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3화. 그게 사람이라면 말이야. (3)
평범한 사람은 화산검협을 이해할 수 없다.
저자의 행동 방식은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지극히 짐승 같으니 말이다.
더없는 합리와 어처구니없을 만큼의 야성이 공존한다.
그렇기에 해석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다.
아마 범부(凡夫)는 저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겉으로 내보이는 거야 얼추 맞힐지 모르나, 그 안에 숨은 내밀한 진의에는 누구도 다가갈 수 없다.
그렇다면 호가명은 다른가?
그는 널린 범부들과 달리 그 진의에 접근할 수 있는가?
천만에. 호가명이 생각하기에는 그 자신 역시 범부에 지나지 않았다.
한때는 자신이 가진 재능과 지력이 더없이 특출하다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 헛된 자부심은 벌써 거름통에 처박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예측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 화산검협이 어떻게 움직일지, 어떻게 대응할지, 어떻게 연기할지.
호가명은 그게 자신의 특별함 때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그저 수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인식을 뛰어넘는 존재가,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 비슷하다.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오래도록 부인했지만, 해남에서 청명을 맞닥뜨린 이후로는 결국 인정해야 했다.
저 화산검협은 장일소와 지독할 정도로 닮았다.
그렇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
만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이들을 대동한 장일소가 청명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찌 행동할 것인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문제다.
사람들은 으레 착각하고는 한다.
장일소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발아래 두고 농락하는 이라고.
만인방을 만들고 사패련을 만들고, 강남을 지배하는 일조차도 그에게는 유희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래도록 장일소를 지켜봐 온 호가명이 들었을 때, 이건 전부 개 같은 헛소리다.
장일소는 모든 것에 필사적인 사람이다.
심지어는 행동 하나, 손짓 하나, 내뱉는 말 하나에조차 심혈을 기울인다.
위악을 가장하고 위선을 이용하며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속이고 희생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목적’이라는 피 냄새 풍기는 결과를 쟁취하고 손에 넣는 자다.
장일소가 절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여력을 모두 소진하여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쓰러질 만큼 버거운 순간에도, 심지어는 제 목이 잘려 나갈 위기에서조차도 장일소는 강대한 자신을 연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숱한 위기가 있었다.
절망적이기 이를 데 없던 순간에도 스스로 내보이고자 한 자신을 잃지 않은 결과, 장일소는 여기까지 왔다.
설화를 넘어 전설을 쓰고, 이제는 신앙의 영역까지 오르려 한다.
장일소는 그런 이다. 그렇다면……
그 장일소와 닮은 청명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저 굳건함은, 아무리 들이받아도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보이지 않는 저 강대함은, 무심하게 적을 베어 넘기는 사신 같은 모습은…….
어쩌면 필사적으로 악을 쓴 끝에 만들어 낸 모습이 아닐까?
아군에게든 적에게든 기필코 내보이고 싶은 모습이 아닐까?
장일소가 끝없이 자신을 형상하는 것처럼, 청명 역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치지 않을 리 없지.’
가장 많은 이들과 싸웠다.
가장 많은 내력을 소모했다.
가장 많은 피를 흘렸고, 가장 많은 부담을 버텨 냈다.
저 해남에서 이곳까지, 청명은 그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버텼다.
무너지지 않을 리 없다.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끝없이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무너져도 벌써 무너졌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믿고 있지 않은가.
화산검협은, 청명이라는 놈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동료란 것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를 사냥하려 들던 괴량도, 심지어 이 모든 계획을 세운 호가명조차도 마지막 순간까지 반신반의했다.
신앙과도 닮은 현상이다.
아군과 적군이 모두 의심하지 않는 절대성.
이는 청명이란 놈이 수년 동안 이 강호에 공들여 새긴 찬란한 조각이다.
하지만 지금 호가명은 똑똑히 확인했다.
저 괴물 같은 놈도 그래 봐야 인간이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나약한 인간이다.
