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9화. 지옥을 본 적은 있고? (4)
해남 장로들은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폭발의 충격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에 검은 독이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휘몰아쳐 온다.
피하기는 이미 늦었다.
이를 악문 해남 장로들이 남은 내력을 한껏 끌어 올리고 날아드는 폭풍을 전신으로 맞이했다.
휘이이이이이이잉!
대기를 갈라 버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 바람이 해남의 장로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막아아아아아아아!”
당패의 처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저 독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전방에 있던 장로들이야 이미 늦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뒤쪽에 있는 해남 제자들에게 저 독이 닿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내력이 부족한 해남의 일반 제자들은 저 독에 잠시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독풍은 순식간에 장로들을 휩쓴 거로도 모자라 뒤쪽에 선 해남 제자들을 향해 맹렬히 불어왔다.
“어…….”
해남의 제자들은 밀려오는 독풍에 대처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광경을 망연히 보기만 했다.
악을 쓴다 한들 무슨 수로 폭풍을 막아 내겠는가?
당패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마음은 다급한데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과격하게 내뱉은 욕설이 귀를 파고들었다.
“이런, 제기랄!”
쾅!
‘녹림왕?’
임소병이 강하게 진각을 밟더니 손에 든 부채를 맹렬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흐으아아아아아압!”
단전에 찬 내력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조리 끌어 올렸다.
그리하여 부채의 본래 용도를 아주 훌륭하게 선보였다.
부채에서 발출된 가공할 선풍(煽風)이 밀려들던 독풍과 충돌했다.
독풍이 위로 또 위로 휘말려 상승했다.
휘이이이이이이이이잉!
독풍이 임소병이 뿜어내는 바람을 뚫지 못하고 절벽 위까지 솟구쳤다.
마치 절벽에 검은 벽이 생겨난 듯한 광경이었다.
으드득!
임소병의 꽉 깨문 입술에서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제 입술이 찢긴 것도 모르는 채 무아지경으로 부채를 휘둘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검사다.
그들의 무학으로는 밀려오는 바람을 어찌할 수 없다.
임소병이 아니고서야 대신 나설 사람도 없는 것이다.
오직 그가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 밀린…….’
밀려오는 독풍을 노려보던 임소병의 두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힘껏 바람을 일으키고 있지만, 애초에 폭발이 만들어 낸 여파를 그 혼자 막아 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솟구친 독의 벽은 점점 그들 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고 있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다.
“으아아! 빌어먹을!”
임소병이 고함을 내지른 그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시주, 물러나시오!”
그의 뒤에서 강렬한 황금빛 불광이 번져 왔다.
만일 소리 없이 다가왔다고 해도 그 빛만으로 누가 움직였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임소병은 마지막까지 짜낸 내력을 실어 힘껏 부채를 휘두른 후 곧바로 구르듯 몸을 날려 뒤로 피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임소병의 방어가 멎자 독풍이 더욱 성난 기세로 해남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 폭풍을 보며 혜연은 반장 한 채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그의 전신에서 장엄한 불광이 번져 나왔다.
뿜어져 나간 서광(瑞光)은 밀려오는 검은 폭풍과 그대로 충돌했다.
소림칠십이종절예 중 하나인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
소림에서조차 익힌 이가 손에 꼽는다는 전설에 가까운 절기가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혜연의 입에서 웅혼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반장 한 그의 손이 앞으로 쭉 내밀어졌다.
이내 그 상서로운 기운은 독풍 안으로 파고들어 독을 휘감았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검은 용과 황금 용이 서로를 휘감고 승천하는 듯했다.
쿠우우우우우우웅!
곧이어 혜연이 절벽을 무너뜨릴 듯 강력한 진각을 밟았다.
발이 반쯤 박혀 든 곳의 땅이 쩌적쩌적 갈라지며 사방으로 거미줄 같은 금이 생겼다.
“타아아아아아아압!”
이어지는 일권(一拳) 소림의 무거움을 고스란히 담은 아라한신권의 일격이 서로를 휘감은 용들을 절벽 위로 단번에 밀어 올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압!”
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아!
하늘 위에서 휘몰아치던 검은 독풍이 한순간 퍼엉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숨도 쉬지 못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의 눈에 마침내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마, 막았…….”
“막았다…….”
해남 제자들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과정이 쉽지는 않았으나 시간으로 따지만 겨우 숨 몇 번 내쉴 정도에 불과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지옥의 입구까지 끌려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분명 막아 내긴 했으되, 기뻐할 만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털썩.
혜연이 그 자리에 허물어진 것이다.
“스님!”
“쿨럭!”
혜연은 양손으로 땅을 짚은 채 기침했다.
입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소림의 무학은 천하에서 가장 안정적인 무학이다.
웬만해서는 무학을 사용하며 내상을 입을 일이 없다.
이는 혜연이 그런 무학을 사용하면서도 내상을 입을 만큼 무리했다는 뜻이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과 덜덜 떨리는 팔이 그 사실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스님! 괜찮으십니까?”
“나, 나보다…… 장로님들을…….”
그 말에 혜연을 바라보던 모두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독풍이 휩쓸고 간 곳에서 해남의 장로들이 비틀대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 장로님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당가의 절독이다.
막아서던 사패련의 무사들은 물론이고, 만인방의 무인들마저 절명시켜 버린 끔찍한 독.
그런 독에 완전히 휩쓸렸으니 아무리 저들이 장로들이라 해도…….
“우, 우웨에에에엑!”
그리고 이 불길한 예감은 끝내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몇몇 장로들이 검은 피를 토했다.
