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320화 (1,321/1,567)

1320화. 지옥을 본 적은 있고? (5)

“사숙! 뒤가……!”

“알아!”

“뒤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숙!”

“안다니까!”

당황하여 외치던 조걸이 백천의 호통에 움찔했다.

백천은 그 와중에도 단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검을 펼치고 있었다.

파하아앗!

검첨(劍尖)에서 쏟아져 나온 검기가 앞을 가로막은 적들을 일거에 휩쓸었다.

“아아아아악!”

뒤쪽에서 펼쳐진 어마어마한 광경에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졌던 사패련의 무인들은 백천의 검기에 속절없이 휩쓸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밀고 나가라!”

“하지만……!”

“닥치고 앞에 집중하라고 하지 않느냐!”

백천이 무섭게 일갈했다.

조걸의 검이 살짝 떨렸다.

“어차피 우리가 못 뚫으면 모두 죽는다! 한두 사람 더 살리는 게 끝이 아니야!”

백천의 그 말을 듣고서야 조걸의 눈에 단호한 빛이 어렸다.

“으아압!”

쇄애애애액!

쾌속한 검이 주춤주춤 물러나던 이들을 연이어 깔끔하게 꿰뚫었다.

“아아아아악!”

파앗!

땅을 힘껏 박차며 나섰다.

조걸의 검이 수십 개의 검영을 일시에 만들어 냈다.

협곡을 가득 채우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쏘아진 검영은 적들을 향해 매섭게 날아들었다.

조걸이 다소 흥분한 게 보인 그 순간, 윤종이 귀신같이 그를 타 넘어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의 검이 분분히 물러나던 이들을 단번에 밀쳐 냈다.

백천이 그들의 각오를 다져 주었다.

“뒤가 걱정되면 오히려 전력으로 길을 열어라! 우리가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예, 사숙!”

윤종과 조걸이 기세를 더해 앞으로 치고 나갔다.

“비켜라, 이 개자식들아!”

파죽지세.

막아서는 이가 없는 협곡을 지나가는 듯한 속도다.

하지만 그 속도조차 지금 이들에게는 더없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마음은 이미 모두를 이끌고 저만치 달려가 있으니 그럴 만했다.

백천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시선을 앞으로만 고정한 채 자신을 스스로 꾸짖었다.

‘돌아보지 마!’

당장이라도 뒤로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지금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더없이 명확하다.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드는 것은 과욕이고 오만이다.

‘뒤는 맡긴다!’

백천은 거세게 검을 떨치는 걸로 자신의 의지를 뒤로 전했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려진다.

뒤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무엇을 보고 있을지.

언제나 그가 봐 왔던, 그의 앞에 서 있던 작은 등.그 작은 등이 모두를 굳건히 지켜 내고 있을 것이다.

“멍하니 보고 있지 말고 따라붙으십시오!”

백천의 외침에 해남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서!”

곧이어 이를 악문 해남의 제자들이 조걸과 윤종이 열어젖힌 길을 따라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냉랭하게 가라앉은 청명의 눈이 만인방도들을 압박한다.

그래서인지 폭급한 만인방도들도 으르렁댈 뿐, 쉽사리 청명을 향해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청명이 그들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녹림왕.”

“예.”

“장로 아저씨들 뒤쪽으로 보내.”

“알겠습니다.”

“저 늘어진 문어 대가리도.”

“……그러죠.”

하지만 대답을 하고도 임소병은 잠시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청명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별…….”

그 시선을 느낀 청명이 작게 웃었다.

“왜, 여기서 내가 뒈질 각오라도 했을까 봐?”

“……그런 건 아니지만…….”

“아서라. 나는 내 목숨이 얼마나 귀한지 아는 사람이야.”

“…….”

“그리고 저런 놈들을 상대로는 옥쇄까지 각오할 것도 없어. 그저…….”

잠시 말끝을 흐린 청명이 피식 웃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쉽다.

“당패.”

청명의 부름에 당패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당패의 얼굴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러 버렸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힐난은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다.

하지만 청명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을 듣게 되면 그땐 정말로 무너지고 말 것 같았다.

