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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22화 (1,323/1,567)

1322화. 그게 사람이라면 말이야. (2)

쿠르르르릉!

협곡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수천 년을 버텨 온 협곡은 그 정도 충격으로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이 정도 충격으로 무너질 협곡이었다면 지금까지 버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미리 절벽에 구멍을 뚫어 그 안에서 폭발을 일으킨다면 모를까.

그러나 만인방의 입장에선 협곡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안도할 만한 상황은 당연히 아니었다.

자욱하게 일었던 흙먼지와 연기가 바람을 타고 밀려 나가자 육편이 되어 버린 방도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광기에 젖어 달려들던 이들조차도 순간적으로 주춤 발을 멈출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으…….”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으아아아아아악!”

마음에 차오르는 불안과 껄끄러움을 떨쳐 내기 위해서, 그들은 더욱더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내달렸다.

그저 앞으로, 또 앞으로.

찰박!

피로 물들다 못해 웅덩이가 생긴 땅을 밟는다.

발에 묻어 오는 끈적한 무언가가 마치 원념처럼 느껴졌지만, 이곳은 전장이다.

그런 감상 따윌 이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퇴로가 없는 건 오히려 만인방 쪽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오직 달려들어 적을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건 다름 아닌 청명이었다.

파아아앗!

뒤로 몸을 날린 청명이 달려드는 이들의 목을 연이어 베었다.

도를 휘두르면 도를 쳐 내고, 발목을 잡으려 하면 손목이 잘려 나간다.

내력을 끌어 올려 검격을 버텨 내려 하면 그 내력이 파괴되고, 몸을 비틀어 피해 내려 하면 이미 몸을 뺄 곳을 선점하여 급소를 꿰뚫는다.

그건 절망이라는 이름의 철벽이었다.

옆의 동료가 죽어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억눌린 듯한 신음과 날붙이로 살을 찢어 비트는 소리.

그 소리가 두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확연히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그럼에도 뒤는 없다. 돌아갈 곳 따윈 애초에 없었으니까.

“죽어라아아아앗!”

도는 단순하다.

이리저리 잴 거라면 차라리 창이나 검을 드는 쪽이 낫다.

도란 자신의 힘을 있는 대로 실어 상대를 양단할 기세로 휘둘러야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병기니까.

한 만인방도의 손에 들린 도가 목적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참격을 내뿜었다.

콰아아아아아아!

단전에서 끌어 올려진 내력이 팔을 터뜨리기라도 할 듯 밀고 나가 도 끝에 들이차는 감각.

몸 안의 무언가를 강제로 잡아 뽑는 듯한, 고통과 쾌감이 뒤섞인 그 감각이 머릿속에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이 이상의 일도는 없다는 확신이 전신을 지배했다.

한계까지 내몰린 끝에 뽑은 일도는 그 생을 모두 담아 낸 것처럼 찬란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넘은 일도조차도 앞을 막아선 냉혈한 검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도격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 도격을 막기 위해 뻗어지는 검은 그 도에 비해 한없이 미력해 보였다.

한 자가 넘는 도기를 뿜어내는 도에 비해 검 주변의 붉은 검기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기만 했다.

누군가가 본다면, 당연히 저 검이 도를 감당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고 말할 것이다.

닿는 순간 속절없이 튕겨 나가고 말 거라고.

하지만 그 검에 담긴 묘리는 당연한 예측과 이치를 모조리 부순다.

가카가각!

검과 도가 맞부딪친 순간 검이 미세하게 비틀렸다.

압도적인 무게와 힘을 싣고 내리쳐졌던 도는 검의 날이 아닌 면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카가가가가각!

전력으로 내리친 도가 검신을 타고 흐르는 그 짧은 시간.

그 시간을 수십으로 나누기라도 한 듯, 검이 또다시 비틀리기를 거듭해 이내 도의 방향을 급격하게 틀었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한계를 넘은 일격은 삽시간에 만인방도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 순간 청명의 좌수가 빛살처럼 만인방도의 날갯죽지를 강타했다.