장로들의 총인원에 비하면야 몇 되지 않았지만, 그 사실이 희망을 주지는 못했다.
남은 이들도 중독은 되었지만, 그저 강한 내력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니까.
게다가 상황은 이제부터 더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전장이 아니라면 느긋하게 운공하여 중독을 다스릴 수 있겠으나, 지금은 그럴 여유 따윈 없으니까.
그들이 운기 하려 하는 순간, 저 승냥이 떼 같은 만인방 놈들이 득달같이 물어뜯으러 달려들 것이다.
“괜찮은가?”
“……버틸 만합니다.”
장로들을 한차례 돌아본 금양백의 얼굴에 참담한 표정이 스쳤다.
다들 얼굴에 검은 기운이 올라와 있다.
누구 하나 중독을 피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하기야 장문인 그조차 피부를 통해 파고든 독 기운을 다스리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인데 장로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 이걸!”
그 순간 당패가 그들에게 허겁지겁 달려와 새하얀 단약을 불쑥 내밀었다.
“해독단입니다!”
“해약이오?”
“……그건…….”
당패는 차마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입술을 짓깨물었다.
독 기운을 억제해 주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해약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이곳에서 중독을 어찌할 방법은 없다는 뜻이었다.
“감사하외다.”
하지만 금양백은 순순히 그 약을 받아 들었다.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러게, 왜 성급하게……!”
“닥치거라!”
당패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려는 장로를, 금양백이 죽일 듯 노려보며 저지했다.
장로는 그 위세에 움찔하여 고개를 숙였다.
“나잇값도 못 하는 놈 같으니.”
금양백이 이를 갈았다.
당패 역시 최선을 다한 것뿐이다. 그가 뒤를 막아 주지 않았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커졌을 터.
최선을 다하다 생긴 사고를 탓해서는 안 된다.
당가의 독이 아군에게조차 치명적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는가?
도움이 될 때는 환호하다가, 해가 될 때는 언제 환호했냐는 듯 욕하는 건 사람이 할짓이 아니었다.
화를 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건…….금양백의 시선이 협곡 너머로 향했다.
협곡이 살짝 경사진 덕에 입구에 서 있는 이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독심나찰…….”
욕을 해야 한다면 마땅히 저자에게 해야 한다.
당패가 독장을 날릴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폭약으로 날려 버린, 저 마귀 같은 놈을 말이다.
표정에 미동조차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호가명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모양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일하군.”
모두의 귀가 그의 목소리에 집중되었다.
“독장이라고 해 봐야 바람에 실어 날리는 것에 지나지 않지. 그럼 더 큰 바람이면 거꾸로 날려 버릴 수도 있는 법.”
호가명의 서늘한 눈빛이 당패에게 닿았다.
당패는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피가 번져 나왔다.
호가명의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독을 쓰며 고려했어야 했던 일이다.”
“이…….”
당패의 몸이 덜덜 떨렸다.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독을 쓰는 그가 독의 약점을 모를 리 없다.
화염과 폭풍이 독을 무력화한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그가 몰랐던 건 저 호가명의 악랄함이다.
당패의 시선이 폭약이 터졌던 곳으로 향했다.
이 짧은 소강을 만들어 낸 곳. 그곳엔 처참하게 뭉개진 만인방도들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다.
“……제 수하의 머리 위에서.”
“어차피 죽을 이들이었다.”
“그러고도 네놈이 만인방의 이인자냐!”
당패가 이를 악물며 외치자 호가명의 입가에 보기 드문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고도 이인자인 게 아니라, 그래서 이인자인 거지.”
수많은 의미가 실린 질문에, 수많은 의미를 담은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할 말을 잃은 당패를 대신해 곽환소가 소리쳤다.
“폭약이라니!”
핏발이 선 그의 눈에선 분노가 들끓었다. 피맺힌 외침이 이어졌다.
“이런 더러운 수를 쓰다니! 이러니 네놈들이 사파인 것이다!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호가명이 감정이 한 올 실리지 않은 눈으로 곽환소를 바라보았다.
“글쎄. 그 말을 당가 놈들이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군.”
곽환소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 말 한마디가 그의 모든 논리를 깨부쉈으니까.
“애초에 이곳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 잘못이다.”
담담한 말이 모두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걱정할 것 없다. 그 무모함만은 세상 널리 알려 줄 테니까. 너희의 협심을 천하 모두가 칭송할 것이다. 지금 강북에서 배나 긁어 대고 있는 놈들에게도 무언가 내세울 게 필요할 테니까.”
“…….”
“하지만 그 대가로…….”
호가명의 입가에 명백한 조소가 어렸다.
“너희는 지옥을 볼 것이다.”
모두의 눈에 암담한 빛이 스쳤다.
해남의 장로들은 모두 중독됐다.
이제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임소병과 혜연은 내력을 모두 소진했다.
이젠 도움이 되기는커녕 보호를 받아야 할 처지다.
당패는 이제 더는 함부로 독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결국 쫓아오는 이들을 더 이상 막아 낼 수 없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죽는다. 모두가.
“후회는 해 봐…….”
“지옥이라…….”
그때였다. 해남의 제자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전신에 피칠을 한 사내. 하지만 그 눈빛만은 더없이 차가운 검수.
“지옥을 본 적은 있고?”
청명이 혜연과 임소병, 당패를 지나쳐 해남 장로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금양백의 시선마저 뒤로한 청명이 모두의 앞에 섰다.
“그래. 지옥이 되기는 하겠지.”
파아앗!
검에 묻은 피를 한번 떨치며 흩뿌린 청명이 새하얗게 웃었다.
“우리가 아니라 너희에게 말이야, 이 애송아.”