결국 그게 당가의 한계라는 말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제발 그 비참한 말만은 나오지 않기를, 당패는 바라고 또 바랐다.

그때 청명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파아아앗!

작은 동산처럼 수북하게 쌓인 시체 더미 속에서 무언가가 맹렬한 속도로 뽑혀 나왔다.

청명은 그걸 낚아채선 뒤쪽에 있는 당패를 향해 툭 던져 주었다.

“어…….”

엉겁결에 받은 당패는 멍하니 제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청명이 건넨 건, 격한 전투 중에 미처 회수하지 못한 비도들이었다.

“내 뒤로 붙어.”

“……예?”

“내 뒤를 지키라고.”

놀라운 그 말에 당패의 눈은 서서히 커졌다.

그러니까 지금…….

“왜? 못 해?”

“아, 아닙니다! 아직 여력이 있습니다!”

독장을 날릴 엄두는 나지 않지만, 비도는 얼마든지 날릴 수 있다.

최절초만 써 대지 않는다면 내력의 소모가 적다는 것이 비도의 장점이 아니던가?

“하지만 제가…….”

청명에게 도움이 될까? 이런 상황에서?

그 물음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하지만 청명은 당패가 삼킨 그 말을 짐작한 모양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설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지금은 익숙한 게 필요하거든.”

익숙한 것?

당패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청명이 말을 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 부족한 건 알아서 채워 줄 거야.”

“예? 그건 또 뭔…….”

다행히 이번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주 빠르게 알 수 있었다.

저벅.

당패의 옆에서 아주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표정이랄 게 없이 냉한 유이설이 그곳에 서 있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처음부터 여기였다는 듯이.

유이설은 나직이 말했다.

“앞으로 나서지 마세요.”

“……예?”

그 뜬금없는 말에 당패가 되물었다.

유이설은 간단하게 답했다.

“이미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당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역할은 비도로 견제하는 것이다.

그러니 역할을 벗어나 과하게 나서면 방해만 될 것이다.

유이설의 말이야 충분히 이해했지만, 당패는 그렇다고 적당히 할 생각 따윈 없었다.

두 눈에 필사의 각오가 넘실거렸다.

그는 비도를 쥔 손에 콱 힘을 주었다.

‘모든 걸 다 쏟아 낸다.’

그게 그를 믿어 준 이를 향한 최소한의 도리일 터!

“움직이십시오!”

임소병은 그제야 안심하고 장로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몇몇 장로들이 발을 떼려다 피를 토했지만, 임소병은 한없이 냉정하게 소리쳤다.

“가다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움직여, 당장!”

장로들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높은 내력이 버티게 해 주고는 있지만, 이러다 언제 갑자기 쓰러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움직여야 한다. 살아 있으니까. 아직 죽은 게 아니니까.

힘이 다해서 거꾸러지는 순간까지는 발버둥 쳐야 한다.

임소병은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킨 혜연을 부축해 짊어진 채 뒤를 돌아보았다.

“먼저 갑니다! 늦지 말고 따라오십시오!”

“잔소리는.”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임소병은 매섭게 그를 한번 쏘아보고는 멀어졌다.

이제 청명의 뒤에는 유이설과 당패만이 남았다.

청명은 묘한 기분에 웃었다.

‘솔직히 그렇게 익숙한 상황은 아니지.’

뚫고 나가는 건 수없이 해 봤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물러나는 건 아무래도 영 체질에 맞지 않는다.

예전에야 이런 건 대신 해 줄 이가 널려 있었으니 그는 저 한중간으로 뛰어들어 난장이나 치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그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피곤한 거야.”

“어려, 아직.”

“예이, 예이.”

너스레를 떠는 말투와는 달리 청명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적들이 그들을 완전히 덮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운기를 할 여유가 없는 이상, 중독이 심해질 때까지 적당히 시간을 끌며 기다리는 것이 더 이득이다.

그 사실을 아는 호가명이 명을 안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는 아니다.

“자…….”

청명이 한쪽 발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 대치가 영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굳이 길게 끌 필요는 없지.

등을 보인 사냥감에게도 달려들지 않던 맹수가 이를 드러내는 순간이 언제인지 청명은 알고 있다.