이미 도에 딸려 가며 옆으로 틀어졌던 몸이 강제로 돌아갔다.

땅에 처박혀 멈춰야 했던 도격 역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뻗어 나갔다.

그의 등 뒤에서 달려오던 동료들에게로 말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세차다는 말로도 부족한 도격이 뒤따르던 이들을 단번에 휩쓸었다.

상상도 못 한 공격을 잽싸게 대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허리가 양단된 이들이 못 믿겠단 얼굴로 튕겨 나갔다.

“어…….”

졸지에 이 참상을 만들어 낸 만인방도의 입에서 순간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죽은 이에게는 죄책감도 허락되질 않으니.

푸욱!

그는 제 가슴을 뚫고 삐죽이 튀어나온 검 끝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우습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양단해 버린 시체들을 쳐 날리며 그의 동료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기세가 놀라웠지만, 그는 그들의 눈빛 속에 채 다스리지 못한 공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서걱!

그때 검이 가슴을 빠져나가며 몸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그 몸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그를 타 넘은 이들이 청명을 향해 맹렬하게 도를 휘둘렀다.

“죽어라아아아아!”

“제발!”

청명의 서늘한 눈빛이 주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본심을 내뱉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절벽을 타고 오른 이들이 청명의 머리 위로 강하했다.

정면만으로 안 된다면 공격하는 이들의 수라도 늘리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몸을 허공에 띄워 올렸던 이들이 직면한 것은, 피할 데 없는 곳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참혹한 대가였다.

쇄애애애애액!

당패의 비도가 날아와 만인방도들의 몸에 족족 박혔다.

그 비도를 가까스로 쳐 낸 이도 있었으나, 이들에겐 조용히 환상처럼 날아드는 유이설의 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걱! 서걱! 서걱!

전신의 곳곳이 베여 나가며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유이설의 눈은 차분했다.

어렵지 않다.

광기에 휩싸여 과격하게 달려드는 이들은 얼핏 위협적이지만, 이는 결국 다시 말해 평소처럼 정교하지 못하다는 것과도 같다.

그녀의 검은 격정에 몸을 맡긴 채 대책 없이 달려드는 이들을 놓칠 만큼 허술하지 않다.

달려드는 이들이 몇이든,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다.

이 과정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을 만큼 수월한 이유를 유이설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파아아아앗!

정면에서 달려들던 이들의 목이 단숨에 꿰뚫렸다.

강하게 뻗어진 검이 쾌속하게 회수되고, 이내 다시 날아드는 것들을 일말의 낭비도 없이 막아 낸다.

오싹하다.

웬만해서는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는 일이 없는 유이설이지만, 저 검은 그런 그녀조차도 한기를 느낄 만큼 서늘했다.

사람이란 결국 감정적인 동물이 아닌가.

이상에 가까운 검을 구현코자 노력하는 것이 검수라지만, 인간인 이상 그 검에는 감정의 편린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흥분한 이들이 휘두르는 검은 격하고, 겁을 먹은 이들이 휘두르는 검은 떨리는 것이다.

하지만 청명의 검에서는 그런 감정이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휘둘러야 하는 곳으로 휘둘러질 뿐이다.

위화감이 들 정도로 일정하다.

전장이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모든 것들이 터져 나오는 곳이다.

그 광기의 여파는 천하의 유이설마저 뒤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청명은 어떻게 저리 고요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을까?

문득 유이설은 저 검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슬픔과 청명은 어울리지 않고, 심지어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지만 어쩐지 그랬다.

파아아아아앗!

달려드는 이의 심장을 가차 없이 갈라 낸 청명은 검을 뽑았다.

붉은 피가 청명의 뺨으로 후두둑 튀었다.

유이설은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할 수 있어.’

막아 낼 수 있다. 이대로라면 이 협곡이 끝날 때까지 저들을 막아 낼 수 있다.

일천이 아니라 일만이 달려든다고 한들, 저 청명이 뚫릴 리 없으니까.

