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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21화 (1,322/1,567)

1321화. 그게 사람이라면 말이야. (1)

“더 빨리 달려라! 더!”

금양백은 목구멍으로 치솟는 핏덩이를 꾹 삼키며 장로들의 등을 떠밀었다.

수십 년, 무학 하나에 생을 바친 이들이 제자들의 속도에 맞춰 달리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다.

‘대체 얼마나 지독한 독이기에…….’

독은 당연히 위험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이들에게는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니다.

어떠한 독이라고 해도 제 몸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배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강호의 상식이자, 그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론이다.

하지만 이 지옥 같은 전장에서는 알아 왔던 상식 중 무엇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내력으로 독을 다스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싸워야 하는 전장에서 제 내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이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적이 악을 쓰고 칼을 날려 대는데 대체 어느 틈에 운기를 하란 말인가?

달리면서 운공을 할 수 있는 동공(動功)의 영역에 오른다면 또 모르지만, 해남에는 그 영역에 도달한 이가 없다.

동공의 영역은 단순히 무력이 높아진다 해서 진입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쿨럭!”

“이장로!”

금양백이 허물어지는 장로의 어깨를 얼른 움켜잡았다.

그가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고꾸라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괜찮은가?”

“괘, 괜찮습……. 쿨럭!”

이장로의 입에서 다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독이 돌 때 격하게 움직이면 중독이 심화된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그저 달릴 수밖에.

금양백은 이를 악물었다.

과연 이 중 몇이나 독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이 상황에서 적들이 덮쳐 온다면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카아아아앙!

그 순간, 금속을 긁어내는 듯한 강한 소음이 들려왔다.

황급히 돌아보니 도가 회전하며 허공으로 치솟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함께 치솟고 있는 사람의 머리도.

‘화산검협!’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드는 이들을 청명이 철벽처럼 막아서고 있었다.

파아아아앗!

내뻗어진 검이 팔꿈치 안쪽을 예리하게 갈랐다.

그 바람에 통제를 벗어난 도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상대의 팔을 반쯤 끊어 버린 검이 단번에 만인방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커억…….”

콰드득!

박혀 든 검이 회전했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여력으로 어떻게든 해보려 시도하기도 전에, 회전한 검이 만인방도의 심맥을 모조리 끊고 내부를 산산조각 내었다.

반격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살검(殺劍).

청명의 검에는 낭비가 없다.

하지만 또 동시에 청명의 검은 지독하게도 낭비가 많다.

무학의 관점으로 볼 때 상대를 찔러 가며 팔을 베어 내고, 심장에 박아 넣은 검을 뒤트는 등의 과정은 하등 쓸모없는 잡동작에 불과하다.

상대의 급소에 빠르고 정확하게 일격을 가하는 것이 무학의 이상이라면, 지금 청명의 검은 그 이상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있는 것이다.

하나, 역설적으로 그 쓸모없는 낭비가 청명의 검을 더없이 효율적이게끔 했다.

화산의 어떤 교본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청명만이 사용하는 검이 다가오는 적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내고 있었다.

“흐아아아아아아!”

그러나 만인방도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화산검협에게 다가가는 이들은 모조리 고혼이 되고 있음에도, 달려드는 만인방도의 경공에는 일말의 주저조차 찾아볼 수 없다.

콰드득!

흉부를 관통당한 이가 순간적으로 제 가슴에 박힌 암향매화검을 도로 내리쳤다.

쾅!

단연코 미친 짓거리다.

박혀 든 검이 도에 실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푹 꺼졌다.

당연히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는 중상이 발생하며 내장이 단번에 잘려 나갔다.

자해에 가까운 행위지만, 그 대가로 청명의 검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자 달려들던 만인방도들이 다리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땅을 박찼다.

“죽어라아아아아아아아!”

검수의 검이 봉쇄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설명조차 필요 없다.

하지만 청명의 대응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파아아앗!

청명이 아래로 처진 검을 그 기세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악!

검이 몸을 완전히 뚫고 나와 땅에 박혀 드는 순간, 청명의 좌수가 섬전 같은 속도로 뻗으며 제 검의 손잡이를 강타했다.

콰아앙!

그러자 검의 손잡이가 근거리에서 발사된 포탄처럼 앞에 있던 만인방도를 후려쳐 날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달려들던 이들이 순간 움찔했다.

피한다? 아니면 그대로 뚫어 낸다?

아니, 결정이 무엇이든 다를 게 없다.

한순간이라도 주춤한 순간부터 그들이 맞이할 결말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타아아앙!

탄성 높은 나무를 잔뜩 당겼다 놓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녹빛을 띤 장력이 만인방도들을 연이어 강타했다.

죽엽수(竹葉手).

변(變)과 환(幻)을 중점으로 삼는 화산답지 않게 쾌(快)와 강(强)의 묘리를 살린 장력이다.

더없이 실전적인 장력이 달려드는 이들을 저지했다.

휘릭.

청명은 곧장 땅에 박혔던 검을 걷어차 올리고 허공에서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내질렀다.

파아아아아앗!

검이 가공할 속도로 날아들자 만인방도 하나가 엉겁결에 도를 휘둘러 쳐 낸다.

아니, 쳐 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뚝!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날아들던 검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뭣?’

도를 휘두르려던 만인방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 멈춰…….’

하지만 이미 전력을 다해 휘둘러 버린 도는 이제 와 멈출 수가 없었다.

검을 막기 위해 휘둘렀던 도는 검을 지나쳐 옆으로 점차 뻗어 나갔다.