“시작하자고.”

그 발이 앞이 아닌 뒤쪽, 명백히 물러나는 방향으로 내려진 순간.

“크하아아아아아앗!”

팽팽하게 당겨졌던 목줄이 끊어진 것처럼, 자세를 낮추고 있던 만인방도들이 일제히 청명을 향해 가열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억지로 꾹꾹 눌러 온 것이 일시에 터지듯 어마어마한 살기가 청명을 덮쳤다.

그 오싹한 살기 속에서 청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암향매화검에 내력을 한껏 불어넣었다.

검을 쥔 쪽의 팔 근육이 약동하고, 피가 맹렬하게 전신을 타고 돌았다.

만인방도들이 악을 쓰며 도를 휘둘러 온다.

정면에 셋, 그리고 머리 위에 둘!

위아래로 동시에 날아드는 도는 마치 거대한 입을 쩍 벌린 괴물의 아가리 같았다.

청명의 검이 최대한 뒤로 당겨졌다.

그리하여 괴물의 아가리 같은 도가 청명의 몸을 물어뜯으려는 순간.

파아아아앗!

검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졌다.

검을 날렸다기보다는 화살을 쏘았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강력한 검격이었다.

한순간 빛살로 화한 청명의 검이 달려들던 다섯 만인방도의 목을 대번에 꿰뚫었다.

쾅!

동시에 그의 발이 땅을 박찼다.

앞으로 나아간 게 아니다.

당패와 유이설, 그리고 청명. 세 사람은 훌쩍 물러난 것이다.

쓰러지는 제 동료의 시신 사이로 그 셋이 물러나는 광경을 보자, 만인방도들의 눈에는 광기가 팽배했다.

“쫓아라아아아아아아!”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설사 거기까지 나아가는 길이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 해도, 도망치는 상대를 쫓는 쪽은 반드시 사기가 오른다.

저 강대한 검수의 뒤를 칼을 든 채 뒤쫓는다는 사실은 만인방도들이 지닌 잔혹성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크하아아아아아앗!”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지른 만인방도들은 거의 네 발로 뛰다시피 달려들었다.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채 쓰러져 있던 이들이 발에 짓밟혀 으스러졌지만, 달려드는 이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짐승처럼 악을 쓰며 화산검협을 쫓기에 바빴다.

쇄애애애애액!

당패의 비도가 전방에서 달려드는 이의 정수리를 단번에 꿰뚫었다.

“비켜라아아아!”

뒤쪽에서 날아든 도가 경련하는 이의 허리를 단번에 갈라 버렸다.

잘려 나간 동료의 상체를 후려쳐서 치운 그들은 오금이 저릴 만큼의 흉포함과 살기를 내보이며 청명을 노렸다.

“으아아아아아아!”

세상을 양단할 듯한 기세를 품은 도가 청명의 머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방어라는 개념을 완전히 내던져 버린 공격.

그 한 번의 휘두름에 모든 것을 담은, 뒤를 생각하지 않는 참격이었다.

콰득!

쏘아진 청명의 검이 만인방도의 목을 뚫고 들어가 뒷덜미로 삐죽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기세가 붙은 도는 멈춰 서기는커녕 더욱 가속하며 청명의 머리로 떨어졌다.

파앗!

청명의 발이 땅을 가볍게 밀어 냈다.

그러자 맹렬한 풍압까지 실은 도가 그의 얼굴 한 치 앞을 스쳐 지나간다.

앞머리가 풍압에 휘날렸다.

피부를 거친 톱으로 긁은 듯한 섬뜩한 감각도 이어졌다.

도의 한 부분도 몸에 닿지 않았건만, 거기에 실린 악의와 기세가 허공을 격해 몸 안으로 뚫고 들어온 느낌이었다.

오싹하고도 익숙한 감각을 몸 전체로 받아들인 청명은 박아 넣은 검을 가차 없이 단번에 비틀었다.

파하아앗!

내력을 불어넣자 꿰뚫린 목이 단번에 터져 나가며 갈 곳 잃은 머리가 위로 솟구쳤다.

뜨끈한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마치 이제부터 시작될 지독한 싸움을 알리는 축포처럼.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