하지만……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적을 베어 내는 청명의 어깨를 넘어 협곡의 끝에 가 닿았다.

저 끝에 있는 이가 이곳의 모두를 움직이고 있다.

만인방을 넘어 사패련의 군사로 불리는 독심나찰 호가명.

저자가 정말로 그 사실을 모르고 이곳으로 왔을 것인가?

유이설의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뱀처럼 냉한 호가명의 눈빛이 그들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난공불락이군.”

괴량은 결국 어이가 없어 웃어 버렸다.

“공격과 수비는 일견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인데 말이야.”

그 말에는 호가명도 동의했다.

그가 본 청명은 지독한 창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상대의 방어를 뚫고 심장을 꿰고 마는, 막을 수 없는 창.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를 강제로 부수어 뚫는다.

모순을 파괴하는 창이었다.

한데 그 창이 상대의 공세까지 완벽하게 막아 낸다니.

이건 현실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검이란 더없이 섬세하다.

그래서 달려들 때와 물러날 때는 힘의 배분부터 내력의 운용까지 모든 부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청명은 그 모든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다.

괴량이 제 턱을 조금 신경질적으로 긁적였다.

그들은 추격하는 쪽이다.

설사 이 협곡을 빠져나간다고 한들, 저들을 추적할 시간은 지루할 정도로 남아 있다.

병력? 병력은 과하다 못해 넘쳐난다.

설사 이 협곡이 돌연 붕괴해 모두를 잃는다고 해도,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남아 있다.

심지어 만인방 한 곳만을 따져도 그렇다.

게다가 그 남은 인원들 중에는 이곳에 동원된 이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들이 수두룩하다.

당장 만인방을 상징하는 홍견도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고, 단급의 무인들도 이곳에 동행한 혈검단 외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쫓고 있는 자니까.하지만 괴량은 지금 초조함을 느꼈다.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극심히 초조했다.

사냥꾼의 입장임에도 되레 목이 죄이는 듯한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괴량이 살짝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쯤 되면 그 과한 경계심을 이해할 수밖에 없군.”

호가명이 무심한 눈으로 괴량을 슬쩍 보았다.

괴량이 입 안 살을 잘근거리며 말했다.

“보이지 않아서지?”

“……그렇다.”

뜬구름을 잡는 듯한 대화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

그 끝이 어디인지.

이건 강함이나 무학의 한계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본디 사냥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이해다.

사슴을 사냥하는 이는 사슴의 습성을 알아야 하고, 범을 사냥하는 이는 범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냥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목숨이 위험해지고 마니까.

하지만 저놈은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파악했다고 생각하면 또 새로운 면이 튀어나온다.

한 사람 안에 공존해서는 안 될 부분들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고,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모호한 안개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춘다.

그러니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할지, 무슨 일을 저지를지.

그리하여 결국엔 그 불확실성이 사패련조차 집어삼킬까 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무의미하군. 이곳은 지형이 좋지 않아.”

호가명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적의 체력이라도 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래서야 의미 없는 희생만 늘릴 뿐이지. 저놈은 이 정도로 지치지 않는다는 걸 잘 알 텐데?”

괴량이 사람의 목숨을 대단하게 여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용(可用)전력을 쓸데없이 낭비할 필요도 없다.

대답하지 않는 호가명을 향해 괴량이 다시 한마디 하려는 찰나였다.

“완벽이라…….”

“음?”

“그래, 완벽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완벽하다 해서 죽일 수 없는 건 아니지 않나.”

“…….”

“그게 사람이라면 말이야.”

순간 호가명의 두 눈이 섬뜩한 광망을 흘렸다.

그의 서늘한 시선은 청명의 오른쪽 다리에 꽂혀 있었다.

청명이 앞으로 나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 하나만을 보고 있었던 호가명의 눈에 드디어 보이고 만 것이다.

청명의 오른발이 한순간 미세하게 끌리는 광경이.

“너도 결국 사람이로군, 화산검협.”

그의 얼굴에 득의에 찬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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