호가명이 확신에 쐐기를 박듯 말했다.
“놈은 이미 한계다.”
괴량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호가명을 보며 물었다.
“이유는?”
“발이 끌리는 걸 확인했다.”
“고작 그게 이유인가?”
“충분하지. 과하도록.”
호가명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야생의 짐승은 죽기 직전까지 아픈 티를 내지 않는다. 약자는 죽고 만다는 걸 본능적으로 잘 아니까.”
“…….”
“짐승은 아니지만, 결국 놈도 다를 바 없지. 놈은 강대해야 한다.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 언제나 태연하고 굳건하게 버텨 낼 수 있어야만 하지. 그런데도 그걸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호가명이 단언하듯 말했다.
“그건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거고.”
괴량의 눈길에 살짝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는 청명을 다시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선뜻 납득되진 않았다.
청명은 처음 보았을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무자비하고 괴물 같았다.
게다가 놈이 만들어 내는 광경도 처음과 다르지 않다.
만인방도들은 달려드는 족족 베여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치를 따져 보면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숨을 돌릴 틈이나 있었을까?
잠을 자는 건 고사하고 운기할 시간도 제대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저 검에 죽어 간 이가 벌써 몇인가?
잘 벼려진 낫으로 움직이지 않는 벼를 베어 내는 손쉬운 일조차 하루 종일 반복하면 중노동이 된다.
그런데 사람을 베어 내는 일을 며칠 동안 쉬지도 않고 반복했는데 지치지 않는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그건 결단코 불가능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인방이 단 한 번의 전투 없이도 며칠이 걸려 주파한 거리를 싸우고, 또 싸우며, 심지어 제 뒤를 따르는 이들을 보호하며 이동했다.
그럼에도 괴량은 호가명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저 청명이라는 놈이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군.”
“자책할 것 없다. 네가 멍청한 게 아니라 놈이 대단한 거니까.”
괴량은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혀로 슬쩍 축였다.
솔직히 아직도 확신은 없다.
머리로 이해한 것과 눈으로 보고 느끼는 광경에 큰 괴리가 있어서다.
‘군사의 말이라.’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독심나찰 호가명의 말이다.
그 정도라면 걸어 볼 만하지 않은가?
“뭘 망설이고 있지?”
“……음?”
“밥값은 해야지.”
호가명의 말에 괴량은 그만 웃어 버렸다.
솔직히 이건 그의 취향과 멀다.
괴량은 본래 조금 더 느긋한 사냥을 선호한다.
상처투성이의 사냥감이 더 이상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일 때, 그 모습을 즐겁게 감상하고 뜸을 들여 가며 숨통을 끊어 놓는 쪽이 좋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힘이 남은 사냥감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을 때의 떨림 역시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다.
“명이시라면, 기꺼이.”
그리고 어차피 이 협곡에서 곱게 내보내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숨통을 끊기 위한 싸움이냐, 상처를 입히기 위한 싸움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스르르릉.
괴량의 검이 뽑혀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혈검단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뒤로 바짝 다가섰다.
“그 전에 하나 묻지.”
괴량의 말에 호가명이 못마땅한 얼굴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명백히 보였다.
하지만 괴량은 이를 알면서도 굳이 다시 물었다.
“목표는?”
“뻔한 소리.”
호가명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꽂혔다.
“화산검협. 저놈 하나만 처리할 수 있다면 다른 놈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깔끔하군.”
괴량이 진득한 미소를 흘리며 협곡을 향해 발을 옮겼다.
“이행하도록 하지.”
그의 발이 땅을 박찼다.
앞에 빽빽이 서 있는 이들의 어깨를 연이어 밟으며 한 줄기 유성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솔직히 선호하는 지형은 아니다.
뒤를 쫓는 이에게 외길은 부담스럽다.
쫓기는 이가 쫓아오는 이의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이런 곳에서는 확실히 득보다 실이 더 많다.
