밀려나긴 했어도 유이설의 검을 모두 막아 냈다.
쇄애애액!
밀려난 혈검단원들은 방어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검첨에 어린 새파란 검기가 그녀의 전신을 꿰뚫을 듯 단번에 발출되었다.
타악!
허공에서 제 발등을 차며 몸을 뒤집은 유이설은 날아드는 검기를 아슬아슬하게 모두 피해 냈다.
하지만 그 위험한 검기를 상대하면서도 그녀의 신경은 혈검단원들이 아닌 아래에 있는 청명에게 쏠려 있었다.
‘사질!’
파아아아앗!
유이설이 적들과 짧은 합을 나눌 동안에도 그 아래에서는 수십 번의 검격이 오가고 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기의 파편들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그 강력한 기와 기의 충돌이 청명의 몸에 어떤 부담을 쌓고 있을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이……!”
파앗!
허공을 박차고 바닥으로 강하한 유이설은 땅에 발이 닿기 무섭게 앞으로 쏘아졌다.
하지만 청명에게 채 닿기도 전에 또 다른 혈검단원들이 괴량의 좌우와 머리 위로 튀어나와 청명을 노렸다.
유이설은 악착같이 검을 뻗었다.
청명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며 뻗어 나간 검은 날아들던 세검 중 하나를 아슬아슬하게 쳐 냈다.
그러나 남은 세 개의 검은 여전히 청명의 몫이었다.혈검단원의 검이 쾌속하게 청명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아!
괴량 역시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막대한 검강을 휘감고는 단숨에 청명의 허리를 노렸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섬전 같은 찌르기와 차마 막을 엄두도 나지 않는 베기.
군더더기 없는 이 완벽한 협공이 청명의 육신을 금방이라도 난도질할 듯했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허리가 갈릴 것이고, 물러난다면 몸이 꿰뚫리는 걸 감수해야 한다.
청명의 선택은 단순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익숙한 곳.
콰앙!
땅을 박차자 폭음이 터진다.
그 폭음이 미처 다른 이들의 귀에 닿기도 전에 포탄처럼 쏘아진 청명이 괴량의 가슴팍으로 안기듯 파고들었다.
괴량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은 허무하게 청명의 등 뒤를 갈랐고, 필사의 찌르기는 허공만 뚫었다.
쿠우우웅!
괴량의 가슴을 들이받으며 밀어 낸 청명은 이내 수십 줄기의 검기를 폭발적으로 뿜었다.
마치 성난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무수히 솟는 검기를 보며 혈검단원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콰드드득! 콰득!
혈검단원들의 몸에 숱한 바람구멍이 뚫린다.
비명을 질러 낼 목까지 뚫린 이들은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절명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괴량은 자신이 다른 혈검단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증명했다.
카가가가가강!
수십의 검기를 모조리 쳐 낸 괴량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청명을 향해 다시 쇄도했다.
복면 위로 드러난 그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콰아아앙!
청명의 검과 괴량의 검이 다시 충돌했다.
그 순간 괴량의 좌수가 움직였다.
벼락처럼 제 허벅지에 있던 가죽 검집에서 유엽도를 뽑아 청명의 얼굴을 향해 발출했다.
서걱!
청명이 고개를 빠르게 뒤로 젖혔지만, 날이 선 유엽도는 청명의 아래턱을 길게 베고 말았다.
피부가 쩍 갈라지고 피가 방울져 튀었다.
“이……!”
한껏 젖혔던 고개를 앞으로 들이받듯 되돌린 청명이 그 반동을 이용해 맞붙은 검을 거세게 밀쳤다.
쿠웅!
괴량의 몸이 뒤로 튕긴 순간 청명이 검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파라라라라락!
비단이 강풍에 휘날리는 듯한 소음과 함께, 암매검의 첨단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리는 검첨으로부터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수십 송이의 매화가 환상처럼 피어났다.
그 매화를 보자마자 괴량은 즉시 검으로 허공을 내리그었다.
세검에서 발출된 세 개의 손톱자국 같은 검기가 미처 다 피어나지 못한 매화들과 충돌했다.
카가강!
개화하지 못한 매화가 강렬한 검기와 충돌하며 그 형태를 잃어 갔다.
하지만 괴량이 발출한 세 개의 검기 중 하나는 매화의 숲을 뚫어 내고도 힘을 남긴 채 청명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서걱!
청명의 옆구리가 길게 갈라지며 울컥 피가 솟았다.
하지만 청명의 검은 그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화아아아아악!
피어나고 또 피어나, 순식간에 협곡을 채워 낸 매화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휘날렸다.
비산하는 꽃잎들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는 괴량을 향해 분노한 듯 날아들었다.
청명이 진심으로 펼친 매화분분(梅花紛紛)을 피해 내기엔 이 협곡이 너무 좁았다.
몸을 뺄 수도, 옆으로 굴릴 수도 없는 지형에서 모든 시야를 채우며 날아드는 매화는 절망 그 자체였다.
그건 괴량에게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혈검단의 단주라 해도 이 검기를 모두 피해 내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괴량은 굳이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덥석!
허리를 젖혀 등 뒤로 손을 뻗은 괴량은 뒤로 밀리는 그를 받아 주기 위해 달려온 혈검단원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밀려드는 매화검기를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집어 던져 버렸다.
“다, 단주!”
괴량은 그에 그치지 않고 악에 받친 손길로 잡히는 이를 모조리 던졌다.