그의 도를 포함하여 모든 세상이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건만, 저 검만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미동조차 없이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파아아앗!

그 순간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멈춰 섰던 검이 처음 날아오던 속도 그대로 움직였고, 도가 허무하게 가르고 지나간 바로 그 공간에 내질러졌다.

모든 것을 빤히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만인방도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을 서늘하게 바라보는 청명의 눈빛을 뇌리에 아로새겼다.

콰득!

검이 목을 꿰뚫는 순간 작열감 같은 게 퍼졌다.

직선으로 목을 뚫고 들어간 검은 이내 횡으로 그어지며 달려들던 다른 이의 목까지 한 번에 갈랐다.

만인방도들의 공세는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하나의 도는 청명의 검을 향해 날아들었고, 또 하나의 도는 청명의 상체를 향해 내질러졌다.

아무리 화산검협이 절정의 검수라 해도, 검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

수두룩한 전투 속에서 자신보다 강한 이들을 수도 없이 쓰러뜨려 온 이들이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청명 역시 지금껏 그들이 상대해 왔던 평범한 고수가 아니다.

청명이 자신의 검과 맞부딪혀 오는 도를 피하기는커녕, 되레 주저 없는 강격을 날렸다.

카아아앙!

귀를 찢는 금속음과 함께, 날아들던 도가 도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 틈을 타 새파란 도기를 뿜어 대는 도가 청명의 상체를 향해 가공할 속도로 쏘아졌다.

청명이 지체 없이 몸을 뒤로 날렸지만, 뒤로 몸을 빼는 속도가 도를 찌르는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잡았…….’

도를 내지른 만인방도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려는 순간, 뒤로 물러나던 청명이 제 가슴에 거의 맞닿은 도를 향해 빠르게 손을 뻗었다.

덥석!

그러더니 도의 날을 맨손으로 잡아챘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란 만인방도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손으로 잡는다고? 도기가 어린 도를?

아무리 손에 내기가 실려 있다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누가 칼 같은 걸 들겠는가?

하지만 생각을 더 이을 틈 따윈 없었다.

자유를 되찾은 검이 만인방도의 목을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패애애애앵!

아마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일격에 말끔히 목이 잘려 나간 만인방도는 앞으로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엎어졌다.

콰앙!

청명은 그 몸뚱이를 발로 차서 걷어내며 곧장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카캉! 캉!

한 쌍을 이룬 것처럼 날아들던 두 개의 도 사이로 검이 빠르게 왕복했다.

마치 양손으로 문을 잡아 여는 듯이 검으로 도를 비틀었다.

그리고 청명의 좌수는 붉은 장력을 연이어 내뿜었다.

절정에 달한 매화산수(梅花散手).

단풍처럼 붉게 물든 장력이 균형을 잃은 만인방도의 옆구리에 연이어 작렬했다.

“으아아아아악!”

갈비뼈가 모조리 으스러지고 단전까지 뒤흔들린다.

매화산수에 직격당한 그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과에 도달하기 직전, 마지막 힘을 짜내 도를 휘둘렀다.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가 광속으로 날아들어 그의 이마에 박혔다.

콰득!

“끄으윽…….”

이마에 비수가 박히는 바람에 도를 내리치지도 못하고 허물어졌다.

청명은 마치 이 결과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이미 다른 이들에게로 옮겨 가 바람구멍을 뚫고 있었다.

푸욱! 푸욱! 푸욱! 푸욱!

“끄아아아아악!”

목이나 심장이 뚫린 이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지만, 복부나 어깨를 뚫린 이는 그 질긴 숨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반격해 왔다.

청명의 검은 아직 뻗어진 채 회수되지 않은 상황.

설사 등 뒤에서 날아든 검이 목을 베어 낸다고 하더라도 이 일격만은 박아 넣는다는 각오로 도를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해야 할 건 청명뿐만이 아니었다.

스슷!

청명의 옆구리 근처에서 뻗어 나온 검이 달려들던 이의 목을 단숨에 그었다.

청명의 지독한 쾌검과는 다르다.

더없이 부드럽지만 또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검격.

경동맥이 말끔히 잘린 이의 목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흰빛을 띤 검신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유이설은 동요는커녕 그런 일조차 없었다는 듯 빠르게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도자아아아앙!”

당패의 입에서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날아드는 걸 발견한 것이다.

진천뢰!

당패의 독장을 역류시켜 해남 장로들을 모조리 중독시켜 버린 그 저주받은 기물이 청명의 머리 위로 날아들고 있었다.

저게 터진다면 아무리 청명이라도…….하지만 그 순간 당패는 보았다.

마치 환상처럼 피어난 무수한 붉은 꽃잎이 화탄을 마중하듯 뻗어 나가 그 주위를 부드럽게 감싸는 광경을 말이다.

“아…….”

그 꿈결 같은 광경에 당패는 순간 모든 현실과 상황을 잊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런 그를 현실로 되돌린 건 다름 아닌 청명의 무심한 목소리였다.

“미안하지만…….”

당패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청명에게 꽂혔다.

보이는 건 뒷모습뿐이지만 알 것 같았다.

지금 청명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사파가 주는 선물은 안 받아.”

파아앗!

매화 잎에 감싸였던 화탄이 날아들던 속도보다 배는 더 빠르게 도로 튕겨 나갔다.

머리 위로 화탄이 날아드는 것을 본 만인방도들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개미 떼처럼 달려들던 만인방도들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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