게다가 단단한 바위로 둘러싸인 이런 지형에서는 혈검단의 장기인, 상리(常理)에서 벗어난 공격도 활용할 수 없다.
그러니 남는 것은 그저 힘으로써 부딪치는 것뿐.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명확해지겠지.’
괴량의 몸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좌우로 보이는 좁은 협곡의 형상이 제멋대로 이지러졌다.
그 뒤틀린 세상 속에서, 정면에 있는 청명의 모습만이 또렷하고 확연했다.
쇄애애애애애애액!
만인방도의 몸을 단번에 갈라 내고 있던 청명의 서늘한 눈과 들끓는 듯한 괴량의 눈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화산검협!”
파아아앗!
괴량의 검이 대기를 가르며 청명을 향해 쇄도했다.
가공할 속도. 그리고 그 속도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거력이 실린 일검이었다.
청명은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땅을 내밟았다.
그리고 날아드는 괴량의 검을 강력하게 후려쳤다.
카아아아아아아앙!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폭음같이 터졌다.
두 검에 어린 붉고 푸른 검기가 마치 폭죽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핫!”
괴량의 두 눈에 뭐라 설명하기 힘든 열기가 피어났다.
손목에 느껴지는 강렬한 감각.
이건 그가 노리는 사냥감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의미일 터.
하지만 괴량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연이어 검격을 펼쳤다.
파라라락!
예리하고 날카로운 세검이 낭창낭창 휘어지며 수십 마리의 독사 떼처럼 청명을 노렸다.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전신을 물어뜯어 오는 검격이다.
이에 맞서 청명의 검 역시 수십 줄기의 검영을 뿜었다.
영활하게 꿈틀대는 괴량의 검과 쾌속하고 직선적인 청명의 검의 첨단이 고작 숨 한 번 겨우 내쉴 짧은 시간 동안 허공에서 수십 차례 충돌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강!
수백 개의 쇠구슬이 연이어 철판을 강타하는 듯한 소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검격 하나하나에 반드시 상대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필사의 의지와 살기가 넘쳤다.
콰가가가각!
둘의 검영이 얽혀드는 순간, 달려들었던 괴량의 몸이 뒤쪽으로 훅 밀려났다.
암향매화검에 실린 힘을 세검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파아아앗!
날아든 청명의 검이 괴량의 눈 아래부터 귓불까지 길게 긋고 지나갔다.
귓불 아래가 잘려 나가며 피가 방울방울 솟구쳤다.
하지만 그 순간 괴량의 검세가 일변했다.
순간적으로 막대한 내력을 담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친 것이다.
청명은 지지 않고 떨어지는 검을 맞받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내력과 내력이 정면으로 충돌했고,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졌다.
갑작스레 인 폭풍에 휩쓸린 이들이 뒤로 튕겨 나뒹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가공할 충격의 한중간에 선 둘은 한 치도 물러서는 일 없이 팽팽하게 상대 견제하고 검을 밀었다.
가각! 가가각가가가가각!
검과 검이 긁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드드득!
그러나 두 사람의 귀에 더 선명한 건, 검을 힘껏 쥔 손이 비틀리며 나는 소리였다.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미는 검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맹렬히 부딪쳤다.
“큭큭.”
청명을 내리누르는 듯하던 괴량의 시선이 순간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히, 청명의 다리를 향해서.
청명의 무복이 계속해서 젖어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안에서부터 피가 솟는 것이다.
“큭큭큭큭. 그 다리…….”
괴량의 두 눈에 득의의 빛이 차올랐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 같은데?”
“…….”
“응? 화산검협!”
콰아앙!괴량은 청명의 다친 다리 쪽으로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내리눌렀다.
그러자 청명의 몸이 순간 휘청이며 뒤로 튕겼다.
얼굴 반쪽이 피로 젖은 괴량이 광소를 터뜨리며 쇄도했다.
상처 입은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 같은 기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