모두 셋.
영문도 모르고 날아드는 매화검기를 막아 낼 고기 방패가 되어 버린 혈검단원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그들의 눈에 피어난 절망의 정체가 공포인지, 아니면 배신감인지는 이제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매화검기가 세 혈검단원들의 전신을 난자했다.
수백 개의 칼날에 저며지는 듯한 고통 앞에서는 지독하게 쌓아 올린 수련조차 무용했다.
휘이이이잉!
또 한 번 바람이 불어오자 세상을 채웠던 매화가 환상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매화가 사라지니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빈 데 없이 몸에 상처를 빼곡히 새긴 혈검단원의 시신 세 구뿐이었다.
“크흐.”
괴량이 나직이 웃음을 흘리며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몸 곳곳에도 깊은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단원들을 방패 삼기는 했지만, 그 셋만으로는 날아드는 매화검기를 모조리 받아 낼 수 없었다.
단원의 몸을 뚫고 들어오는 검기마저도 웬만큼 쳐 냈지만, 그러고도 막아 내지 못한 검기가 그의 몸 곳곳에 상처를 남긴 것이다.
하지만…… 딱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저 화산검협의 몸에 저만한 부상을 입히는 대가로 단원 셋의 목숨과 이 정도 부상이라면 싸게 먹힌 것이니까.
주르륵.
길게 갈라진 청명의 옆구리에선 피가 연신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청명은 무심하게 제 옆구리에 흘끗 시선을 주더니 이내 혈도를 눌러 지혈했다.
한없이 익숙해 보이는 그 움직임이 묘한 섬뜩함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괴량은 청명의 어깨가 미미하게 들썩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숨이 가쁘군.”
호흡이 가쁘다는 건 체력이 달린다는 의미다.
복면 아래 가려진 괴량의 입이 환하게 벌어졌다.
“지칠 대로 지쳤어. 그렇지?”
멀쩡한 청명이었다면 괴량이 제아무리 악랄하게 달려든다 해도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즉, 지금의 청명이 절대 정상이 아니라는 뜻.
범도 아니고 괴물이라 불러야 할 이, 화산검협이 마침내 그의 그물 안에 걸려든 것이다.
아무리 화산검협 청명이라고 해도, 저런 상태로는 절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뚜둑.
괴량은 제 입술을 거칠게 물어뜯어 피를 냈다.
입 안으로 비릿하게 피 맛이 번지자 한껏 달아오른 몸이 어느 정도 식는 느낌이었다.
‘흥분하면 안 되지.’
사냥할 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냉정해야 한다.
그래야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는 쾌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평정을 되찾은 괴량이 화산검협을 향해 턱짓했다.
이럴 때일수록 맹수는 마지막 한 번을 남겨 두는 법이다.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 없다.
“달려들어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혈검단원들이 괴량의 좌우로 치고 나갔다.
다른 동료들이 괴량의 고기 방패가 되어 죽는 꼴을 똑똑히 보았지만, 죽은 이들은 이미 그들의 뇌리에서 지워진 뒤였다.
사파에서, 만인방에서 이런 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니까.
“하아아아압!”
혈검단원들은 처참히 난자된 시신을 뛰어넘으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유이설이 청명을 지키려는 듯 빠르게 앞으로 뛰쳐나갔다.
“물러서. 내가……”
그 순간, 청명이 앞으로 나서는 유이설의 어깨를 잡아채 과격하게 뒤쪽으로 밀쳐 버렸다.
파아아아앗!
유이설의 얼굴에 순간 당혹이 스쳤다.
하지만 이미 발출된 청명의 검은 달려든 혈검단원들의 목을 단숨에 꿰뚫은 뒤였다.
“끄륵…….”
죽어 가면서도 그들의 눈엔 불신이 차올랐다.
‘부, 부상을…….’분명 청명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청명의 검은 처음과 다를 게 없었다.
기대했던 상황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차마 실감하기도 전에 목숨이 쉽게도 끊어졌다.
털썩. 털썩.
그제야 청명이 슬쩍 유이설을 돌아보았다.
“여긴 내 자리야, 사고.”
“너 지금 상태가…….”
청명의 시선은 이미 유이설을 떠나 앞으로 향해 있었다.
유이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청명이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지칠 대로 지쳤다.”
“…….”
“부상을 당해 정상이 아니다.”
“너…….”
“그래서, 그게 왜?”
청명의 입가가 비틀렸다.
피에 젖은 청명의 입술 새로 흰 이가 섬뜩하게 드러났다.
“그게 전쟁이잖아. 안 그래?”
괴량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청명은 제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보기보다 상처가 깊어서인지, 그게 아니면 중독 때문인지, 점혈했음에도 피가 완전히 멎질 않았다.
청명은 상처를 누르려는 듯 제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괴량이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입으로 떠드는 것에 비해 상황이…….”
그 순간, 괴량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치직. 치이이익!
청명의 손이 닿은 상처에서 매캐한 연기가 새어 나왔다.
곧 괴량의 코끝으로 살 타는 냄새가 스쳤다.
복면 아래 괴량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피가 멎질 않으니 열양공을 모은 손으로 상처를 지져서 지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란 말인가.
괴량의 등을 타고 한기가 흘러내렸다.
“됐군.”
상처를 지져 버린 청명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계속하자고.”
검을 쥐고 다가오는 청명을 보며, 괴량의 두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